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시대의 사상에 대해서…….
조선시대의 결혼.
왕실의 결혼
일반인의 혼례
남녀칠세부동석
임신과 기자 습속
수절
(1)수절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성 범죄
간통
강간
매춘과 섹슈얼리티
조선시대의 성 풍속을 정리하며…….
조선시대의 결혼.
왕실의 결혼
일반인의 혼례
남녀칠세부동석
임신과 기자 습속
수절
(1)수절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성 범죄
간통
강간
매춘과 섹슈얼리티
조선시대의 성 풍속을 정리하며…….
본문내용
유별에 대한 관념이 모든 계층에까지 퍼졌음을 알려주는 상징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남녀유별은 어떤 근거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유교의 오륜사상 중 부부유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했지만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에게 수절을 강요했고 그 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비천한 존재로 보았다. 아득히 먼 옛날 공자와 맹자에 의해 기틀을 잡은 유학사상은 조선시대에 와서 와전되고 곡해된 상태로 민간에 전승되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유교에서 말하는 오륜이 그 사회 그 인간의 요청에 의하여 제기된 사회 규약적인 또는 통치 이데올로기의 수단이나 당위 규범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방식의 문제라는 점이다. 맹자의 참뜻을 헤아려보면 부부유별이란 부부 사이에 차별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분별, 구별이 있다는 뜻이었다. 부부가 각기 할 일을 해서 그 본분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생리적 구별, 그 기능적 구별, 그 의리적 구별이 없지 않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분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기다리며 마중하여 조화를 이루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동일한 것은 조화되지 않고 분별되는 것만이 조화되므로 그런 뜻에서 부부 사이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맹자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사는 것은 인간의 대륜이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익 지키기’는 여느 시대와 다름없이 조선시대에도 어김없이 나타났고 조선의 수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고의적인 횡포에 의해 희생당했다.
임신과 기자 습속
조선시대에도 \'성교육\'은 있었다. 서당에서도 \'보정\'이란 생리철학을 가르쳤다. 자손의 우량생산을 위해 \'귀숙일(씨내리는 날)\'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성생활\'도 가부장의 소관이었다. 이것은 가문을 빛낼 자손생산이라는 명분하에 존재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성생활은 곧 건강의 비결이었다고 믿었다. 그것은 욕망의 분출이라는 차원 보다는 \'자손의 생산\'이라는 차원이 더 강조되었다. 자식을 낳기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조선사, 그것을 위해 양자도 들이고, 씨받이도 들이고, 어쩌다가 부인을 또 들이고 그러기에 그에 따른 풍습과 미신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목표가 아들을 낳아 잘 키우는 일이었던 만큼 아들 낳기 위한 갖가지 비방은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했다.
수절
(1)수절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조선시대 과부의 생활
조선시대의 과부란 어떤 존재인가? 이제 과부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 과부는 사회적인 무게를 가지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의 과부에게 수절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강요였다. 소학과 삼강행실도등 국가가 열성적으로 보급한 서적들은 끊임없이 수절을 찬미, 그것은 후대로 갈수록 상민들에게까지 스며들게 된다.
수절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자살이었는데 남편이 죽은 후 아내가 따라 죽으면 열녀의 칭호를 얻었고 그것은 가문과 지역사회의 영광이었다. 이렇게 지극히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수절의 강요는 여성들의 재가를 금지시킴으로서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고 기득권을 대대로 물려주기 위한 일부 권력자들의 횡포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런 우스꽝스러운 열녀 만들기에 대해 비판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 밖에 없었다.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니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열’이란 거룩한 이름을 빌린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죽음이 왜 장려되고 유행했던가? 다산은 말한다.
“나는 확고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미 의에 합당한 자살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이 될 뿐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열녀는 증가하는데 그 이면에는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세금의 감면이란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이렇듯 일부 양반 계층에서만 이루어지던 수절은 점차 ‘양반 따라하기’에 젖어든 상민들에게까지 전승되었으며 이러한 폐단은 어을우동과 감동의 스캔들까지 일으키게 한다.
조선시대의 과부는 본인은 재혼을 열망한다 할지라도, 주위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수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풍속으로 여성이 재혼하면, 그 여성의 행위를 악덕시 하고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는 데만 그치지 않고, 친정의 집안도 사회적,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되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다음으로 재혼한 여성의 자손에게는 관원 등용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경국대전의 조항으로 인하여, 아들을 가진 과부의 아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겠다는 어머니로서 안타까운 배려에 기인하여 수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끝으로 여성 스스로가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수절하며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자의에 의한 수절이었는데 그 시대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여성의 수절을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에 그 모범이 될 여성을 애써 찾은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의 수절은 위정자들에 의해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었으며, 더욱이 성종 대에는 여성의 재가 억제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여성의 수절은 더욱 더 장려되었고, 태종대에는 열부를 정표할 것을 명하였을 정도였다. 당시 수절하는 열녀는 국가의 표창대상이 될 수 있을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았으나, 성종 이후에는 자의·타의에 의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지고, 또 습속화 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조선의 과부들은 항상 「과부업어가기」의 습속에 의해 주위 남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과부업어가기」풍속은 재혼 기피의 양반 풍속이 서민 사이에까지 전파되어 못이기는 체하고 타율적으로 가장시켜 최소한의 명분을 세워준 개가 허용의 한 방법이다. 이 경우 미리 쌍방 합의하에 남자 쪽이 튼튼한 장정이 나타나서 과부를 약탈해 가는 형식이다. 이미 약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체면상, 여자 쪽에서는 그냥 뺏기고 있을 수도 없어 몽둥이를 가지고 부형들이 뒤
그렇다면 이러한 남녀유별은 어떤 근거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유교의 오륜사상 중 부부유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했지만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여성들에게 수절을 강요했고 그 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비천한 존재로 보았다. 아득히 먼 옛날 공자와 맹자에 의해 기틀을 잡은 유학사상은 조선시대에 와서 와전되고 곡해된 상태로 민간에 전승되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유교에서 말하는 오륜이 그 사회 그 인간의 요청에 의하여 제기된 사회 규약적인 또는 통치 이데올로기의 수단이나 당위 규범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방식의 문제라는 점이다. 맹자의 참뜻을 헤아려보면 부부유별이란 부부 사이에 차별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분별, 구별이 있다는 뜻이었다. 부부가 각기 할 일을 해서 그 본분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생리적 구별, 그 기능적 구별, 그 의리적 구별이 없지 않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 분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기다리며 마중하여 조화를 이루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한다. 동일한 것은 조화되지 않고 분별되는 것만이 조화되므로 그런 뜻에서 부부 사이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인 관계이다. 그래서 맹자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사는 것은 인간의 대륜이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익 지키기’는 여느 시대와 다름없이 조선시대에도 어김없이 나타났고 조선의 수많은 여성들은 이러한 고의적인 횡포에 의해 희생당했다.
임신과 기자 습속
조선시대에도 \'성교육\'은 있었다. 서당에서도 \'보정\'이란 생리철학을 가르쳤다. 자손의 우량생산을 위해 \'귀숙일(씨내리는 날)\'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성생활\'도 가부장의 소관이었다. 이것은 가문을 빛낼 자손생산이라는 명분하에 존재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성생활은 곧 건강의 비결이었다고 믿었다. 그것은 욕망의 분출이라는 차원 보다는 \'자손의 생산\'이라는 차원이 더 강조되었다. 자식을 낳기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의 조선사, 그것을 위해 양자도 들이고, 씨받이도 들이고, 어쩌다가 부인을 또 들이고 그러기에 그에 따른 풍습과 미신들도 많았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목표가 아들을 낳아 잘 키우는 일이었던 만큼 아들 낳기 위한 갖가지 비방은 상식으로 알고 있어야 했다.
수절
(1)수절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
⊙조선시대 과부의 생활
조선시대의 과부란 어떤 존재인가? 이제 과부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 때 과부는 사회적인 무게를 가지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의 과부에게 수절은 선택이 아니라 사실상 강요였다. 소학과 삼강행실도등 국가가 열성적으로 보급한 서적들은 끊임없이 수절을 찬미, 그것은 후대로 갈수록 상민들에게까지 스며들게 된다.
수절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자살이었는데 남편이 죽은 후 아내가 따라 죽으면 열녀의 칭호를 얻었고 그것은 가문과 지역사회의 영광이었다. 이렇게 지극히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수절의 강요는 여성들의 재가를 금지시킴으로서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고 기득권을 대대로 물려주기 위한 일부 권력자들의 횡포였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런 우스꽝스러운 열녀 만들기에 대해 비판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 밖에 없었다. 다산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이런 경우가 아니다.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 아랫목에서 조용히 운명하였는데도 아니가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열’이란 거룩한 이름을 빌린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죽음이 왜 장려되고 유행했던가? 다산은 말한다.
“나는 확고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흉한 일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이미 의에 합당한 자살이 아니라면 그것은 천하의 가장 흉한 일이 될 뿐이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열녀는 증가하는데 그 이면에는 열녀가 난 집안이라는 명예와 세금의 감면이란 달콤한 유혹이 있었다. 이렇듯 일부 양반 계층에서만 이루어지던 수절은 점차 ‘양반 따라하기’에 젖어든 상민들에게까지 전승되었으며 이러한 폐단은 어을우동과 감동의 스캔들까지 일으키게 한다.
조선시대의 과부는 본인은 재혼을 열망한다 할지라도, 주위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 수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풍속으로 여성이 재혼하면, 그 여성의 행위를 악덕시 하고 그 자손의 벼슬길을 막는 데만 그치지 않고, 친정의 집안도 사회적,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되는 경우가 생겼던 것이다. 다음으로 재혼한 여성의 자손에게는 관원 등용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경국대전의 조항으로 인하여, 아들을 가진 과부의 아들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겠다는 어머니로서 안타까운 배려에 기인하여 수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끝으로 여성 스스로가 유교적인 가치관에 따라 수절하며 생활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자의에 의한 수절이었는데 그 시대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여성의 수절을 적극 권장하였기 때문에 그 모범이 될 여성을 애써 찾은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의 수절은 위정자들에 의해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되었으며, 더욱이 성종 대에는 여성의 재가 억제가 법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여성의 수절은 더욱 더 장려되었고, 태종대에는 열부를 정표할 것을 명하였을 정도였다. 당시 수절하는 열녀는 국가의 표창대상이 될 수 있을 만큼 그 수가 많지 않았으나, 성종 이후에는 자의·타의에 의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지고, 또 습속화 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 조선의 과부들은 항상 「과부업어가기」의 습속에 의해 주위 남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과부업어가기」풍속은 재혼 기피의 양반 풍속이 서민 사이에까지 전파되어 못이기는 체하고 타율적으로 가장시켜 최소한의 명분을 세워준 개가 허용의 한 방법이다. 이 경우 미리 쌍방 합의하에 남자 쪽이 튼튼한 장정이 나타나서 과부를 약탈해 가는 형식이다. 이미 약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체면상, 여자 쪽에서는 그냥 뺏기고 있을 수도 없어 몽둥이를 가지고 부형들이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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