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시인 소개 및 시에 대한 분석
1) 이상화
- 나의 침실로
2) 오장환
- 여수
3) 백석
- 북방에서
3. 나오는 말
4. 참고문헌
2. 시인 소개 및 시에 대한 분석
1) 이상화
- 나의 침실로
2) 오장환
- 여수
3) 백석
- 북방에서
3. 나오는 말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참석 인원은 문인을 포함하여 20여명 정도 되었다. 2월 22일에는 수필《편지》를 발표. 3월에는 《남행시초(南行詩抄)》를 완성하여 朝鮮日報에 발표함. 그 달에 조선일보 출판부 편집 기자직을 그만둠. 4월에는 함흥의 영생고보(永生高普)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음. 하숙은 운흥리(雲興里)에서 하다가 중리(中里)로 옮김. 8월에는 서울을 잠시 다녀감. 9월에는 수필 《가재미.나귀》를 발표함.
1937년(26세): 함경도를 여행한 후 10월에 《함주시초(咸州詩抄)》를 발표.
1938년(27세): 6월 7일 東亞日報에 최고의 명작 수필《동해(東海)》를 발표. 12월 함흥 영생고보 교사직 사임, 서울로 감.
1939년(28세): 1월 26일부로 朝鮮日報 출판부에 재입사. 2월 14일에 수필 《입춘(立春)》을 발표. 당시의 서울 주소는 경성부외(京城府外) 서독도리(西纛島里) 656번지. 3월부터 {女性}지 편집자로 근무. 10월 21일부로 사임. 그후 평안도 지역을 여행하며 《서행시초(西行詩抄)》를 완성.
1940년(29세): 1월경 만주(滿洲)로 감. 당시의 주소는 신경시(新京市) 동삼마로(東三馬路) 시영주택(市營住宅) 35 황씨방(黃氏方)으로 알려짐. 3얼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 근무. 이후 북만주의 산간 오지 등을 여행하면서 원시부족들과 접촉함. 이때 오로촌族과 쏠론族과도 교류를 가짐. 5월에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슬픔과 진실》과 《조선인과 요설(饒舌)》을 발표. 또한 김소운(金素雲)에 의해 {젖빛 구름(乳色の雲)}이라는 책에서 백석의 작품이 일역(日譯)됨. 9월경에는 국무원 경제부 사임. 서울을 잠시 다녀감. 9월 30일에는 토마스 하디의 대작 {테스}를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조광사(朝光社)에서 출간.
1941년(30세): 4월 {조광(朝光)}지와 {문장(文章)}지, 그리고 {인문평론(人文評論)}에서 백석의 최고 걸작시 발표([歸農], [국수], [힌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 이], [ 塘에서], [杜甫나 李白같이]).
1942년(31세): 안동세관에 근무. 러시아 작가 빠이코프의 작품을 번역함. 《식인호》,《초혼조》,《밀림유정》등.
1943년(32세): 동경 왕문사(旺文社)에 몇달 근무 후 다시 귀향. 친구 그리다께 가스오(則式三雄)가 발표한 {압록강}에서 백석의 시가 실려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음.
1944년(33세): 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의 광산에서 근무.
1945년(34세): 해방을 맞이하여 대동강 기슭에 거주. 최명익과 함께 북한의 우익 문인으로 활동.
1946년(35세): 연초부터 고당 조만식 선생 통역비서.
1949년(38세): 9월에 쏠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여 출간.
1951년(40세): 중국 길림성에 체류.
1953년(42세): 1월에는 빠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
1954년(43세): 중국 길림성에서 백석의 주도로 번역한 {이싸꼽쓰끼詩抄}가 출간됨.
1956년(45세): 5월에《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산문 발표. 9월에는《나의 항의 나의 제의-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라는 제목의 산문발표.
1957년(46세): 동화시집《집게네 네형제》발표. 6월 산문《큰 문제 작은 고찰》이라는 아동문학에 관한 글을 발표함.
1958년(47세): 8월에는《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 백석은 5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순수서정적인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나 점차로 북한의 우상 이데올로기와 상충되어 계속 비판을 받다가 60년대 초에는 집필금지를 당하고 결국 숙청당함.
1963년(52세): 사망한 것으로 일본에 알려짐.
1987년: 월북작가 해금이 단행되어 그 동안 억울하게 매장되었던 시인 백석의 시집이 여러 출판사에 의해 출간됨.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 본명은 기행(夔行).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 동향인 관서 출신의 시인 김 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을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지만,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소월의 시에도 민요가락에 실어서 표현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훨씬 더 짙게 마천령 서쪽지역인 평안도 쪽의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노래하고 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1) 백석 시 경향(초기-중기-말기)
백석의 시는 대체로 세 단계로 변모한다. 초기 시는 이미지즘적 수법을 활용하여 주관적인 정서를 배제하고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를 그려내거나, <여우난곬족>과 같이 자신의 고향인 평북 정주의 풍속을 재현한 시들로, 시기적으로는 시집《사슴》을 간행하기 전후, 즉 1930년대 중반기의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기 시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여 ‘유랑민’가은 삶을 살던 시기, 즉 1930년대 말에서 해방기에 이르는 시기의 시들이다. 그의 중기 시는 대체로 객관적 정세가 약화되고 있던 식민지 말기의 현실을 배경으로, 고향 상실감과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편, 후기 시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쓴 작품들이다.
백석의 중기 시들은 대체로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여, 유랑민처럼 살아가던 시기의 시인 자신의 체험과 북방 유랑민의 삶을 다루고 있다. <북방에서>라는 작품 역시, 고향을 잃고 만주의 광야를 헤매고 있는 시적자아의 정신적 방황과 위기의식을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글에서 백석의 <북방에서>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백석 시세계를 살펴보고 백석 시가 지니는 의의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한다.
2. 백석의 시
北方에서 1940년 7월 <문장지>에 발표된 시 원본
-鄭玄雄에게
백석
아득한
1937년(26세): 함경도를 여행한 후 10월에 《함주시초(咸州詩抄)》를 발표.
1938년(27세): 6월 7일 東亞日報에 최고의 명작 수필《동해(東海)》를 발표. 12월 함흥 영생고보 교사직 사임, 서울로 감.
1939년(28세): 1월 26일부로 朝鮮日報 출판부에 재입사. 2월 14일에 수필 《입춘(立春)》을 발표. 당시의 서울 주소는 경성부외(京城府外) 서독도리(西纛島里) 656번지. 3월부터 {女性}지 편집자로 근무. 10월 21일부로 사임. 그후 평안도 지역을 여행하며 《서행시초(西行詩抄)》를 완성.
1940년(29세): 1월경 만주(滿洲)로 감. 당시의 주소는 신경시(新京市) 동삼마로(東三馬路) 시영주택(市營住宅) 35 황씨방(黃氏方)으로 알려짐. 3얼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 근무. 이후 북만주의 산간 오지 등을 여행하면서 원시부족들과 접촉함. 이때 오로촌族과 쏠론族과도 교류를 가짐. 5월에는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슬픔과 진실》과 《조선인과 요설(饒舌)》을 발표. 또한 김소운(金素雲)에 의해 {젖빛 구름(乳色の雲)}이라는 책에서 백석의 작품이 일역(日譯)됨. 9월경에는 국무원 경제부 사임. 서울을 잠시 다녀감. 9월 30일에는 토마스 하디의 대작 {테스}를 번역하여 단행본으로 조광사(朝光社)에서 출간.
1941년(30세): 4월 {조광(朝光)}지와 {문장(文章)}지, 그리고 {인문평론(人文評論)}에서 백석의 최고 걸작시 발표([歸農], [국수], [힌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 이], [ 塘에서], [杜甫나 李白같이]).
1942년(31세): 안동세관에 근무. 러시아 작가 빠이코프의 작품을 번역함. 《식인호》,《초혼조》,《밀림유정》등.
1943년(32세): 동경 왕문사(旺文社)에 몇달 근무 후 다시 귀향. 친구 그리다께 가스오(則式三雄)가 발표한 {압록강}에서 백석의 시가 실려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음.
1944년(33세): 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의 광산에서 근무.
1945년(34세): 해방을 맞이하여 대동강 기슭에 거주. 최명익과 함께 북한의 우익 문인으로 활동.
1946년(35세): 연초부터 고당 조만식 선생 통역비서.
1949년(38세): 9월에 쏠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번역하여 출간.
1951년(40세): 중국 길림성에 체류.
1953년(42세): 1월에는 빠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
1954년(43세): 중국 길림성에서 백석의 주도로 번역한 {이싸꼽쓰끼詩抄}가 출간됨.
1956년(45세): 5월에《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라는 산문 발표. 9월에는《나의 항의 나의 제의-아동시와 관련하여, 아동문학의 새 분야와 관련하여》라는 제목의 산문발표.
1957년(46세): 동화시집《집게네 네형제》발표. 6월 산문《큰 문제 작은 고찰》이라는 아동문학에 관한 글을 발표함.
1958년(47세): 8월에는《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 백석은 5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순수서정적인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나 점차로 북한의 우상 이데올로기와 상충되어 계속 비판을 받다가 60년대 초에는 집필금지를 당하고 결국 숙청당함.
1963년(52세): 사망한 것으로 일본에 알려짐.
1987년: 월북작가 해금이 단행되어 그 동안 억울하게 매장되었던 시인 백석의 시집이 여러 출판사에 의해 출간됨.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 본명은 기행(夔行).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 동향인 관서 출신의 시인 김 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을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지만,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소월의 시에도 민요가락에 실어서 표현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훨씬 더 짙게 마천령 서쪽지역인 평안도 쪽의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노래하고 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1) 백석 시 경향(초기-중기-말기)
백석의 시는 대체로 세 단계로 변모한다. 초기 시는 이미지즘적 수법을 활용하여 주관적인 정서를 배제하고 대상의 즉물적 이미지를 그려내거나, <여우난곬족>과 같이 자신의 고향인 평북 정주의 풍속을 재현한 시들로, 시기적으로는 시집《사슴》을 간행하기 전후, 즉 1930년대 중반기의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중기 시는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여 ‘유랑민’가은 삶을 살던 시기, 즉 1930년대 말에서 해방기에 이르는 시기의 시들이다. 그의 중기 시는 대체로 객관적 정세가 약화되고 있던 식민지 말기의 현실을 배경으로, 고향 상실감과 그 극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편, 후기 시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정착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쓴 작품들이다.
백석의 중기 시들은 대체로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여, 유랑민처럼 살아가던 시기의 시인 자신의 체험과 북방 유랑민의 삶을 다루고 있다. <북방에서>라는 작품 역시, 고향을 잃고 만주의 광야를 헤매고 있는 시적자아의 정신적 방황과 위기의식을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글에서 백석의 <북방에서>를 통해 미약하게나마 백석 시세계를 살펴보고 백석 시가 지니는 의의에 대해 탐구해보고자 한다.
2. 백석의 시
北方에서 1940년 7월 <문장지>에 발표된 시 원본
-鄭玄雄에게
백석
아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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