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사회적 배경
(1) 사회적 배경
(2) 문학적 특징
Ⅱ. 백석의 생애
Ⅲ. 백석 시의 특징
1. 방언주의 북방정서
2. 고향의식
3. 유랑의식
4. 소재적 특징
Ⅳ. 고은 시인에 대한 평가
Ⅴ. 결론
(1) 사회적 배경
(2) 문학적 특징
Ⅱ. 백석의 생애
Ⅲ. 백석 시의 특징
1. 방언주의 북방정서
2. 고향의식
3. 유랑의식
4. 소재적 특징
Ⅳ. 고은 시인에 대한 평가
Ⅴ. 결론
본문내용
더니즘에 대해 일정하게 비판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이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물론 이들은 카프 계열의 시인들과 같은 뚜렷한 사상적 중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 시에서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극복의 전망이나 뚜렷한 이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들의 시는 전대 카프 시에 미치지 못하는 면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려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단적으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의 시는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탁월하게 형상화해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간접화된 방식으로나마 민족해방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들의 시는 전대 카프에서 그 단초를 보여주었던 리얼리즘시의 연장선상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1930년대 후반의 리얼리즘적 전통은 흔히 암흑기라 불리는 인제 말기의 극한적 상황과 그로 인한 일시적인 후퇴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의 시문학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Ⅱ. 백석의 생애
1912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의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기행으로 필명은 백석. 부친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부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침.
1918 오산소학교 입학
1924 오산고보 입학. 동문들의 회고에 의하면 재학 시절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함.
1929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문학 수업에 정진함.
1930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와 아들’을 응모, 당선하여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
1934 아오야마 학원 졸업.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함.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 잡지인 「여성」지의 편집을 맡음.
1935 8월 31일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이후 시 작품에 더욱 정진. 「조 광」지 편집부 일을 봄.
1936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 주식회사에서 200부 한정판으로 발간. 1월 29일, 서울 태서관에서 풀찬기념회를 가짐.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으로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이 참여함. 같은 해 4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감. 이때의 생활 소감을 수필 ‘가재미, 나귀’로 발표함. 이 무렵,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짐.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줌.
1938 교원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옴.
1939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함.
1940 만주의 신찡으로 옮겨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의 중국인 황씨 집에 거 처를 정함.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6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창씨 개명 강요로 곧 사직하고, 북만주의 산간오지를 기행함. 평론 ‘슬픔과 진실’을 만선일보에 발표함. 함 께 신경에 와 있던 시인 박팔양이 발간한 「여수시초」의 출판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함. 토마스 하디의 장편 소설 「테스」를 서울 조광사에서 번역 출간함. 이 책의 출판 관계로 서울을 잠시 다녀감.
1941 생계 유지를 위해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생활까지 하면서 고 생함.
1942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함.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등 을 번역함.
1944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잔 오지의 광산에 숨어서 일함.
1945 해방과 더불어 귀국,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함.
1946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비로서 조선 민주당의 일을 돌봄.
1947 시 ‘적막강산’이 그의 벗 허준에 의해 「신천지」에 발표됨. 분단 이후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한국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매몰됨.
1949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을 번역 출간.
1950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군수로 추대했다고 전함.
1953 파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
1954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번역 출간.
1956 아동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등의 평론을 발표.
1957 동화 시집 「집게네 네 형제」발간.
1958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
1959 시 「이른 봄」등 7편을 「조선 문학」에 발표.
1960 이해 12월 북한의 조선문학지에 시 ‘전별’ 등 2편을 발표
1961 12월에 그의 마지막 시작품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 문학」지에 발표함. 그 이후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아마도 숙청된 것으로 짐작됨.
Ⅲ. 백석 시의 특징
1. 방언주의 북방정서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어느 한 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 듯, 이와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 여우난골族 >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개는 나를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있는 큰집으로가면
얼굴에별자국이솜솜난 말수와같이눈도껌벅걸이는 하로에베한필을 짠다는 벌하나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많은 新里고무 고무의딸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넘은홀아비의 후처가된 포족족하니 성이잘나는 살빛이매감탕같은 입술과 젓꼭지는더깜안 예수쟁이마을가까이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딸承女 아들承동이
六十里라고해서 파랗게뵈이는山을넘어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된 코끝이
Ⅱ. 백석의 생애
1912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부친 백시박과 모친 이봉우의 장남으로 태어남. 본명은 기행으로 필명은 백석. 부친은 한국 사진계의 초기 인물로 「조선일보」의 사진반장을 지냈으나, 퇴임 부에는 귀향하여 정주에서 하숙을 침.
1918 오산소학교 입학
1924 오산고보 입학. 동문들의 회고에 의하면 재학 시절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함.
1929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문학 수업에 정진함.
1930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와 아들’을 응모, 당선하여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
1934 아오야마 학원 졸업.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함. 출판부 일을 보면서 계열 잡지인 「여성」지의 편집을 맡음.
1935 8월 31일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이후 시 작품에 더욱 정진. 「조 광」지 편집부 일을 봄.
1936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 주식회사에서 200부 한정판으로 발간. 1월 29일, 서울 태서관에서 풀찬기념회를 가짐.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으로 안석영, 함대훈, 홍기문, 김규택, 이원조, 이갑섭, 문동표, 김해균, 신현중, 허준, 김기림이 참여함. 같은 해 4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감. 이때의 생활 소감을 수필 ‘가재미, 나귀’로 발표함. 이 무렵,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 사랑에 빠짐.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줌.
1938 교원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옴.
1939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함.
1940 만주의 신찡으로 옮겨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의 중국인 황씨 집에 거 처를 정함.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6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창씨 개명 강요로 곧 사직하고, 북만주의 산간오지를 기행함. 평론 ‘슬픔과 진실’을 만선일보에 발표함. 함 께 신경에 와 있던 시인 박팔양이 발간한 「여수시초」의 출판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함. 토마스 하디의 장편 소설 「테스」를 서울 조광사에서 번역 출간함. 이 책의 출판 관계로 서울을 잠시 다녀감.
1941 생계 유지를 위해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생활까지 하면서 고 생함.
1942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함.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등 을 번역함.
1944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잔 오지의 광산에 숨어서 일함.
1945 해방과 더불어 귀국,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함.
1946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비로서 조선 민주당의 일을 돌봄.
1947 시 ‘적막강산’이 그의 벗 허준에 의해 「신천지」에 발표됨. 분단 이후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한국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매몰됨.
1949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을 번역 출간.
1950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군수로 추대했다고 전함.
1953 파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
1954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번역 출간.
1956 아동 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화 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등의 평론을 발표.
1957 동화 시집 「집게네 네 형제」발간.
1958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
1959 시 「이른 봄」등 7편을 「조선 문학」에 발표.
1960 이해 12월 북한의 조선문학지에 시 ‘전별’ 등 2편을 발표
1961 12월에 그의 마지막 시작품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 문학」지에 발표함. 그 이후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아마도 숙청된 것으로 짐작됨.
Ⅲ. 백석 시의 특징
1. 방언주의 북방정서
방언은 고향의 언어이고 유년 시절에 습득한 언어다. 따라서 방언으로 표출되는 고향마을의 풍물과 정취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며, 유년의 목소리에 실린 방언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감을 준다. 백석의 시 속에 나오는 평안도 방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언어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어느 한 구석에서 쓰이던 토속어가 틀림없다. 그럼에도 꿈결인 듯, 이와 같은 소리를 읊조리는 시인의 노래는 때로 영어나 불어 또는 이 세상 어떤 언어보다 귀에 익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 여우난골族 >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따라 우리집개는 나를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있는 큰집으로가면
얼굴에별자국이솜솜난 말수와같이눈도껌벅걸이는 하로에베한필을 짠다는 벌하나건너집엔 복숭아나무가많은 新里고무 고무의딸李女 작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넘은홀아비의 후처가된 포족족하니 성이잘나는 살빛이매감탕같은 입술과 젓꼭지는더깜안 예수쟁이마을가까이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딸承女 아들承동이
六十里라고해서 파랗게뵈이는山을넘어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된 코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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