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세속적 자연법의 시대
‘올바른 이성’의 지시만으로는 부족
현실 형성력이 있는 자연법에 대한 요청
분석하고 종합하는 방법
본론
제1장. 토마스 홉스
현실적 질서에 대한 관심
법적 안정성의 사상
홉스의 인간관
권력욕과 상호공포의 산물로서의 국가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선한 법률과 올바른 법률
홉스의 자연법론의 한계
제2장 후고 그로티우스
이념적 자연법론의 노선
스토아의 영향
신이 없더라도 타당한 자연법
자연의 소리는 만인의 일치
제3장사무엘 푸펜도르프
포괄적 자연법체계의 수립
홉스의 체계가 가져온 위험
물리세계와 도덕세계의 구별
세속적 자연법론의 관철
자연법과 도덕신학의 구별
합법성과 도덕성의 구별
그로티우스 기획의 관철
인간의 존엄사상
미국 인권 선언에 끼친 영향
제4장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
법학과 신학
법에 대한 입장
빗나간 비판
신과 신앙에 대한 인식의 차이
공리주의적 특징
이념적 자연법론의 복원
미흡한 결론들
제5장 쟝 자크 루소
루소와 홉스의 유사성
포기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
일반의지의 특징 : 이익의 공동성
이익의 균등원리와 일치되는 정당성 원리
형식주의의 요소
루소 체계의 오류
결론
세속적 자연법의 시대
‘올바른 이성’의 지시만으로는 부족
현실 형성력이 있는 자연법에 대한 요청
분석하고 종합하는 방법
본론
제1장. 토마스 홉스
현실적 질서에 대한 관심
법적 안정성의 사상
홉스의 인간관
권력욕과 상호공포의 산물로서의 국가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
선한 법률과 올바른 법률
홉스의 자연법론의 한계
제2장 후고 그로티우스
이념적 자연법론의 노선
스토아의 영향
신이 없더라도 타당한 자연법
자연의 소리는 만인의 일치
제3장사무엘 푸펜도르프
포괄적 자연법체계의 수립
홉스의 체계가 가져온 위험
물리세계와 도덕세계의 구별
세속적 자연법론의 관철
자연법과 도덕신학의 구별
합법성과 도덕성의 구별
그로티우스 기획의 관철
인간의 존엄사상
미국 인권 선언에 끼친 영향
제4장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
법학과 신학
법에 대한 입장
빗나간 비판
신과 신앙에 대한 인식의 차이
공리주의적 특징
이념적 자연법론의 복원
미흡한 결론들
제5장 쟝 자크 루소
루소와 홉스의 유사성
포기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
일반의지의 특징 : 이익의 공동성
이익의 균등원리와 일치되는 정당성 원리
형식주의의 요소
루소 체계의 오류
결론
본문내용
학적인 내용이 분열적인 인상을 준다면 라이프니츠키는 역사에서 다시 한 번 거의 완벽하게 순수하고 논리 정연한 이념적 자연법론의 기본 특성을 전개시켜 나간다. 라이프니츠키는 우선은 아주 새로운 종류의 전적으로 유명론적 성격을 띠는 자연법론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명론은 스콜라학파 안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고, 현재의 철학 작업을 쇄신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유명론을 향한 젊은 루터의 지향성을 인정하고 강조한다. 그는 스승인 라이프치히의 야콥 토마지우스에게 토마스 홉스에 대해 문의한다.『니촐리우스-서문』에서 그는 홉스를 초유명론자라고 찬양한다.
그는 초창기에는 법학과 신학을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신학을 일종의 특유한 법학으로 파악한다. 신학은 말하자면 신의 왕국에서 인간들을 통치하는 공법에 대한 이론인 셈이다. 이에 반해 그는 법학을 수학과 연관 짓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한다. 사람들이 유클리드를 믿는 까닭은 그가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이 어디가 다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증명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지가 이성에 앞선다.”라는 말이 타당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법의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를 이루는 정의와 공정성이 관철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셋째 단계로서 상위에 있는 자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상위에 있는 자가 계약을 근거로 그의 지배권을 갖게 된다면, 그는 인간이며 여기서 시민법이 나온다. 그러므로 최고의, 그리고 전능한 본질의 존재는 자연법의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 그는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법은 유효하다는 그로티우스의 명제를 논리정연하게 반박한다. 신이 없이도 어떤 식으로 정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의는 강자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데, 이와 함께 그는 신에 있어서 유익한 개념을 특별히 규명하고자 한다. 신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모든 다른 것보다 ㄷ특히 더 힘이 있다. 그의 유익함은 장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에 있다. 따라서 신의 영광은 모든 법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법 이론은 학문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법에 대한 입장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서에서 초창기의 법에 대한 확신을 가장 명료하고 예리하게 표명한다. “신은 우주에 유익한 것을 원한다. 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의 전능에 의하여 원한다. 그의 전능에 의하여 신은 홉스의 『시민에 대하여』에 나오는 증명에 따라,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 자가 원하는 것은 정의롭다.” 이러한 순전히 홉스적인 사고는 탁월한 권력을 가진 자의 의지는 또한 모든 법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문장에서도 표현된다.
실체형이상학을 전개시키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자연법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급격한 변화가 나타난다. 라이프니츠는 비판하기를 신이 악한 존재라고 사람들이 꾸며내기만 하면 그의 권력은 사악한 것을 법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되는데, 이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자연법 개념들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의지가 이성에 앞선다.”라는 명제는 전제 군주의 구호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더 이상 신과 악마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더 심오하고 더 나은 법의 원리를 찾아야지, 신적인 의지와 그의 지성에서, 혹은 그의 권력과 지혜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빗나간 비판
정의의 규준은 사물의 본성과 영원한 진리에 놓여 있다. 라이프니츠는 종교개혁자들과 유명론의 밀접한 관계를 알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교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지혜와 선의 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인 신의 충만함에 대한 이론은 이 이론에 적대적인 자들로 하여금 신의 선과 정의를 증오하는 자들을 겁내며 물러서도록 했다. 그래서 법의 기초를 놓는 교리를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일반적인 관심에 속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교리에 대한 이성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의지를 본질적으로 영원한 진리와 조화시켜 인식하는 데 있다. 이 진리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언급된 영원한 필연적인 진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사태에 대한 진리나 우연적 또는 자의적 진리에 대립되는 것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적대시하고 있는 대상들은 대체로는 허구적인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푸펜도르프에 반대하여, “신을 오로지 그의 거대함 때문에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함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선함은 개별적인 의지행위에 선행하는 신의 의지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것은 신적 결정에 확고함과 확실함을 부여한다. 신의 의지는 사랑이 많은 은혜로운 주님의 의지이다. 그러나 프펜도르프는 결코 순주한 자의 와 적나라한 힘을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비판은 결국 빗나간 것이다.
신과 신앙에 대한 인식의 차이
본질적인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주의주의와 구분된다. 주의주의는 결코 완전성을 신의 의지로부터 배제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신의 의지결정들은 우연처럼 보이고, 그 필연성이 합리적으로 통찰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신은 정의롭게 행동하여 모든 현인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인간은 세계를 통치하는 권력이 선하며 악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신앙과 신에 대한 인식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이다. 라이프니츠는 우리 삶의 최종 기반을 영원한 이성 진리에 근거 지워진 것으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성 진리는 이성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라이프니츠가 서술하듯이, 신과 인간에게 똑같이 유효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신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거나 죄 없는 자를 저주하지 않을 의무를 진다. 선의 규준은 불변하는 이성의 규칙인데, 신은 이것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오직 이러한 원칙들만이 우리에게 안정을 주는 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정당화한다.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가 바울-프란체스코바와 종교개혁파의 신개념에 반대하는 논거로 댄 것은 고대의 플라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신개념이다. 바베이
그는 초창기에는 법학과 신학을 밀접하게 결합시키고 신학을 일종의 특유한 법학으로 파악한다. 신학은 말하자면 신의 왕국에서 인간들을 통치하는 공법에 대한 이론인 셈이다. 이에 반해 그는 법학을 수학과 연관 짓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한다. 사람들이 유클리드를 믿는 까닭은 그가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이 어디가 다른지를 말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증명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지가 이성에 앞선다.”라는 말이 타당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법의 첫째 단계와 둘째 단계를 이루는 정의와 공정성이 관철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셋째 단계로서 상위에 있는 자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상위에 있는 자가 계약을 근거로 그의 지배권을 갖게 된다면, 그는 인간이며 여기서 시민법이 나온다. 그러므로 최고의, 그리고 전능한 본질의 존재는 자연법의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 그는 설사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법은 유효하다는 그로티우스의 명제를 논리정연하게 반박한다. 신이 없이도 어떤 식으로 정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의는 강자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도 정당화시키고자 하는데, 이와 함께 그는 신에 있어서 유익한 개념을 특별히 규명하고자 한다. 신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모든 다른 것보다 ㄷ특히 더 힘이 있다. 그의 유익함은 장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에 있다. 따라서 신의 영광은 모든 법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법 이론은 학문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법에 대한 입장
라이프니츠는 그의 저서에서 초창기의 법에 대한 확신을 가장 명료하고 예리하게 표명한다. “신은 우주에 유익한 것을 원한다. 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의 전능에 의하여 원한다. 그의 전능에 의하여 신은 홉스의 『시민에 대하여』에 나오는 증명에 따라,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 자가 원하는 것은 정의롭다.” 이러한 순전히 홉스적인 사고는 탁월한 권력을 가진 자의 의지는 또한 모든 법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문장에서도 표현된다.
실체형이상학을 전개시키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자연법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급격한 변화가 나타난다. 라이프니츠는 비판하기를 신이 악한 존재라고 사람들이 꾸며내기만 하면 그의 권력은 사악한 것을 법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되는데, 이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자연법 개념들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의지가 이성에 앞선다.”라는 명제는 전제 군주의 구호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더 이상 신과 악마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더 심오하고 더 나은 법의 원리를 찾아야지, 신적인 의지와 그의 지성에서, 혹은 그의 권력과 지혜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빗나간 비판
정의의 규준은 사물의 본성과 영원한 진리에 놓여 있다. 라이프니츠는 종교개혁자들과 유명론의 밀접한 관계를 알았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교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지혜와 선의 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인 신의 충만함에 대한 이론은 이 이론에 적대적인 자들로 하여금 신의 선과 정의를 증오하는 자들을 겁내며 물러서도록 했다. 그래서 법의 기초를 놓는 교리를 이성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일반적인 관심에 속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교리에 대한 이성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의지를 본질적으로 영원한 진리와 조화시켜 인식하는 데 있다. 이 진리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서 언급된 영원한 필연적인 진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사태에 대한 진리나 우연적 또는 자의적 진리에 대립되는 것이다. 여기서 라이프니츠가 적대시하고 있는 대상들은 대체로는 허구적인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푸펜도르프에 반대하여, “신을 오로지 그의 거대함 때문에 두려워만 할 것이 아니라, 그의 선함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선함은 개별적인 의지행위에 선행하는 신의 의지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것은 신적 결정에 확고함과 확실함을 부여한다. 신의 의지는 사랑이 많은 은혜로운 주님의 의지이다. 그러나 프펜도르프는 결코 순주한 자의 와 적나라한 힘을 법의 기초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의 비판은 결국 빗나간 것이다.
신과 신앙에 대한 인식의 차이
본질적인 점에서 라이프니츠는 주의주의와 구분된다. 주의주의는 결코 완전성을 신의 의지로부터 배제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신의 의지결정들은 우연처럼 보이고, 그 필연성이 합리적으로 통찰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신은 정의롭게 행동하여 모든 현인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인간은 세계를 통치하는 권력이 선하며 악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여기서 결국 드러나는 것은 신앙과 신에 대한 인식 사이의 근본적인 구별이다. 라이프니츠는 우리 삶의 최종 기반을 영원한 이성 진리에 근거 지워진 것으로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성 진리는 이성적으로 근거지울 수 있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라이프니츠가 서술하듯이, 신과 인간에게 똑같이 유효한 정의의 법칙에 따라, 신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거나 죄 없는 자를 저주하지 않을 의무를 진다. 선의 규준은 불변하는 이성의 규칙인데, 신은 이것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 오직 이러한 원칙들만이 우리에게 안정을 주는 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정당화한다.
마지막으로 라이프니츠가 바울-프란체스코바와 종교개혁파의 신개념에 반대하는 논거로 댄 것은 고대의 플라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신개념이다. 바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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