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 차*
<<서론>>
시대적 배경
<<본론>>
생애
대표작품 및 활동
유적지 탐방
<<결론>>
단원의 비판
<<서론>>
시대적 배경
<<본론>>
생애
대표작품 및 활동
유적지 탐방
<<결론>>
단원의 비판
본문내용
인하여 당쟁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기본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강고하게 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여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하여,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걸게 된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였으며,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4. 중인문화의 장려와 문예부흥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하여 왕권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시키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을 기도하였다.그런데 이 검서관들은 신분이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庶#얼02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펴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중인(中人)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여기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京衙典)이 주축이 된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어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시집인 《풍요속선 風謠續選》을 발간하는 등 성관(盛觀)을 이루게 되어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되고 뒷날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의 효시를 보게도 되었다.
때문에 이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그 문예부흥이 가능하였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안으로는 조선성리학의 이념인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정신적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있어 문화의 제반분야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畵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러한 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5. 문화사업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밖에도 《일성록 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 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 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것이었다.
6. 장헌세자에 대한 예우
한편, 그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고,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노력을 치렀다. 그러면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그 인근의 용주사(龍珠寺)를 개수, 확장하여 원찰(願刹)로 삼기도 하였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2.본 론 -생 애-
김홍도(1745~1805)
본관:김해
자:사능
호:초기:서호
중년:단원,취화사,고면거사
말년:단구,농사옹
출생지:
1)서울 성산동-마포에서 서강까지 이르 는 한강변 15리이다 이를 서호라 하 며 초년의 호가 서호인것도 출생지를 따라서 지었다
2)경기도 안산-단원의 스승인 강세황의 집에 어렸을 때 부터 드나들며 그림 을 배웠다는 설이 있다 표암강세황이 지은 단원기에도 그가 젖니가 날 때
나에게 왔다라는 글귀가 남겨져 있다.
-최고의 스승 강세황-
그가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엇던 것은 표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분이었다 강세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본 관: 진주(晋州) 강(姜)
자.호: 광지(光之), 표암(豹菴), 첨재(
그러나 강고하게 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여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하여,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가 1794년에 들고 나온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문풍(文風)의 개혁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초부터 문풍이 세도(世道)를 반영한다는 전제 아래 문풍쇄신을 통한 세도의 광정(匡正)을 추구하기도 하였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내걸게 된 것은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술수였으며, 탕평책의 구체적인 장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4. 중인문화의 장려와 문예부흥
그는 학문적으로도 육경(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을 뿐 아니라 예론(禮論)에 있어서도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를 주장하여 왕권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남인학파 내지 남인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그러나 ‘천하동례(天下同禮)’를 주창하면서 신권(臣權)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 자제들은 북학사상(北學思想)을 형성시키고 있었으므로 그의 학자적 소양은 이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규장각에 검서관(檢書官)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의 종장(宗匠)인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들, 즉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등을 등용함으로써 그 사상의 수용을 기도하였다.그런데 이 검서관들은 신분이 서얼로서 영조 때부터 탕평책의 이념에 편승하여 ‘서얼통청운동(庶#얼02通淸運動)’이라는 신분상승운동을 펴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임용은 서얼통청이라는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는 조처이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같이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문운(文運)을 진작시켜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중인(中人)이하 계층의 위항문학(委巷文學)도 적극 지원하였다. 여기서 인왕산을 중심으로 경아전(京衙典)이 주축이 된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委巷人)들이 귀족문학으로 성립되어온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시집인 《풍요속선 風謠續選》을 발간하는 등 성관(盛觀)을 이루게 되어 중인문화의 원동력이 되고 뒷날 ‘필운대풍월(弼雲臺風月)’의 효시를 보게도 되었다.
때문에 이 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그 문예부흥이 가능하였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의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이 고취되고, 이에 따른 북벌론(北伐論)의 대의명분 아래 안으로는 조선성리학의 이념인 예치(禮治)의 실현이라는 당면과제를 국민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룩한 정신적 자긍심과 조선문화의 독자적 발전에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경향은 18세기 전반에 있어 문화의 제반분야에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를테면 그림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국화풍(國畵風)’, 글씨에서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국서풍(國書風)’이 그러한 것이다. 이는 조선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바로 이러한 축적 위에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이른바 조선 후기의 도미적성관(掉尾的盛觀)으로 파악되는 황금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5. 문화사업
정조의 업적은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이 대종을 이루지만, 이밖에도 《일성록 日省錄》의 편수,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의 편찬, 장용영(壯勇營)의 설치, 형정(刑政)의 개혁,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의 폐지, 《자휼전칙 字恤典則》의 반포, 《서류소통절목 庶類疏通節目》의 공포,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의 폐지, 천세력(千歲曆)의 제정 및 보급, 통공정책(通共政策)의 실시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치문제로 되고 있던 서학(西學)에 대하여 정학(正學)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한 점도 높이 평가할 것이었다.
6. 장헌세자에 대한 예우
한편, 그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에도 고심하였다.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고,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존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하는 노력을 치렀다. 그러면서 양주 배봉산(拜峰山) 아래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하였다가 다시 융릉(隆陵)으로 올렸고, 그 인근의 용주사(龍珠寺)를 개수, 확장하여 원찰(願刹)로 삼기도 하였다.
1800년 6월에 49세의 나이로 죽자 그의 유언대로 융릉 동쪽 언덕에 묻혔다가 그의 비 효의왕후가 죽으면서(1821) 융릉 서쪽 언덕에 합장되어 오늘날의 건릉(健陵)이 되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宣皇帝)가 되었다.
2.본 론 -생 애-
김홍도(1745~1805)
본관:김해
자:사능
호:초기:서호
중년:단원,취화사,고면거사
말년:단구,농사옹
출생지:
1)서울 성산동-마포에서 서강까지 이르 는 한강변 15리이다 이를 서호라 하 며 초년의 호가 서호인것도 출생지를 따라서 지었다
2)경기도 안산-단원의 스승인 강세황의 집에 어렸을 때 부터 드나들며 그림 을 배웠다는 설이 있다 표암강세황이 지은 단원기에도 그가 젖니가 날 때
나에게 왔다라는 글귀가 남겨져 있다.
-최고의 스승 강세황-
그가 당대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엇던 것은 표암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분이었다 강세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세황(姜世晃): 1713(숙종 39)∼1791(정조 15)
본 관: 진주(晋州) 강(姜)
자.호: 광지(光之), 표암(豹菴), 첨재(
추천자료
[여성상][우리나라 여성상][한국 여성상][조선시대][문학][여성운동]우리나라 여성상(여성상,...
[법원][조선시대의 법원][법원의 권한][법원의 종류][헌법재판][법원의 재판][재판][조선시대...
불상의 시대별특징(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
[한국교육사][고구려][백제][신라][조선][실학][근대]한국교육사 고구려시대교육, 한국교육사...
[주거문화][원시][선사][신석기][청동기][삼국][고려][조선]원시시대 주거문화, 선사시대 주...
[주거문화][원시][원삼국][삼국][고구려][고려][조선][일제]원시시대의 주거문화, 원삼국시대...
[조선해어화사][춘향뎐][춘향전][기생][조선시대]조선해어화사와 춘향뎐(춘향전)을 통해 본 ...
[조선시대 과학기술] 기상학을 통해 살펴본 조선 후기 근대 과학 기술 (조선시대의 기상학, ...
[한국문화사] 조선시대 의복사 - 옷, 의복, 조선시대 의복의 특징과 배경, 남성의 의복, 여성...
[한국문화사] 조선시대의 의복 - 옷, 의복, 조선시대의 복식의 특징(복식금제), 남자의 의복,...
[한국문화사] 조선 시대 의복의 역사 - 의복, 옷의 기원, 조선시대 여성의 옷, 조선시대 남성...
[한국문화사] <조선시대 의복> 조선시대 의복의 특징과 남자 의복 및 여자 의복, 조선시대 수...
[교육철학 및 교육사(Ⅱ)]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후기의 교육사상, 근대의 교육 (조선시대 교...
[사회복지행정] 한국의 사회복지 행정에 관하여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중 한 시대를 선...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