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적(事蹟) 및 저서
2. 맹자와 그의 시대
3. 윤리설
1) 성선설
2) 천(天), 명(命)의 개념
3) 선천양심론(先天良心論)
4) 덕론(德論)
5) 수양(修養)의 공부
가. 소극적 방법
ㄱ.과욕(寡欲)
ㄴ. 존야기(存夜氣)
나. 적극적 방법
ㄱ. 확충(擴充)
ㄴ. 양기(養氣)
6) 민본주의(民本主義)와 혁명사상
7) 왕도정치와 정전법
8) 맹자의 의리(義利)
9) 정치적 존재로서의 대인(大人)
10)맹자의 교육관
11) 맹자의 교육 목적과 방법
12) 맹자의 엘리트주의
4. 맹자 사상의 의의와 나의 생각
5. <맹자>의 한 구절
2. 맹자와 그의 시대
3. 윤리설
1) 성선설
2) 천(天), 명(命)의 개념
3) 선천양심론(先天良心論)
4) 덕론(德論)
5) 수양(修養)의 공부
가. 소극적 방법
ㄱ.과욕(寡欲)
ㄴ. 존야기(存夜氣)
나. 적극적 방법
ㄱ. 확충(擴充)
ㄴ. 양기(養氣)
6) 민본주의(民本主義)와 혁명사상
7) 왕도정치와 정전법
8) 맹자의 의리(義利)
9) 정치적 존재로서의 대인(大人)
10)맹자의 교육관
11) 맹자의 교육 목적과 방법
12) 맹자의 엘리트주의
4. 맹자 사상의 의의와 나의 생각
5. <맹자>의 한 구절
본문내용
1. 사적(事蹟) 및 저서
맹자 (孟子), BC 371경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BC 289경 중국. 중국의 고대 철학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 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맹자 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 (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 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물러나 문인인 만장(萬章)등과 함께 문답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받들어 <맹자孟子> 7편을 저술했다. 맹자는 주열왕 4년(기원전 372년)에 탄생하여, 주난왕 26년(기원전 289)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참고:인터넷 검색>
<그림1; 맹묘와 맹부 정문 :중국 산둥성 추현> <그림2; 맹자 초상
: 중국 산둥성 추현 맹부 강유당>
2. 맹자와 그의 시대
맹자는 역사가들에게는 전국시대로 알려지고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때는 중앙 정부인 주(周)왕실이 지배권을 잃고 여러 봉건 국가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전국 시대는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질 수 있다.
첫째, 모든 면에서 전쟁이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한편에서는 큰 나라들이 황제 자리를 노리고 서로 싸웠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약소한 나라들은 자위와 생존 투쟁을 벌여야 될 형세로 몰려들어갔다. 등 나라의 문공은 맹자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형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불만을 표시했다. “등 나라는 작은 나라이다. 큰 나라를 섬기려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압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둘째, 전쟁은 그들에게 병역의 의무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나친 세금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풍년에는 비참한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고 기근의 해에는 굶어죽기 일쑤였다. 셋째, 이때는 방랑하는 외교가와 정치가들의 시대였으며 이들은 실상 기회주의적인 고급 용병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인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만큼 모아들인 것은 양 나라의 왕만이 아니었다. 성공하기에 급급한 거의 모든 불안정한 지배자들은 인재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한편 재사들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때때로 왕후들은 이 교묘한 조력자들의 손에 걸린 불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성나면 왕후들이 무서워서 떤다. 그러나 그들이 은퇴하면 세상이 화평해진다.” 넷째, 전국 시대는 여러 학파들이 여러 이설(異說)을 발전시킨 시대였다. 정통적인 유교를 위협할 만큼 열광적인 지적인 활동의 시대였다. 이점이야말로 맹자의 평생에 걸친 유교 수호의 자극을 마련한 것으로 왜 싸움을 좋아하느냐고 물은 한 제자에 대한 그의 답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왜 싸움을 좋아하느냐고?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옛날 우(禹)왕은 넘치는 물을 잘 다루어 세상은 질서가 잡혔었다. 주공은 야만족을 정벌하였고 흉포한 짐승들을
맹자 (孟子), BC 371경 중국의 고대 추(鄒)나라~BC 289경 중국. 중국의 고대 철학자.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與)·자거(子車 또는 子居), 시호는 추공(鄒公). 공자의 정통 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다. 그가 내세운 기본원칙의 핵심은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한 것이다.〈맹자 孟子〉는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서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다. 맹자의 가문은 귀족가문으로 현재의 산둥성[山東省]에 해당하는 작은 국가 추(鄒)에 정착해 살았다. 맹자는 추나라에서 BC 371년경에 태어났는데 그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일생과 닮은 점이 많았다. 추와 노(魯:공자가 태어난 나라)는 인접한 국가였고 공자와 마찬가지로 맹자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의 어머니는 묘지·시장·학교 부근으로 3번이나 이사해 (孟母三遷) 마침내 맹자가 학교 근처의 면학적 분위기에 적응해 공부를 열심히 하게끔 교육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외에도 학업에는 인내와 열성이 중요하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베틀 위의 베를 찢어버린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맹자의 어머니는 수천 년 동안 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되어왔다. 젊은 학자 시절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으로 수업했다. 이렇게 해 공자 사상의 정통성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마침내 맹자도 남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고 잠시 제(齊)나라의 관리로도 일했다. 그는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제후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라고 조언했다. 그 당시는 혼란기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인정보다는 패도(覇道)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인정에 바탕을 둔 왕도(王道) 정치를 역설한 맹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물러나 문인인 만장(萬章)등과 함께 문답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받들어 <맹자孟子> 7편을 저술했다. 맹자는 주열왕 4년(기원전 372년)에 탄생하여, 주난왕 26년(기원전 289)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84세였다. <참고:인터넷 검색>
<그림1; 맹묘와 맹부 정문 :중국 산둥성 추현> <그림2; 맹자 초상
: 중국 산둥성 추현 맹부 강유당>
2. 맹자와 그의 시대
맹자는 역사가들에게는 전국시대로 알려지고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때는 중앙 정부인 주(周)왕실이 지배권을 잃고 여러 봉건 국가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전국 시대는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질 수 있다.
첫째, 모든 면에서 전쟁이 이 시대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한편에서는 큰 나라들이 황제 자리를 노리고 서로 싸웠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약소한 나라들은 자위와 생존 투쟁을 벌여야 될 형세로 몰려들어갔다. 등 나라의 문공은 맹자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형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불만을 표시했다. “등 나라는 작은 나라이다. 큰 나라를 섬기려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압박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둘째, 전쟁은 그들에게 병역의 의무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지나친 세금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풍년에는 비참한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고 기근의 해에는 굶어죽기 일쑤였다. 셋째, 이때는 방랑하는 외교가와 정치가들의 시대였으며 이들은 실상 기회주의적인 고급 용병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훌륭한 인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만큼 모아들인 것은 양 나라의 왕만이 아니었다. 성공하기에 급급한 거의 모든 불안정한 지배자들은 인재를 닥치는 대로 모았다. 한편 재사들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때때로 왕후들은 이 교묘한 조력자들의 손에 걸린 불모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이 성나면 왕후들이 무서워서 떤다. 그러나 그들이 은퇴하면 세상이 화평해진다.” 넷째, 전국 시대는 여러 학파들이 여러 이설(異說)을 발전시킨 시대였다. 정통적인 유교를 위협할 만큼 열광적인 지적인 활동의 시대였다. 이점이야말로 맹자의 평생에 걸친 유교 수호의 자극을 마련한 것으로 왜 싸움을 좋아하느냐고 물은 한 제자에 대한 그의 답변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왜 싸움을 좋아하느냐고? 그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옛날 우(禹)왕은 넘치는 물을 잘 다루어 세상은 질서가 잡혔었다. 주공은 야만족을 정벌하였고 흉포한 짐승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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