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동학사상과 농민전쟁
(1) 동학사상과 그 조직
(2) 교조신원에서 ‘斥倭洋’으로
2.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고부민란
1) 고부민란의 배경
2) ‘사발통문’ 거사 계획
(2)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3)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4) 농민군의 재봉기와 동학 상층부의 대응
(5) 공주 공방전과 농민군의 패배
(1) 동학사상과 그 조직
(2) 교조신원에서 ‘斥倭洋’으로
2. 동학농민전쟁의 전개
(1) 고부민란
1) 고부민란의 배경
2) ‘사발통문’ 거사 계획
(2)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3) 전주화약과 폐정개혁안
(4) 농민군의 재봉기와 동학 상층부의 대응
(5) 공주 공방전과 농민군의 패배
본문내용
것인 만큼 고부민란 단계가 아니라 전봉준이 무장에 남접도소를 차린 3월 중순경에 결의된 것으로 추정하는 해석도 있지만, (다)의 ‘봉기계획’을 마련한 시점은 11월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등장을 올린 다음이 아니라 전주감영에까지 정소한 다음인 12월에서 1894년 1월 11일 고부민란 발발 사이의 어느 시점인 것으로 추정하는 해석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전봉준 등 동학의 개혁세력은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부터 중앙권력의 교체를 목표로 운동을 전개해 온 연속선상에서 중앙권력을 목표로 한 봉기 계획이 구상되고 있었는데. 이 문건에서 그러한 계획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결의사항 중의 제4항이 고부민란에서 당장 기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중앙권력을 목표로 한 전국적 항쟁은 이 단계에서 이미 구상되어 있었으며, 고부민란은 그러한 구상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제1차 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전봉준이 군사를 해산한 뒤에 박원명을 협박하고 민란의 모든 책임을 농민측에 전가하고 봉기한 농민을 정부가 금하는 ‘동학도’라 하여 포박, 구타하고 가옥을 불지르고 재화를 약탁하며 부녀자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갖은 횡포를 저질렀다. 이용태의 만행은 흩어졌던 봉기 참가자들은 다시 모이게 하였다.
전봉준 등은 4월 각지의 동학접주에 대하여 ‘보국안민’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다. 5월 4일에는 고부, 태안 일대의 농민이 각지의 무기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고부군내 白山에 집결하였다. 고부군내에 있는 백산은 조선의 곡창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남평야의 동진강만경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에 있는 정부의 창고에는 4천 석의 세미가 보관되어 있었다. 여기에 근거지를 정한 농민군은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농민군의 지도부로 삼았다. 호남창의소는 이상 삼 인의 이름으로 창의문을 발표했다. 창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倡 義 文 -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인군(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현량하고 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보좌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되이 간하는 말은 요언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이 날로 심하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부터 방백수령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니 팔도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守宰)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직 제몸 하나 온전함의 방책만을 꾀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팔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이 창의문에서는 기존의 유교적 윤리를 준거로하여 양반관료를 중심으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농민군 봉기의 정당성을 농민대중에게 선포하고 있다. 이전의 민란 단계에서 고을 수령이 주요 타격목표가 되었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공경(公卿)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까지’의 봉건통치층 전체가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농민군이 지역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조선봉건체제 전체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제몸 하나 온전함의 방책만을 꾀한다’고 하는 데에서 반제 민족주의 의식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창의문은 동학 농민전쟁 최초의 창의문이기 때문에 아직 농민전쟁의 호응도가 불확실한 조건에서 일반 농민의 지지를 널리 구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일반 농민들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정도를 의식하여 유교의 용어와 사상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국가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임을 누누히 강조하는 어조로 되어 있다. 즉 이 창의문에서는 농민군 지도부의 봉기목표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데 중점이 두어졌다기 보다는 봉기의 대중적 지지를 겨냥하는 데 일차적 목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전봉준은 진 중에 글을 돌려 격문과 농민군이 지켜야할 4대명의를 발표하였다.
- 격 문 -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2) 고부민란의 농민전쟁으로의 발전
제1차 농민전쟁은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전봉준이 군사를 해산한 뒤에 박원명을 협박하고 민란의 모든 책임을 농민측에 전가하고 봉기한 농민을 정부가 금하는 ‘동학도’라 하여 포박, 구타하고 가옥을 불지르고 재화를 약탁하며 부녀자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갖은 횡포를 저질렀다. 이용태의 만행은 흩어졌던 봉기 참가자들은 다시 모이게 하였다.
전봉준 등은 4월 각지의 동학접주에 대하여 ‘보국안민’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돌렸다. 5월 4일에는 고부, 태안 일대의 농민이 각지의 무기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고부군내 白山에 집결하였다. 고부군내에 있는 백산은 조선의 곡창이라고 일컬어지는 호남평야의 동진강만경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에 있는 정부의 창고에는 4천 석의 세미가 보관되어 있었다. 여기에 근거지를 정한 농민군은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농민군의 지도부로 삼았다. 호남창의소는 이상 삼 인의 이름으로 창의문을 발표했다. 창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倡 義 文 -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인군(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현량하고 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보좌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되이 간하는 말은 요언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이 날로 심하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부터 방백수령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니 팔도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守宰)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직 제몸 하나 온전함의 방책만을 꾀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팔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이 창의문에서는 기존의 유교적 윤리를 준거로하여 양반관료를 중심으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농민군 봉기의 정당성을 농민대중에게 선포하고 있다. 이전의 민란 단계에서 고을 수령이 주요 타격목표가 되었던 것에 비해 여기서는 ‘공경(公卿)부터 방백수령(方伯守令)까지’의 봉건통치층 전체가 규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농민군이 지역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서 조선봉건체제 전체를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제몸 하나 온전함의 방책만을 꾀한다’고 하는 데에서 반제 민족주의 의식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창의문은 동학 농민전쟁 최초의 창의문이기 때문에 아직 농민전쟁의 호응도가 불확실한 조건에서 일반 농민의 지지를 널리 구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당시 일반 농민들의 이데올로기적 인식정도를 의식하여 유교의 용어와 사상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국가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는 것임을 누누히 강조하는 어조로 되어 있다. 즉 이 창의문에서는 농민군 지도부의 봉기목표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데 중점이 두어졌다기 보다는 봉기의 대중적 지지를 겨냥하는 데 일차적 목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 전봉준은 진 중에 글을 돌려 격문과 농민군이 지켜야할 4대명의를 발표하였다.
- 격 문 -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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