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자본주의 개관
Ⅱ. 과거 경제학이 보는 자본주의와 기업
Ⅲ. 정보자본주의
Ⅳ. 역사적 자본주의
1. 만물의 상품화 : 자본의 생산
2. 축적의 정치학 : 이익을 위한 투쟁
3. 진보와 이행
Ⅴ. 영-미 계통의 수정자본주의
Ⅱ. 과거 경제학이 보는 자본주의와 기업
Ⅲ. 정보자본주의
Ⅳ. 역사적 자본주의
1. 만물의 상품화 : 자본의 생산
2. 축적의 정치학 : 이익을 위한 투쟁
3. 진보와 이행
Ⅴ. 영-미 계통의 수정자본주의
본문내용
가지 사실 즉 봉건제도라는 용어의 좁은 해석과 두 혁명의회 의원의 직업분석을 감안할 때 혁명의 범위와 규모는 현저하게 축소될 수 밖에 없다고 코반은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그의 해석을 제시한다. \"혁명은 위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아래로부터의 압력으로 계속되었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은 도시의 보다 더 빈곤한 사회층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들은 인플레와 식량 등 공급물자의 부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그 결과 잠재적인 불안의 원천이 되었는데 정치적 당파들이 그것을 이용하였다.\" 이런 코반의 견해에 대해 르페브르는 봉토의 의미는 사라졌으나 이에 관련된 \'봉건적 권리(droits feodaux)\'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고 중세의 신분제적 계서제의 유제또한 잔존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어서 자기도 부르조아지 내의 진보적 요소가 생산을 발전시킴으로써 구체제의 하부구조를 침식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며, 지적 혁신이 놀라울 정도로 관리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한 바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고려해볼 만한 연구방향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회 의원들의 다수가 관리와 자유직업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발전에 공헌한 바 없다는 코반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프랑스 혁명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공공질서에 관련된 것 이외의 모든 제한을 배제하고 기업의 자유를 선언하였다는 것이며, 바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혁명은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는데 이것은 결코 신화가 아니라고 르페브르는 단언한다. 그는 다시 제헌의회가 공직에의 자유로운 취임과 나아가 모든 특권을 폐지하게 한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언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특권집단의 계서제와 지배계급이 특권에 입각한 사회가 모든 시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구조로 대체된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언명한다. 르페브르의 비판에 대하여 코반은 \" 1789년의 농민반란은 봉건제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반란이 아니고, 도시에 대한 농촌의 기본적이고 해묵은 투쟁의 표출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영주제적 권리의 소유자들은 도시의 중산계급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789년의 농민반란은 부르조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코반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은 기본적으로 정치혁명이었다. 혁명은 정치체제의 변화라는 뜻에서의 정치혁명이었고, 사회적 변혁으로 해석된 것도 실제는 정치적 범주를 사회적인 것으로 그릇 인식했거나 잘못 해석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반자본주의적 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반자본주의적인 움직임이나 성격이 깃들어 있음은 이미 정통적인 혁명사가의 연구를 통해 지적된 바 있고 코반이 새로 발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정통적 해석이 그러한 일면을 중요시하면서 혁명을 반자본주의적인 면만을 혁명의 전부인 것처럼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1967년에 발표된 테일러의 \"비자본가적 부와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은 부분적으로 나마 코반의 주장을 옹호하는 실증적인 연구이다. 테일러의 출발점은 구체제하의 부를 상공업과 금융업에 관련된 자본주의적인 것과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의 유지를 주된 목표로 삼거나 안정되고 지속적인 그리고 경우에 따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수입을 확보하기 위한 - 예를 들면 토지 매매관직 -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이러한 구분을 기준으로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의 재산에 대한 선호도를 검토한 끝에, 대부분의 귀족과 중산계급의 전통적 재산소유자 사이에는 투자형태나 사회경제적 가치에 있어 연속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단일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의 부유층을 봉건적 귀족계급과 자본가적 부르조아지로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상치된 증거를 억지로 은폐하는 것이며,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고전적 해석은 전면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새로운 해석으로서는 정치적 접근이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두 개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절대주의와 귀족계급에 대한 투쟁은 재정적, 정치적 위기의 산물이며, 둘째 프랑스 혁명은 사회적 결과를 수반한 혁명이었으며 정치적 결과를 수반한 사회혁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테일러는 \'부르조아 혁명\'이나 \'혁명적 부르조아지\'라는 용어는 사라져야 하고, 사회사의 실체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전해 줄 다른 용어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코반과 테일러의 견해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으나 그들의 수정주의는 다같이 프랑스 혁명이 부르조아 혁명이었다는 정통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출발점은 르페브르와 같은 정통적 혁명사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좁은 산업혁명 후의 산업사회에서 통용되는 \'부르조아\'내지 \'부르조아지\' 개념이다. 즉 테일러에게 부르조아는 \'생산관계에서 자본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고 코반에게서도 부르조아지는 \'상업, 공업 그리고 금융업을 지배하는 계급\'이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영.미 수정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시작하거나 그것을 주도한 사람의 계급이 부르조아가 아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미 계통의 수정주의자들이 지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결함은 그들이 한결같이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 즉 구체제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케플러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 당시에 이미 명확히 귀족적이며 봉건적인 관계와 부르조아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그것과의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의 의미는 바로 이 양자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하면 출생과 특권과 명예에 입각한 귀족지향적인 사회와 재능과 지성 그리고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부르조아 사회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혁명은 후자를 택한 혁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것이 케플러의 결론이다. 영.미의 수정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구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거기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출발점부터 잘못 잡았던 것이다.
오히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프랑스 혁명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공공질서에 관련된 것 이외의 모든 제한을 배제하고 기업의 자유를 선언하였다는 것이며, 바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혁명은 자본주의로의 길을 열었는데 이것은 결코 신화가 아니라고 르페브르는 단언한다. 그는 다시 제헌의회가 공직에의 자유로운 취임과 나아가 모든 특권을 폐지하게 한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언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특권집단의 계서제와 지배계급이 특권에 입각한 사회가 모든 시민이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구조로 대체된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언명한다. 르페브르의 비판에 대하여 코반은 \" 1789년의 농민반란은 봉건제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반란이 아니고, 도시에 대한 농촌의 기본적이고 해묵은 투쟁의 표출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이 영주제적 권리의 소유자들은 도시의 중산계급에 속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789년의 농민반란은 부르조아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반대하는 혁명이었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코반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은 기본적으로 정치혁명이었다. 혁명은 정치체제의 변화라는 뜻에서의 정치혁명이었고, 사회적 변혁으로 해석된 것도 실제는 정치적 범주를 사회적인 것으로 그릇 인식했거나 잘못 해석한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반자본주의적 이었다. 프랑스 혁명에 반자본주의적인 움직임이나 성격이 깃들어 있음은 이미 정통적인 혁명사가의 연구를 통해 지적된 바 있고 코반이 새로 발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정통적 해석이 그러한 일면을 중요시하면서 혁명을 반자본주의적인 면만을 혁명의 전부인 것처럼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1967년에 발표된 테일러의 \"비자본가적 부와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라는 논문은 부분적으로 나마 코반의 주장을 옹호하는 실증적인 연구이다. 테일러의 출발점은 구체제하의 부를 상공업과 금융업에 관련된 자본주의적인 것과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의 유지를 주된 목표로 삼거나 안정되고 지속적인 그리고 경우에 따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수입을 확보하기 위한 - 예를 들면 토지 매매관직 - 비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이러한 구분을 기준으로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의 재산에 대한 선호도를 검토한 끝에, 대부분의 귀족과 중산계급의 전통적 재산소유자 사이에는 투자형태나 사회경제적 가치에 있어 연속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단일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의 부유층을 봉건적 귀족계급과 자본가적 부르조아지로 구분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상치된 증거를 억지로 은폐하는 것이며,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고전적 해석은 전면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새로운 해석으로서는 정치적 접근이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두 개의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절대주의와 귀족계급에 대한 투쟁은 재정적, 정치적 위기의 산물이며, 둘째 프랑스 혁명은 사회적 결과를 수반한 혁명이었으며 정치적 결과를 수반한 사회혁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끝으로 테일러는 \'부르조아 혁명\'이나 \'혁명적 부르조아지\'라는 용어는 사라져야 하고, 사회사의 실체를 정확하고 성실하게 전해 줄 다른 용어를 찾아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코반과 테일러의 견해가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으나 그들의 수정주의는 다같이 프랑스 혁명이 부르조아 혁명이었다는 정통적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출발점은 르페브르와 같은 정통적 혁명사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좁은 산업혁명 후의 산업사회에서 통용되는 \'부르조아\'내지 \'부르조아지\' 개념이다. 즉 테일러에게 부르조아는 \'생산관계에서 자본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고 코반에게서도 부르조아지는 \'상업, 공업 그리고 금융업을 지배하는 계급\'이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영.미 수정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을 시작하거나 그것을 주도한 사람의 계급이 부르조아가 아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미 계통의 수정주의자들이 지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결함은 그들이 한결같이 혁명 전의 프랑스 사회 즉 구체제에 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케플러에 의하면 프랑스 혁명 당시에 이미 명확히 귀족적이며 봉건적인 관계와 부르조아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그것과의 대립과 갈등이 존재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의 의미는 바로 이 양자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하면 출생과 특권과 명예에 입각한 귀족지향적인 사회와 재능과 지성 그리고 생산성을 중요시하는 부르조아 사회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혁명은 후자를 택한 혁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것이 케플러의 결론이다. 영.미의 수정주의자들은 바로 이러한 구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거기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출발점부터 잘못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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