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30년 전쟁과 웨스트팔렌 조약
<목 차>
Ⅰ. 서론
Ⅱ. 30년 전쟁
1. 종교전쟁
2. 30년 전쟁의 원인
3. 30년 전쟁의 과정
Ⅲ. 웨스트팔렌조약
Ⅳ. 결론
<목 차>
Ⅰ. 서론
Ⅱ. 30년 전쟁
1. 종교전쟁
2. 30년 전쟁의 원인
3. 30년 전쟁의 과정
Ⅲ. 웨스트팔렌조약
Ⅳ. 결론
본문내용
의운동이었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신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독일황제 루돌프 2세는 1609년 이곳 루터파의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구교도와 같은 권리를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1617년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완고한 카톨릭주의자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사정은 급변, 루돌프 2세가 제후(諸侯)·기사(騎士)·도시 등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서(1609)를 파기하고 신교도를 탄압하고 구교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되자 프라하의 신교파 귀족 대표가 시민 1천명을 무장시켜 1618년 5월 23일 아침 왕성으로 몰려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귀족 대표는 2명의 국왕 고문과 서기 1명을 상대로 부당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였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난 대표들은 이들 세 사람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이들은 중상을 입었으나, 시민 군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을 피해서 달아났다.
서전(緖戰)을 화려하게 장식한 뵈멘의 신교도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국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까지 진격하여 기세를 올렸다. 한편 1619년 황제가 죽고 그 뒤를 프리드리히 2세가 잇게 되자, 뵈멘의 의회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5세에게는 칼뱅파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에 독일 신교측에서는 루터파가 이탈하였고, 그의 장인에 해당하는 영국왕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오히려 스페인과 같은 황실인 독일 황제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태도를 바꾸어 독일의 신교도 반란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변하자,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5만의 황제군은 1620년 11월, 뵈멘에 침입, 프라하 근방에서 프리드리히 5세의 3만 군대를 격파하고, 프라하를 점령하였으며 프리드리히 5세는 외국으로 망명하여 전쟁은 구교측의 승리로 첫 막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더욱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신교도를 탄압하여, 반란의 지도자들은 잡히는 데로 처형되었으며, 처형된 자와 망명자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하였고, 처형을 면한 자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뵈멘 영토의 3/4이 주인이 바뀌었고, 프라하 대학은 예수회교단으로 이관되었다. 또 하나 신교의 거점이자, 뵈멘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 팔츠에 침입해서 여기에도 구교를 강요하게 되었고, 신교 연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서막은 구교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외국 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독일은 카톨릭의 땅으로 완전히 되돌아 갔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도 이루어져 다음 단계인 절대왕정에 합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의 신교 연합이 완전한 패배에 이르자 이번에는 신교측의 여러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내전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찰스 왕자의 결혼을 주선했다가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절 당한 국왕 제임스 1세가 평소에도 감정이 좋지 못했던 합스부르크가(家)에 반감을 가지고 신교파 국가들의 동맹을 계획하고 군사비의 제공을 약속하고 전쟁을 부추겼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30년 전쟁의 제 2 라운드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덴마크왕국,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1588∼1648)는, 그가 독일의 홀슈타인의 영주라는 구실을 붙여서,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그리스도교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황제군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 Wenzel von Wallenstein / 1583. 9 ~1634. 2)과 틸리에게 패배하고, 양측은 뤼벡 조약으로 화해하였는데(1629), 덴마크왕은 홀시타인을 계속 영유하되 독일의 내전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이렇게 덴마크와 화약(和約)을 맺자 오래간만에 황제의 위광(威光)이 살아났다. 이 기회를 놓지지 않기 위해 다른 제후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복구령(復舊令)을 발표하였다. 이 복구령은 \"구교파의 제후들은 각자의 영내에서 신교도를 추방해도 좋다. 또 신교도의 손에 들어가 있던 교회령은 구교측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로서, 아우크스부르크화약 이전의 상태도 환원함을 의미한다. 복구령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각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루터파의 제후들은 큰 타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하였고, 칼뱅파가 탄압 당하는 것도 못마땅 하게 생각 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의 복구령이 단순한 카톨릭에 의한 제국의 재건(再建)이 아니고, 황제를 정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거(割據)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지키려는 구교파 제후들까지 황제의 계획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때 페르디난트 2세의 뜻대로 통일이 이루어 졌다면 독일은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절대왕정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까스로 잡을 번 했던 통일의 기회는 이번에도 제후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후들은 황제의 이런 생각 배후에는 발렌슈타인과 그의 군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면직(免職)을 요구했다. 이런 제후들의 요구를 황제가 순순히 받아들여 그는 면직되어 프라하로 돌아갔다. 이렇게 황제군을 승리로 이끈 발렌슈타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뵈멘의 신교파 하급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일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그의 재산과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고국 보헤미아로 달려가 그곳에서 몰수된 토지 등을 구입하여 다시 큰 돈을 모았으며, 덴마크왕의 침입이 있자, 용병을 구할 자금이 없는 황실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황제에게 \"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면 제 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치루
이곳에는 일찍부터 신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독일황제 루돌프 2세는 1609년 이곳 루터파의 신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구교도와 같은 권리를 갖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1617년 예수회의 교육을 받은 완고한 카톨릭주의자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사정은 급변, 루돌프 2세가 제후(諸侯)·기사(騎士)·도시 등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서(1609)를 파기하고 신교도를 탄압하고 구교로 회귀하였다. 이렇게 되자 프라하의 신교파 귀족 대표가 시민 1천명을 무장시켜 1618년 5월 23일 아침 왕성으로 몰려갔다. 성안으로 들어간 귀족 대표는 2명의 국왕 고문과 서기 1명을 상대로 부당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였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난 대표들은 이들 세 사람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2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이들은 중상을 입었으나, 시민 군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을 피해서 달아났다.
서전(緖戰)을 화려하게 장식한 뵈멘의 신교도들은 혁명정부를 조직하고, 국왕의 군대를 격파하고 합스부르크가의 본거지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에까지 진격하여 기세를 올렸다. 한편 1619년 황제가 죽고 그 뒤를 프리드리히 2세가 잇게 되자, 뵈멘의 의회에서는 페르디난트 2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발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5세에게는 칼뱅파라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에 독일 신교측에서는 루터파가 이탈하였고, 그의 장인에 해당하는 영국왕 제임스 1세는 스페인과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 오히려 스페인과 같은 황실인 독일 황제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태도를 바꾸어 독일의 신교도 반란을 방관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게 변하자, 페르디난트 2세가 보낸 5만의 황제군은 1620년 11월, 뵈멘에 침입, 프라하 근방에서 프리드리히 5세의 3만 군대를 격파하고, 프라하를 점령하였으며 프리드리히 5세는 외국으로 망명하여 전쟁은 구교측의 승리로 첫 막을 내렸다. 페르디난트 2세는 더욱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철저하게 신교도를 탄압하여, 반란의 지도자들은 잡히는 데로 처형되었으며, 처형된 자와 망명자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하였고, 처형을 면한 자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뵈멘 영토의 3/4이 주인이 바뀌었고, 프라하 대학은 예수회교단으로 이관되었다. 또 하나 신교의 거점이자, 뵈멘의 왕으로 추대되었던 프리드리히 5세의 영지 팔츠에 침입해서 여기에도 구교를 강요하게 되었고, 신교 연합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서막은 구교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고, 외국 세력의 개입이 없었다면 독일은 카톨릭의 땅으로 완전히 되돌아 갔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에 의한 중앙집권도 이루어져 다음 단계인 절대왕정에 합류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의 신교 연합이 완전한 패배에 이르자 이번에는 신교측의 여러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내전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은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페인, 프랑스 등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영국은 찰스 왕자의 결혼을 주선했다가 스페인 왕실로부터 거절 당한 국왕 제임스 1세가 평소에도 감정이 좋지 못했던 합스부르크가(家)에 반감을 가지고 신교파 국가들의 동맹을 계획하고 군사비의 제공을 약속하고 전쟁을 부추겼으나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30년 전쟁의 제 2 라운드에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덴마크왕국, 진작부터 독일에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1588∼1648)는, 그가 독일의 홀슈타인의 영주라는 구실을 붙여서, 영국 및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1625년 그리스도교군의 총수로서 독일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황제군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Albrecht Eusebius Wenzel von Wallenstein / 1583. 9 ~1634. 2)과 틸리에게 패배하고, 양측은 뤼벡 조약으로 화해하였는데(1629), 덴마크왕은 홀시타인을 계속 영유하되 독일의 내전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이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땠다.
이렇게 덴마크와 화약(和約)을 맺자 오래간만에 황제의 위광(威光)이 살아났다. 이 기회를 놓지지 않기 위해 다른 제후들과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복구령(復舊令)을 발표하였다. 이 복구령은 \"구교파의 제후들은 각자의 영내에서 신교도를 추방해도 좋다. 또 신교도의 손에 들어가 있던 교회령은 구교측에 반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지로서, 아우크스부르크화약 이전의 상태도 환원함을 의미한다. 복구령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각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루터파의 제후들은 큰 타격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반대하였고, 칼뱅파가 탄압 당하는 것도 못마땅 하게 생각 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2세의 복구령이 단순한 카톨릭에 의한 제국의 재건(再建)이 아니고, 황제를 정점으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할거(割據)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지키려는 구교파 제후들까지 황제의 계획에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만약 이때 페르디난트 2세의 뜻대로 통일이 이루어 졌다면 독일은 오랜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절대왕정에 합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보헤미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가까스로 잡을 번 했던 통일의 기회는 이번에도 제후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제후들은 황제의 이런 생각 배후에는 발렌슈타인과 그의 군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면직(免職)을 요구했다. 이런 제후들의 요구를 황제가 순순히 받아들여 그는 면직되어 프라하로 돌아갔다. 이렇게 황제군을 승리로 이끈 발렌슈타인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뵈멘의 신교파 하급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합스부르크가(家)에서 일하면서 구교로 개종하였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하여 그의 재산과 고리대금업으로 큰 돈을 모았다.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고국 보헤미아로 달려가 그곳에서 몰수된 토지 등을 구입하여 다시 큰 돈을 모았으며, 덴마크왕의 침입이 있자, 용병을 구할 자금이 없는 황실의 약점을 간파한 그는 황제에게 \"저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주면 제 돈으로 용병을 사서 전쟁을 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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