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경연관의 구성
3. 경연의 운영
4. 경연관의 활동
5. 맺음말
2. 경연관의 구성
3. 경연의 운영
4. 경연관의 활동
5. 맺음말
본문내용
筵堂上 1인, 郎廳 2인, 承旨 1인, 臺諫 1인, 史官 1인이 참여하고, 論語를 읽고 해석하기를 세 번씩 한 다음 왕이 한번 읽고 해석하였다. 주강에서는 승지 1인, 경연낭청 1인, 사관 1인이 참여하고, 조강에서 배운 부분을 한번 읽고 해석하였다. 『성종실록』, 권2, 성종 2년 1월 丙戌.
이렇듯 조강에서는 의정부, 6조, 승정원, 홍문관, 대간 등 권력 핵심부서의 관원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석강은 경연이 시작된지 한 달 뒤에 처음 실시 되었는데, 이 때 참가했던 사람은 승지 1명, 경연관 2명, 사관 1명 등 모두 4명이었다. 그리고 석강이 끝난 뒤 성종은 “이후부터 경연 당하관을 1명씩 守直하라.”명했는데, 이는 야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실록』, 권3, 원년 2월 己巳.
한편 성종 9년에 홍문관이 설립되어 홍문관원이 강의를 전담하게 되었다. 『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申巳.
이들은 경연강의로 주, 주, 석강, 야대에 두 명씩 교대로 입시 하였고, 이들은 정치의 제반 문제에 관하여 조언했으며 왕과 백관의 잘못을 규찰하는 역할까지 아울러 맡아서 이른바 삼사의 하나가 되었다.
성종이 경연의 교재는 주로 유교경전과 역사류였다. 유교경전으로는 『大學』, 『論語』, 『孟子』, 『中庸』을 배운 후에 시, 서, 역 3경을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 순서였다. 역사류로는 『資治通鑑』, 『資治通鑑綱目』, 『史記』와 『漢書』등이 있었다. 그밖에 『性理大全』, 『近思綠』, 『貞觀政要』,『大學義』등이 있었다.
성종대의 경연교재의 특기할 점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책을 이 때 처음 사용한 것이다. 성종12년 홍문관에 傳敎한 내용을 보면
“조강에는 『자치통감』의 강독이 끝난 다음에는 『성리대전』을 진강하고 --중략-- 석강에는 『맹자』의 강독이 끝난 뒤에는 『고려사』를 진강하라.” 『성종실록』, 권127, 성종12년 3월 丁酉.
즉, 종래 경연에서 사용된 책은 중국의 고전과 명저였는데 성종은 『高麗史』와 『國朝寶鑑』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經筵官의 활동
성종은 13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하에서 원상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왕권이 약하고 원상의 정치적 권력이 비대해져 대간은 대신들의 압력에 위축되어 있는 시기였다.
성종1년 5월 성종은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박숭질(朴崇質), 여지(呂)에게
“한재(旱災)가 크게 심하므로 내가 매우 진려(軫慮)한다. 관리로서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와 탐오(貪汚)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를 만약 대간(臺諫)에서 말하지 아니하면, 내가 어떻게 듣겠느냐? 그것을 속히 기록하여 계달하라.” 『성종실록』, 권10, 성종1년 5월 乙巳.
라고 하여 대간의 역할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후 적극적인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종 3년 6월 박시형은 원상 제도를 폐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종실록』, 권19, 성종3년 6월 甲申.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 관원이 모두 교체되었다. 여기서 대간은 원상의 세력을 견제하려 힘
이렇듯 조강에서는 의정부, 6조, 승정원, 홍문관, 대간 등 권력 핵심부서의 관원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석강은 경연이 시작된지 한 달 뒤에 처음 실시 되었는데, 이 때 참가했던 사람은 승지 1명, 경연관 2명, 사관 1명 등 모두 4명이었다. 그리고 석강이 끝난 뒤 성종은 “이후부터 경연 당하관을 1명씩 守直하라.”명했는데, 이는 야대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실록』, 권3, 원년 2월 己巳.
한편 성종 9년에 홍문관이 설립되어 홍문관원이 강의를 전담하게 되었다. 『성종실록』, 권90, 성종 9년 3월 申巳.
이들은 경연강의로 주, 주, 석강, 야대에 두 명씩 교대로 입시 하였고, 이들은 정치의 제반 문제에 관하여 조언했으며 왕과 백관의 잘못을 규찰하는 역할까지 아울러 맡아서 이른바 삼사의 하나가 되었다.
성종이 경연의 교재는 주로 유교경전과 역사류였다. 유교경전으로는 『大學』, 『論語』, 『孟子』, 『中庸』을 배운 후에 시, 서, 역 3경을 배우는 것이 일반적이 순서였다. 역사류로는 『資治通鑑』, 『資治通鑑綱目』, 『史記』와 『漢書』등이 있었다. 그밖에 『性理大全』, 『近思綠』, 『貞觀政要』,『大學義』등이 있었다.
성종대의 경연교재의 특기할 점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책을 이 때 처음 사용한 것이다. 성종12년 홍문관에 傳敎한 내용을 보면
“조강에는 『자치통감』의 강독이 끝난 다음에는 『성리대전』을 진강하고 --중략-- 석강에는 『맹자』의 강독이 끝난 뒤에는 『고려사』를 진강하라.” 『성종실록』, 권127, 성종12년 3월 丁酉.
즉, 종래 경연에서 사용된 책은 중국의 고전과 명저였는데 성종은 『高麗史』와 『國朝寶鑑』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經筵官의 활동
성종은 13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하에서 원상들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왕권이 약하고 원상의 정치적 권력이 비대해져 대간은 대신들의 압력에 위축되어 있는 시기였다.
성종1년 5월 성종은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박숭질(朴崇質), 여지(呂)에게
“한재(旱災)가 크게 심하므로 내가 매우 진려(軫慮)한다. 관리로서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와 탐오(貪汚)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를 만약 대간(臺諫)에서 말하지 아니하면, 내가 어떻게 듣겠느냐? 그것을 속히 기록하여 계달하라.” 『성종실록』, 권10, 성종1년 5월 乙巳.
라고 하여 대간의 역할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후 적극적인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성종 3년 6월 박시형은 원상 제도를 폐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성종실록』, 권19, 성종3년 6월 甲申.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 관원이 모두 교체되었다. 여기서 대간은 원상의 세력을 견제하려 힘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