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예술사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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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약용의 예술사상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분의 사람들은 그를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1표2서의 저자 로서만 생각하기 일쑤인 것 같다.
필자 또한 국사 시간에 배웠던 지식을 더듬어 다산 정약용을 위의 한 문장으로만 요약하여 기억해두고 있었다. 그러나 가을 학기 동안 수강한 강의를 통해, 그의 시, 서문, 회화 적인 기량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의 문화적 감각과 사상에 대하여 조사하여 보고자 한다. 나아가 조선 후기의 그러한 문화적 흐름과 서양의 르네상스기 문화적 흐름과는 어떻한 차이가 있는지, 공통점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림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의 사상과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초월적 의미를 지닌다. 그런 한편으로는 각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드러낼 수 있고 다르게 그려질 수 있다는 특징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시기, 서양과 동양의 중요 역사적 시점이였던 르네상스기이자 조선 후기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흥미로울 것 같다.
본론
I. 다산의 예술사상
정약용은 당시의 누구보다도 진보적인 사실주의 예술 사상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의 그림으로 실현해 내지는 못하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사실적이기 보다는 18-19세기에 유행하던 남종문인화의 형식을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이 안고 있는 시대적 제약과 계급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그가 생존했던 조선 후기는 화단이 활성화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회화사상 가장 두드러진 업적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영정조 이후 회화는 청나라로부터 남종화풍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비롯해서 사실주의적 회화가 발전하는 등 조선적인 화풍이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정선심사정이인상강세황김홍도이인문 등 그 어느 때보다 유수한 대가들이 배출되었다. 이러한 18세기의 회화는 19세기로 이어졌는데, 1850년 경 이후로는 김정희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문기를 강조하는 남종문인화풍이 우세하게 되었다. 정약용이 활동한 시기(정조 말년, 순조 연간)는 18세기의 회화가 한창 무르익을 때로부터 김정희의 영향력이 만연한 말기까지의 중간에 놓인 변환기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화단에 유행한 남종화풍이 사의(寫意)와 문기(文氣)를 강조하였던 것은 직업화가인 화원의 그림과 차별화 하려는 사대부 층의 신분적 자리 매김과 관련된다. 남종화론 자체가 중국의 명나라 후기 봉건적 신분질서 동요기에 사대부 층이 사회 정치적 기득권을 고수하려던 경향과 함께 시작되었으므로, 지배문화의 보수 성향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조선시대의 선비사회에서 서화는 시문학과 함께 인격도야의 교양덕목이었고, 한편소일거리로 생각되었다. 정약용도 시서화를 즐겼으나 항상 학문에 방해됨을 염려하곤 했다. 그럼에도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강진의 유배생활(1801~1818)에서 쌓인 심회를 달래기 위해서는 필묵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많은 시를 지은 것을 보아도 그러하고, 남아 있는 몇 점의 그림도 대부분 그때 제작된 것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사대부적 삶을 솔직히 반영한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1. 다산정약용의 회화론
정약용의 저술 중에는 예술론이나 화평을 피력한 저술이 없다. 다만 \'여유당전서\'에 나타난 서화에 대한 시와 산문을 통해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남달리 서화에 관심이 컸기에 그에 관한 시문을 여러편 남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관은 정확한 관찰과 묘사에 의한 형상 표현의 사실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산학 제 6호에 실린 논문 이태호, <조선후기에 ‘카메라 옵스큐라’로 초상화를 그렸다>, 다산학 6호(2005), pp105~134
을 보면, 정약용의 칠실관화설에서 정약용의 회화에 관한 생각을 읽는다. 즉 화가의 묘사기량이 카메라 옵스큐라의 영상수준이면 좋겠다는 주장이였다. 일종의 광학실험 보고서인 \'칠실관화설\'은 정약용의 과학정신을 보여 주기도 하며, 대상 묘사의 사실성을 더욱 강조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정약용은 이기양이 \'칠실파려안\' 즉 \'카메라 옵스큐라\' 로 초상화를 그렸던 장면을 묘지명에 밝혀 놓았다고 한다.
그만큼 다산 정약용은 사실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정약용의 예술론은 시문학에서 보이는 현실비판적 시각과 더불어 사실주의적 사관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정약용은 당대 화단에서 \'화의불화형(畵意不畵形)\'을 내세운 남종화풍 중국회화를 명대의 동기창과 막시룡 등이 당대 선종의 남북 분파에 따라 구분지은 데서 생긴 명칭. 대체로 학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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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8.03.11
  • 저작시기2007.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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