목차
Ⅰ.서론
Ⅱ. 페미니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1. Sex/Gender/Sexuality의 차이
2. 페미니즘 사상
3. 페니스 중심에서 팰러스 중심으로의 변화는 무슨 의의가 있는가?
4. 여성성과 남성성
5. 프로이트 이론
6. 성별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다원주의적 사회를 지향하여 남성/여성의 범주를 극복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7.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하나, 아니면 모든 억압당하는 것들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하나?
Ⅲ.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
Ⅳ. 우리 문학 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양상
1. 이문열의 「선택」을 둘러싼 논쟁
2. 우리 문단에서 보이는 페미니즘의 양상
Ⅴ. 결론 ― 페미니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
Ⅱ. 페미니즘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1. Sex/Gender/Sexuality의 차이
2. 페미니즘 사상
3. 페니스 중심에서 팰러스 중심으로의 변화는 무슨 의의가 있는가?
4. 여성성과 남성성
5. 프로이트 이론
6. 성별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다원주의적 사회를 지향하여 남성/여성의 범주를 극복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7.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하나, 아니면 모든 억압당하는 것들의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하나?
Ⅲ.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
Ⅳ. 우리 문학 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양상
1. 이문열의 「선택」을 둘러싼 논쟁
2. 우리 문단에서 보이는 페미니즘의 양상
Ⅴ. 결론 ― 페미니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
본문내용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권력과의 치열한 싸움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비평 에 잘 들어맞는 예이다.
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
이 詩가 「아버지」로 비유되는 남성적 세계의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승자의 詩세계는 남성적 세계와의 싸움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있다. 그의 詩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는 폭력적 세계상은 다만 남성중심주의, 혹은 가부장적 권력으로 요약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다.
최승자와 더불어 동시대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1970~80년대의 다 양한 힘들을 과연 남성중심주의라는 한마디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는 혹 세계를 너무 단순하게 뭉뚱그려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단순성이 오히려 세계를 정치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책임을 모두 남성중심주의에 떠넘기려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페미니즘 비평은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성적 물음이 비평의 구속으로부터 한 시인의 詩的(시적) 깊이와 자유를 되돌려 주는 것이다.
김언희 또한 아버지라는 상징적 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녀는 ‘가족극장 이리와요, 아버지’에서 아버지와 성교하며 가부장적 권력의 밑바탕을 파내고 있다. 따라서 성에 대한 극적이고 파괴적인 묘사가 즐비하다. “이제, 내가, 아버지의 아가리에 똥을 쌀 차례죠.”(「말라붙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처럼 기존의 전통 윤리 관념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표현들로 이루어진 김언희의 시는 그녀가 시집 앞에서 경고했던 대로 ‘아무나’ 쉽사리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시들이다.
이에 비하여 박서원의 시는 한층 얌전하다. 그녀의 시 「발작」의 일부분을 보자.
나는 말하고 싶었어
헌데 무얼 말해야 하지?
아직 귀여운 아가씨인 내가
그녀는 뒤틀린 현실을 비꼰다. 신랄하지는 않지만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보면 뜨끔할 만한 문제 의식들이 도사리고 있는 시들이다. 어떤 작품을 더 뛰어난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여성문제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2) 소설계
―페미니즘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나라 페미니즘 소설은 대부분이 여성 작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 그 대표적 주자는 은희경, 전경린, 공지영등의 작가를 들 수 있다.
은희경 소설에서의 여성들은 대부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녀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과는 다르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선으로 본다면 ‘나쁜 여자’라고 할 만하다. 은희경은 이처럼 이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여성성을 거부한다. 다른 여성 작가들에 비해 은희경의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이 공격성과 수동성의 양극단에서 벗어나 균형감각과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은희경은 여성 소설로 읽힐 단서들(불임, 순결 이데올로기 등)을 남기면서도 그 때의 여성은 여성만이 아니라 소외된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은희경 소설에서의 여성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이 잿빛 일상을 지키고 있을 때 남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외박과 외도를 일삼으며 가정은 외면했던 아버지와 남편 영세, 울기 잘하는 인호(이중주), 병역 기피자로 호방함 속에 비굴함을 감추고 있으며 사나흘에 한번씩 아내를 때리는 바람둥이 광진테라 아저씨(새의 선물), 항시 집에 늦게 들어오고 가정에는 무심한 남편(빈처) 들이 은희경 소설안에서 여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은희경 소설이 제기하는 참다운 문제의식은 사실 이 여성들의 문제를 넘어선 곳에 있다. 그녀는 자신이 ‘페미니즘 작가’라고 명명되는 일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인간’이며 그 주인공이 대체로 여자인 것은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가장 현실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공지영, 하면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에게는 분명한 페미니스트적 의식이 엿보인다. 전경린과 박완서 등의 작가에서도 이 여성의식은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거부하는 은희경과 다른 작가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페미니즘은 목적 문학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견고하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페미니즘 문학은 그대로 화석화되고 말 것이다. 진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문학으로서 오늘의 페미니즘 소설들은 ‘여성’에 국한된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Ⅴ. 결론 ― 페미니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
진정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여성 문제를 과장되게 드러내어 나열하는 작품도, 여성 우월 주의로 치닫는 모든 작품들도 올바른 의미에서의 페미니즘은 될 수 없다.
물론 지금의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과격함은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실의 반영이 문학이라 할 때 우리는 그 본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격함이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던 현대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명히 다르다. 앞으로의 문학이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목표에 가까이 접근하는 그 때에도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있어야 할까?
작품 곳곳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성공하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기를 바란다. 투쟁하는 여전사들의 모습이기보다는 사회안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기를 바란다. 모든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때, 페미니즘 문학은 사라져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 어두운 뱃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 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잠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손이 호미가 되고 팔뚝이 낫이 되었다
이 詩가 「아버지」로 비유되는 남성적 세계의 폭력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승자의 詩세계는 남성적 세계와의 싸움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있다. 그의 詩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는 폭력적 세계상은 다만 남성중심주의, 혹은 가부장적 권력으로 요약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다.
최승자와 더불어 동시대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억압했던 1970~80년대의 다 양한 힘들을 과연 남성중심주의라는 한마디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이는 혹 세계를 너무 단순하게 뭉뚱그려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단순성이 오히려 세계를 정치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책임을 모두 남성중심주의에 떠넘기려는 것 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페미니즘 비평은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성적 물음이 비평의 구속으로부터 한 시인의 詩的(시적) 깊이와 자유를 되돌려 주는 것이다.
김언희 또한 아버지라는 상징적 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녀는 ‘가족극장 이리와요, 아버지’에서 아버지와 성교하며 가부장적 권력의 밑바탕을 파내고 있다. 따라서 성에 대한 극적이고 파괴적인 묘사가 즐비하다. “이제, 내가, 아버지의 아가리에 똥을 쌀 차례죠.”(「말라붙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처럼 기존의 전통 윤리 관념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표현들로 이루어진 김언희의 시는 그녀가 시집 앞에서 경고했던 대로 ‘아무나’ 쉽사리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시들이다.
이에 비하여 박서원의 시는 한층 얌전하다. 그녀의 시 「발작」의 일부분을 보자.
나는 말하고 싶었어
헌데 무얼 말해야 하지?
아직 귀여운 아가씨인 내가
그녀는 뒤틀린 현실을 비꼰다. 신랄하지는 않지만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보면 뜨끔할 만한 문제 의식들이 도사리고 있는 시들이다. 어떤 작품을 더 뛰어난 페미니즘 작품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여성문제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2) 소설계
―페미니즘 소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나라 페미니즘 소설은 대부분이 여성 작가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 그 대표적 주자는 은희경, 전경린, 공지영등의 작가를 들 수 있다.
은희경 소설에서의 여성들은 대부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녀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과는 다르다.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선으로 본다면 ‘나쁜 여자’라고 할 만하다. 은희경은 이처럼 이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여성성을 거부한다. 다른 여성 작가들에 비해 은희경의 여성문제에 대한 시각이 공격성과 수동성의 양극단에서 벗어나 균형감각과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은희경은 여성 소설로 읽힐 단서들(불임, 순결 이데올로기 등)을 남기면서도 그 때의 여성은 여성만이 아니라 소외된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나 이 때에도 은희경 소설에서의 여성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이 잿빛 일상을 지키고 있을 때 남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외박과 외도를 일삼으며 가정은 외면했던 아버지와 남편 영세, 울기 잘하는 인호(이중주), 병역 기피자로 호방함 속에 비굴함을 감추고 있으며 사나흘에 한번씩 아내를 때리는 바람둥이 광진테라 아저씨(새의 선물), 항시 집에 늦게 들어오고 가정에는 무심한 남편(빈처) 들이 은희경 소설안에서 여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은희경 소설이 제기하는 참다운 문제의식은 사실 이 여성들의 문제를 넘어선 곳에 있다. 그녀는 자신이 ‘페미니즘 작가’라고 명명되는 일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인간’이며 그 주인공이 대체로 여자인 것은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가장 현실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공지영, 하면 우리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에게는 분명한 페미니스트적 의식이 엿보인다. 전경린과 박완서 등의 작가에서도 이 여성의식은 비교적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거부하는 은희경과 다른 작가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페미니즘은 목적 문학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자신이 만들어놓은 견고하고 좁은 울타리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 페미니즘 문학은 그대로 화석화되고 말 것이다. 진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문학으로서 오늘의 페미니즘 소설들은 ‘여성’에 국한된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Ⅴ. 결론 ― 페미니즘 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
진정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 여성 문제를 과장되게 드러내어 나열하는 작품도, 여성 우월 주의로 치닫는 모든 작품들도 올바른 의미에서의 페미니즘은 될 수 없다.
물론 지금의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과격함은 받아들여질 수 있다. 현실의 반영이 문학이라 할 때 우리는 그 본분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격함이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던 현대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명히 다르다. 앞으로의 문학이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페미니즘이 목표에 가까이 접근하는 그 때에도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있어야 할까?
작품 곳곳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성공하는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기를 바란다. 투쟁하는 여전사들의 모습이기보다는 사회안에 녹아들어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기를 바란다. 모든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때, 페미니즘 문학은 사라져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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