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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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30년전쟁과 베스트팔렌조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종교전쟁의 의미
2. 독일의 상황
3. 30년 전쟁의 원인
4. 30년 전쟁의 과정
5. 30년 전쟁의 종결 - 베스트팔렌 조약
6. 30년 전쟁의 영향

Ⅲ 결론

※ 참고

본문내용

마음은 이미 황제에 대해 적대적으로 돌아 섰으면서도 구스타프 아돌프에 합세할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방안으로 구스타프 아돌프는 1631년 5월 11일 작전계획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은 해체된 개신교 연합(Union)을 결성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군사적인 면에서도 보다 효과적인 기반 위에 재정립하여 스웨덴 왕이 그 지도적 역할을 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으로 스웨덴의 참전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영방들이 스웨덴에 결속되었으며, 틸리의 카톨릭군이 1631년 3월 개신교 진영에 속한 자유시를 함락시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브란덴부르그 및 작센이 비로소 구스타프 아돌프를 돕기 시작하였으며 1631년 9월 개신교 연합에 참여하게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두 영주국의 지원을 받아서 1631년 9월 17일 브라이텐펠드 전투에서 틸리 휘하의 카톨릭군을 격파 하고 독일 북부지방으로부터 카톨릭군을 축출함으로써 황제의 회복령이 실시되지 못하게 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종래와는 다른 정예부대를 전선에 비치했다. 그부대는 일종의 징병으로 모집된 병사로 편성되었으며, 더구나 특수한 장비와 철저한 훈련, 그리고 공통된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된 국민 군이었다. 국민군은 찬송가를 부르며 행군하고 규율을 지키고 잘 싸웠다. 그들은 그야말로 밀물처럼 공격해 들어갔으며, 그 앞에는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다. 이 군대는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이례적인 존재였다. 왜냐하면 양군의 주력을 이루던 용병에게는 만족할 만한 급료도 지불되지 못했기 때문에 병사는 멋대로 약탈을 자행하여 피 점령지의 황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스웨덴 군은 약탈을 삼가고 그 엄격한 규율로 점령지의 공감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술은 화기의 파괴력과 적에게 후퇴 및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신속한 전투를 계속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며, 매우 획기적인 전술이 전개되었고, 싸움터에서는 항상 적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아돌프의 군대는 황제군 틸리를 무찌르고 라인 강에서 다뉴브강에 이르는 카톨릭 지역을 통과하여 마인쯔를 공략하고 계속 전진하여 바이에른에서 마침내 비인에 이르게 되었고 불과 2년이 되지 않아 아돌프는 전쟁을 개신교 측에 유리하게 이끌었다. 한편 황제가 그전에 면직하였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에게 사자를 보내어 참여를 부탁하자 발렌슈타인은 이를 수락하고, 다시 황제군의 전권을 장악하여 진군을 개시한 것이다. 황제 측 진영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고 아돌프 쪽에 기울었던 균형은 다시 황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남 독일을 누른 발렌슈타인은 아돌프와 뉘른베르크에서 대전했다. 병력은 압도적으로 황제군이 우세했고 거기다가 그렇게도 정예를 자랑하던 아돌프군도 이무렵에는 군기의 쇠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뒤에 가담한 독일 용병들이 아돌프를 괴롭힌 것이다. 아돌프는 발렌슈타인에게 화친을 타진하였다. 발렌슈타인은 결전을 피하고 작센으로 향했다. 작센은 개신교 측의 중요한 거점이다. 아돌프도 뒤를 쫓아 구원에 나서 1632년 11월 16일 두 장군은 라이프치히의 서남쪽에 있는 뤼첸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양쪽 군대는 서로 비슷한 병력으로 대치하여 맹렬히 싸웠다. 아돌프는 말을 타고 안개 속으로 돌진하였다. 그가 도중에서 말머리를 돌릴 때 왕을 따르는 자는 겨우 기병 몇 명뿐, 스웨덴군이 길을 터 주는 것을 보던 적군병사가 쓴 탄환이 아돌프의 왼편 팔에 맞았고, 물러가는 도중 제2탄을 등에 맞아 사자왕 구스타프 아돌프는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였다. 국왕이 전사한 뉴스는 스웨덴군을 분발하게 하였고 사투는 계속되었다. 밤의 장막이 내릴 무렵 나팔이 울려 전투가 끝난 것을 알렸다. 결국 싸움은 스웨덴에게 유리하여하였으며, 발렌슈타인은 라이프치히로 물러갔다. 구스타프 아돌프가 죽은 후로는 젊은 왕녀 크리스티나가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 스웨덴 군은 발트해를 향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편으로 루터파 제후의 관심은 싸움보다 오히려 화평 교섭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과도 헛되이 되고 만 것이었다.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은 뤼첸에서 패하자 황제의 뜻을 거역하여 스웨덴 및 작센과 멋대로 화평 교섭을 시작했다. 의혹의 눈으로 그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던 황제는 즉각 그를 파면한 뒤 이어 자객을 보내서 암살케 했다. 1634년 2월 25일 이었다. 1634년 황제의 군대는 황제의 아들이며 헝가리 왕인 페르디난드 3세에 의해 재편성되고 지휘되었다. 이렇게 황제군이 급격히 증대되어 가는 상황에서 호른과 베른하르드가 지휘하던 취쥔하여진 스웨덴군이 뇌르들링엔에서 1634년 9월 6일 황제군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황제군이 승리하고 작센선거후와 프라하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속에는 외국의 침략에 대하여 황제가 방위하여 주는 것이 있었다. 외국이라 하면 스웨덴이 첫 번째이며, 또 하나 30년 전쟁의 발발이래 끊임없이 신교 측에 원조를 보낸 흑막적인 존재인 프랑스를 겨냥한 것이다. 이에 마지막 4기인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였다.
4) 제 4기 - 프랑스 시기 (1635-1648)
카톨릭 국가이던 프랑스가 개신교 측을 원조한다고 하는 모순이 야말로 종교가 이미 정치의 도구가 돼버린 사실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당시의 프랑스는 재상인 리슐리외의 지도아래 바깥을 향해서 간섭할 만한 여력이 생겨 있었다. 1635년 5월 30일에 황제와 작센선거후 사이에 체결된 프라그 평화조약은 30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조약으로 전쟁의 종교적 성격이 약하여졌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더 이상 카톨릭들을 배타적으로 적대시하고 않았고 제국정부 역시 이제부터는 극단적인 카톨릭 정책을 쓰지 않았다. 독일 루터파들과 평화를 체결한 것은 황제가 스페인을 도와 프랑스와 대적하기 위함이었고, 스페인의 올리바레스의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프랑스는 이러한 프라그조약이 선포되기 직전인 1635년 5월 19일 스페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는 스페인 군이 3월 26일 프랑스의 동맹인 트리에르 대주교령을 정복하고 선제후를 체포하였기 때문이었다. 1635년 리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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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26
  • 저작시기2007.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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