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까지 했다. 원래 그가 러시아에 있을 때부터 전위음악가들은 그의 음악을 측은히 여겼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로 대표되는 20세기의 음악은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1934년에는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 1936년에는 <교향곡 제3번 a단조>, 1940년에는 <교향적 무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랩소디>만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939년 8월 아내, 큰딸 이리나, 손녀딸 소피아를 데리고 안전한 미국으로 다시 갔다. 일단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작곡에 전념했지만 유럽을 아주 잊을 수는 없었다. 프랑스에 남아 있던 작은딸 타탸나부부와 손자 알렉산드르로부터 소식이 끊겼다. 독일의 러시아 침공은 커다란 슬픔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수많은 공연의 수익금을 러시아 전쟁구호기금에 기부하자 구소련정부는 그에게 다시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북귀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이루지 못한 채 1943년 초부터 갑자기 악화된 건강으로 그해 3월 28일 캘리포니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비벌리힐스에서 있었으나, 그의 유해는 나중에 뉴욕주 켄시코로 옮겨져 러시아정교 교회에 딸린 조용한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트라빈스키나 바실렌코 등이 인상주의 이후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러시아의 국민성을 반영했으며, 슬라브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는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진지한 인격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또한,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는 그 악기의 극한까지의 특성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고,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다.
III. 라흐마니노프의 작곡적, 작품적 특징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와 동시대인 20세기 작곡가들에게서 보여지는 모더니즘이나 당시 러시아 예술의 사실적 흐름들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던 20세기초반부터 전세계의 음악적 경향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이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20세기 음악을 이해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고 솔직히 언급하였다. 자신만의 길을 고집했으며, 이를 통하여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피아노음악들을 작곡하고 그것들을 뛰어난 연주로 남기고 있다.
그는 19세기 낭만주의 스타일을 근본으로 하는 형식미를 갖춘 세련된 경향과, 서구적 모스크바악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러시아 민족적 색체를 융합시킨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립시켰다. 예컨대 문학적인 면에서는 주로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선호하고 있으며, 음악적인 면에서는 다이나믹의 극대화, 반음계적 선율, 풍부한 화성 등 19세기 후기 낭만주의 정서에 기인하는 우수, 감상, 애수의 성격이 그의 작품에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세계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스크리아빈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스크리아빈이 프랑스 인상주의 기법과 신비주의를 토대로 음악을 펼쳤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처럼 민족적인 특성과 후기 낭만적인 어법을 혼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크리아빈이 그들의 어법을 수용한 채 작품을 창작하고 연주하였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을 엄격한 훈련을 통해 얻은 기교와 깊은 음악성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스크리아빈은 오직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했고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반면에 연주에 있어서 놀라운 기교를 지녔던 라흐마니노프는 베토벤, 슈만, 쇼팽,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등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였으며, 특히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과거의 대작들과 자신의 작품과 편곡들을 연주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스크리아빈의 연주를 이지적이며 감각적인 터치를 들어 칭찬하였고, 라흐마니노프에게서는 노래하는 듯한 음을 좋아하였는데, 마치 피아노가 그의 손길 아래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노래하는 듯한 연주는 특히 반주자로서의 명성도 함께 얻게 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의 유명한 성악가인 샬리아핀의 반주를 맡아 연주를 하였는데, 반주자로서 그는 성악가와 같이 호흡하는 방법을 익혀 음악의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1943년에 세상을 떠난 것만을 생각하면 라흐마니노프는 분명 현대음악가로 분류해야 마땅하지만 음악적 내용에서 본다면 차이코프스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어 낭만적 민족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 받을 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코프스키는 국민악파가 아니다. 차이코프스키와 함께 라흐마니노프는 국민악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전통적인 후기낭만음악파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 덕분에 ‘유럽과 결탁한 차이코프스키의 후계자’라는 미움과 반박을 받았고 림스카-코르사코프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5인조(국민악파)와 크게 대립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체격이 매우 당당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성격은 소심해서 그 일이 그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1939년 8월 아내, 큰딸 이리나, 손녀딸 소피아를 데리고 안전한 미국으로 다시 갔다. 일단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작곡에 전념했지만 유럽을 아주 잊을 수는 없었다. 프랑스에 남아 있던 작은딸 타탸나부부와 손자 알렉산드르로부터 소식이 끊겼다. 독일의 러시아 침공은 커다란 슬픔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수많은 공연의 수익금을 러시아 전쟁구호기금에 기부하자 구소련정부는 그에게 다시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이 무렵 그는 고국 러시아로 북귀하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그 실현을 이루지 못한 채 1943년 초부터 갑자기 악화된 건강으로 그해 3월 28일 캘리포니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떴다. 장례식은 비벌리힐스에서 있었으나, 그의 유해는 나중에 뉴욕주 켄시코로 옮겨져 러시아정교 교회에 딸린 조용한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음악의 이른바 서구적인 모스크바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같은 시대의 스트라빈스키나 바실렌코 등이 인상주의 이후 근대음악의 영향을 풍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의 흐름 속에 잠겨있었다.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러시아의 국민성을 반영했으며, 슬라브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는 소박하고 솔직하며, 어두운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진지한 인격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또한, 피아니스트로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육중한 체구에서 우러나오는 정력적인 연주와 초인적인 기교는 그 악기의 극한까지의 특성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고,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에 독자적인 해석을 낳았다.
III. 라흐마니노프의 작곡적, 작품적 특징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와 동시대인 20세기 작곡가들에게서 보여지는 모더니즘이나 당시 러시아 예술의 사실적 흐름들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뿐만 아니라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던 20세기초반부터 전세계의 음악적 경향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이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20세기 음악을 이해하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고 솔직히 언급하였다. 자신만의 길을 고집했으며, 이를 통하여 역사상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피아노음악들을 작곡하고 그것들을 뛰어난 연주로 남기고 있다.
그는 19세기 낭만주의 스타일을 근본으로 하는 형식미를 갖춘 세련된 경향과, 서구적 모스크바악파의 전통을 이어받은 러시아 민족적 색체를 융합시킨 독특한 작품세계를 확립시켰다. 예컨대 문학적인 면에서는 주로 19세기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작품을 선호하고 있으며, 음악적인 면에서는 다이나믹의 극대화, 반음계적 선율, 풍부한 화성 등 19세기 후기 낭만주의 정서에 기인하는 우수, 감상, 애수의 성격이 그의 작품에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세계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스크리아빈과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스크리아빈이 프랑스 인상주의 기법과 신비주의를 토대로 음악을 펼쳤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서처럼 민족적인 특성과 후기 낭만적인 어법을 혼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작곡가들의 음악에서 쇼팽과 리스트의 영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크리아빈이 그들의 어법을 수용한 채 작품을 창작하고 연주하였다면, 라흐마니노프는 쇼팽과 리스트의 피아노 음악을 엄격한 훈련을 통해 얻은 기교와 깊은 음악성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스크리아빈은 오직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했고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반면에 연주에 있어서 놀라운 기교를 지녔던 라흐마니노프는 베토벤, 슈만, 쇼팽,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등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였으며, 특히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과거의 대작들과 자신의 작품과 편곡들을 연주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스크리아빈의 연주를 이지적이며 감각적인 터치를 들어 칭찬하였고, 라흐마니노프에게서는 노래하는 듯한 음을 좋아하였는데, 마치 피아노가 그의 손길 아래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평하고 있다. 그의 노래하는 듯한 연주는 특히 반주자로서의 명성도 함께 얻게 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의 유명한 성악가인 샬리아핀의 반주를 맡아 연주를 하였는데, 반주자로서 그는 성악가와 같이 호흡하는 방법을 익혀 음악의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1943년에 세상을 떠난 것만을 생각하면 라흐마니노프는 분명 현대음악가로 분류해야 마땅하지만 음악적 내용에서 본다면 차이코프스키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어 낭만적 민족주의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 풍부한 선율성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은, 직접 차이코프스키와 연결되는 것이며 수많은 그의 피아노곡이나 가곡은 그러한 낭만주의의 전형이었으며, 거기에는 진취성이 있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어나, 20세기에 있어서의 낭만주의의 한 흐름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호 받을 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코프스키는 국민악파가 아니다. 차이코프스키와 함께 라흐마니노프는 국민악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 전통적인 후기낭만음악파로 역사에 남아 있다. 그 덕분에 ‘유럽과 결탁한 차이코프스키의 후계자’라는 미움과 반박을 받았고 림스카-코르사코프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5인조(국민악파)와 크게 대립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체격이 매우 당당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성격은 소심해서 그 일이 그의 가슴에 큰 상처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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