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술의 어원
2술과 관련한 옛 행사
3.술의 종류
4. 우리나라의 주점
5.금주령에 관해
3.결론
2. 본론
1술의 어원
2술과 관련한 옛 행사
3.술의 종류
4. 우리나라의 주점
5.금주령에 관해
3.결론
본문내용
저작이다)에는 “젊은 계집이 있는 술집을 색주가(色酒家)라 한다”는 말이 있다. 색주가는 적어도 19세기에는 확실히 존재했으며 더 소급해 18세기 후반경에 생긴 것으로 보아도 상관이 없을 듯하다. 이는 정조 때를 말하는 것인데, 그 이전 영조 때 강력한 금주령이 시행됐음을 고려했을 때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영조 이전 상황은 알 수가 없다.
내외주점과 사발막걸리집, 모주집의 기원은 미상이다. 이서구의 ‘주막, 서민의 바아’는 내외주점의 출현 시기를 개화기로 잡고 있는데, 이서구의 이 글 자체에 오류가 많아 미심쩍기는 하지만, ‘황성신문’ 등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온 신문에서도 처음으로 내외주점이란 단어가 보인다. 아마도 그 문헌적 증거의 상한선은 19세기 말이 될 것이다.
●폭음문화 경고한 연암 박지원
술집에 대해 실학자 등 당대 사상가들은 날카로운 비평을 했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술집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흥미롭다. 박지원은 1780년 7월10일 중국 성경(盛京)에 도착하여 그곳의 주루(酒樓)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중국 술집의 큰 규모와 화려함과 운치에 충격을 받는다. 문득 서울의 술집이 생각난다. 그는 서울의 술집을 이렇게 쓴다.
“우리나라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독하고, 이른바 술집이란 것은 모두 항아리 입 같은 창에 새끼줄로 만든 문지도리가 있다. 길 왼편의 작은 각문(角門)에 새끼줄 발을 드리우고, 쳇바퀴로 등롱(燈籠)을 만든 것은 틀림없는 술집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흔히 말하는 푸른 깃발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술집 등마루에 꽂힌 깃발 장대를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조선의 술집은 항아리 입구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로 지도리를 만든 문이 있고, 길 옆 작은 각문에 새끼로 발을 늘이고 쳇바퀴로 등롱을 만들어 달아 술집임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영조 말년 실록에 나왔던 주등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술집의 깃발은 시의 관습적 표현이지 실제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려하고 거창하고 청결한 술집을 본 연암에게 조선의 술집이란 것이 눈에 찰 리가 없었던 것 같다. 중국의 명사와 벼슬아치들은 기생집과 술집에 출입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술집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퇴근길에 들르는 곳이요, 명사들이 몰려들어 술 취한 김에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다. 조선의 술집 문화는 어떠했을까.
“술 마시는 양만은 너무나 커서 큰 사발에 철철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들이켠다. 이는 무작정 술을 쏟아 붓는 것이지 마시는 것이 아니고, 배를 불리려는 것이지 흥취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 주정이고, 술 주정을 했다 하면 싸움질이고, 싸움을 벌였다 하면 술집의 술항아리며 술잔을 죄다 걷어차 깨어버린다. 이른바 풍류를 즐기는 문아(文雅)한 모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풍류와 문아한 술자리는 되레 술 배를 불리는 데 무익하다고 비웃는다. 이런 술집(골동품과 화초로 장식된 중국 술집)을 우리나라에 옮겨온다 해도, 하루 저녁을 못 넘기고 그 골동품은 부서지고 화초는 꺾이고 밟힐 것이니 이것이 가장 애석한 일이리라.”
연암의 시각에선 술집에서 고상한 풍치는커녕 술을 뱃속에 쏟아 붓고, 주정을 하고 싸움을 벌이고 급기야 술집을 마구 부수는 것이 조선 말 술집의 풍경이었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가들이 언제나 현실을 어둡게 묘사하듯, 열렬한 개혁주의자 박지원은 역시 화려 무비한 중국을 보았기 때문인지 조선의 것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금속화폐 발달로 술집 번창
한편으로는 17세기 말에 이미 조선의 대표적 지성인이 국민들의 ‘폭음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이 관심을 끌기도 한다. 요즘 한국사회에도 ‘폭탄주 문화’가 만연해 있는 것과 관련지어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17세기 말에도 폭음은 문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0년이 지났어도 한국인의 폭음 습성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다.
숙종조에 모습을 보인 시정의 술집은 영조 치세의 혹독한 금주령에 의해 일시 위축되다가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와서 번성하게 된다. 술집 문화가 발달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발전에 있을 것이다. 자급자족 경제 체제에서는 주점의 호황을 기대할 수 없다. 또 술을 사서 마신다는 것은 금속화폐의 발달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18세기는 조선시대 경제적 융성기였다. 화폐가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대동법과 균역법의 전면적인 시행으로 도시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기술적 진보로 인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일부 계층에 생활의 여유를 가져오게 했고 급기야 시정의 술집타운까지 출현케 했던 것이다.
3.결론
이로서 내가 생각했던 전통술로 부터시작해서 조선시대의 술의 문화와 금주령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자세히는 아니지만 간략히나마 알아보았다. 이처럼 긴 역사를 가진 우리의 술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풍습과 이와 함께 사라져간 우리의 문화들이 아깝고 아쉬웠으며 옛 것을 완전히 살려 내는건 무리겠지만 그걸 조금이라도 복원해보려는 노력은 필요할거 같다는걸 느꼈다. 더 나아가서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알기위서 전통 즉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되도록 주관적이지 않도록 또 객관성을 띄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지만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사하고 레포트를 쓰는 동안 우리 것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고문헌
대한주류공업협회홈페이지 (http://www.kalia.or.kr/drink)
동아일보 매거진 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04/28/200304280500025/200304280500025_1.html)
산사원 홈페이지 (http://www.sansawon.co.kr)
진로홈페이지(http://www.jinro.co.kr/)
내외주점과 사발막걸리집, 모주집의 기원은 미상이다. 이서구의 ‘주막, 서민의 바아’는 내외주점의 출현 시기를 개화기로 잡고 있는데, 이서구의 이 글 자체에 오류가 많아 미심쩍기는 하지만, ‘황성신문’ 등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나온 신문에서도 처음으로 내외주점이란 단어가 보인다. 아마도 그 문헌적 증거의 상한선은 19세기 말이 될 것이다.
●폭음문화 경고한 연암 박지원
술집에 대해 실학자 등 당대 사상가들은 날카로운 비평을 했다.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술집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흥미롭다. 박지원은 1780년 7월10일 중국 성경(盛京)에 도착하여 그곳의 주루(酒樓)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중국 술집의 큰 규모와 화려함과 운치에 충격을 받는다. 문득 서울의 술집이 생각난다. 그는 서울의 술집을 이렇게 쓴다.
“우리나라 사람이 술 마시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독하고, 이른바 술집이란 것은 모두 항아리 입 같은 창에 새끼줄로 만든 문지도리가 있다. 길 왼편의 작은 각문(角門)에 새끼줄 발을 드리우고, 쳇바퀴로 등롱(燈籠)을 만든 것은 틀림없는 술집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흔히 말하는 푸른 깃발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술집 등마루에 꽂힌 깃발 장대를 도무지 본 적이 없다.”
조선의 술집은 항아리 입구처럼 생긴 들창에 새끼로 지도리를 만든 문이 있고, 길 옆 작은 각문에 새끼로 발을 늘이고 쳇바퀴로 등롱을 만들어 달아 술집임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영조 말년 실록에 나왔던 주등이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술집의 깃발은 시의 관습적 표현이지 실제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화려하고 거창하고 청결한 술집을 본 연암에게 조선의 술집이란 것이 눈에 찰 리가 없었던 것 같다. 중국의 명사와 벼슬아치들은 기생집과 술집에 출입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중국의 술집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퇴근길에 들르는 곳이요, 명사들이 몰려들어 술 취한 김에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다. 조선의 술집 문화는 어떠했을까.
“술 마시는 양만은 너무나 커서 큰 사발에 철철 따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들이켠다. 이는 무작정 술을 쏟아 붓는 것이지 마시는 것이 아니고, 배를 불리려는 것이지 흥취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래서 마셨다 하면 취하고, 취했다 하면 술 주정이고, 술 주정을 했다 하면 싸움질이고, 싸움을 벌였다 하면 술집의 술항아리며 술잔을 죄다 걷어차 깨어버린다. 이른바 풍류를 즐기는 문아(文雅)한 모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런 풍류와 문아한 술자리는 되레 술 배를 불리는 데 무익하다고 비웃는다. 이런 술집(골동품과 화초로 장식된 중국 술집)을 우리나라에 옮겨온다 해도, 하루 저녁을 못 넘기고 그 골동품은 부서지고 화초는 꺾이고 밟힐 것이니 이것이 가장 애석한 일이리라.”
연암의 시각에선 술집에서 고상한 풍치는커녕 술을 뱃속에 쏟아 붓고, 주정을 하고 싸움을 벌이고 급기야 술집을 마구 부수는 것이 조선 말 술집의 풍경이었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가들이 언제나 현실을 어둡게 묘사하듯, 열렬한 개혁주의자 박지원은 역시 화려 무비한 중국을 보았기 때문인지 조선의 것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금속화폐 발달로 술집 번창
한편으로는 17세기 말에 이미 조선의 대표적 지성인이 국민들의 ‘폭음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이 관심을 끌기도 한다. 요즘 한국사회에도 ‘폭탄주 문화’가 만연해 있는 것과 관련지어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17세기 말에도 폭음은 문화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200년이 지났어도 한국인의 폭음 습성이 별반 달라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을 주는 대목이다.
숙종조에 모습을 보인 시정의 술집은 영조 치세의 혹독한 금주령에 의해 일시 위축되다가 18세기 후반 정조 때에 와서 번성하게 된다. 술집 문화가 발달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발전에 있을 것이다. 자급자족 경제 체제에서는 주점의 호황을 기대할 수 없다. 또 술을 사서 마신다는 것은 금속화폐의 발달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18세기는 조선시대 경제적 융성기였다. 화폐가 본격적으로 사용됐고 대동법과 균역법의 전면적인 시행으로 도시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농업 분야에서도 기술적 진보로 인한 잉여 생산물이 생겨났다.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일부 계층에 생활의 여유를 가져오게 했고 급기야 시정의 술집타운까지 출현케 했던 것이다.
3.결론
이로서 내가 생각했던 전통술로 부터시작해서 조선시대의 술의 문화와 금주령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자세히는 아니지만 간략히나마 알아보았다. 이처럼 긴 역사를 가진 우리의 술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풍습과 이와 함께 사라져간 우리의 문화들이 아깝고 아쉬웠으며 옛 것을 완전히 살려 내는건 무리겠지만 그걸 조금이라도 복원해보려는 노력은 필요할거 같다는걸 느꼈다. 더 나아가서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알기위서 전통 즉 우리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되도록 주관적이지 않도록 또 객관성을 띄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지만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조사하고 레포트를 쓰는 동안 우리 것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고문헌
대한주류공업협회홈페이지 (http://www.kalia.or.kr/drink)
동아일보 매거진 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04/28/200304280500025/200304280500025_1.html)
산사원 홈페이지 (http://www.sansawon.co.kr)
진로홈페이지(http://www.jinr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