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전통극과 희곡
2. 전통극의 기원
3. 삼국시대 전통극
-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4. 고려, 조선 시대 전통극
- (1) 고려시대의 전통극, (2) 조선시대 전통극, (3) 탈춤극, (4) 인형극
5. 근대 희곡론
*** 참고문헌
2. 전통극의 기원
3. 삼국시대 전통극
- (1) 고구려, (2) 백제, (3) 신라
4. 고려, 조선 시대 전통극
- (1) 고려시대의 전통극, (2) 조선시대 전통극, (3) 탈춤극, (4) 인형극
5. 근대 희곡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능성이 높다. 이것이 가면 무언극으로 7~8세기 무렵의 기악가면이 200여개나 일본에 현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의 기악은 익살스러운 춤과 몸짓으로 연출하는 10과정으로 된 재담 없이 발림으로만 엮는 탈놀이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이 역시 우리나라에 전승되는 산대놀이와 같은 계통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경우는 발림 굿인 기악에서 대사극으로 신앙성을 띤 놀이에서 세속적인 놀이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여러 정황에 의거하여 탈춤은 마을 굿과 관련된 민간 전승에서 하층의 민속극으로 자라났으며 거기에 기악이나 다른 불교의 놀이들이 2차적으로 첨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신라
신라의 기록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많이 남아있다. 유리왕 때에는 한가위를 맞아 가무백희를 했고 진흥왕 때에는 팔관회를 열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든 온갖 놀이를 벌이면서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면서 화해와 단합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신라에서는 하층민 뿐 아니라 상층 계급에서도 광대가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헌강왕은 신라 초기 이후 민간으로만 전승되는 수호신 굿을 다시 국가적 행사로 부활시켰는데, 처용무와 같은 것이 한 종류이다. 처용무는 신라의 대표적 연극이다. <삼국유사>권2의 기록은 신라인의 민속행사에 관한 주변 정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처용은 신격의 가면을 쓴 사람이 역신의 가면을 쓴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었는데 뒤에 역신을 물리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로 성격이 바뀌면서 굿으로의 효과보다는 연극적인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처용가>의 주술적 성격과 함께 <처용무>의 종교적 제의성을 나타내는데 절대 권위의 신에 일방적으로 의탁한 채 주술적 효과만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춤과 노래, 그리고 가면 등과 같은 예술적 장치를 통한 적극적인 기원을 형상화 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내듸 처용연희가 있기 이전의 신라의 처용은 이미 굿과 관련된 연극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조의 기록에는 처용 무신의 이야기에 이어 남산신, 북악신, 지신 등 여러 토착신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다. 처용 전승과 관련된 연극은 탈을 쓴 사람들이 굿에 참석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함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성격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처용무에 관한 이러한 접근은 신라 시대의 연극이 상대의 국중 대화 등이 지녔던 제의성보다는 놀이성이 강화된 형태였다는 의미에서 다음 시대 탈춤극으로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신라에는 원효가 박을 가지고 춤추며 놀았다는 <무애무>가 있다. <무애무>의 전통이 서역으로부터 전해져온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무애무>는 종교적 의미와 교화성을 담고 사찰 행사나 궁중 정재에 편입되어 연행되었다. 그리고 기원문헌상으로 뚜렷이 나타나는 한국 가면극의 기원은 신라 때가 된다. 통일 신라시대 말엽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지은 한시 한약잡영 5수가 삼국사기 권 32<악지>에 수록되었는데 이 중 월전, 대면, 속독, 산예는 가면을 사용한 놀음이다. ‘향악’이라는 호칭은 당악에 대하여 우리나라 음악을 지칭한다고 보인다. 이는 금환, 대면, 산예는 당악에도 그 이름을 보이기 때문이다. <향악잡영> 다섯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금환’은 공을 공중에 던지면서 노는 곡예이고 ‘월전’은 기이한 모습의 광대들이 선비를 풍자하는 서역의 배우놀이다. 또 ‘대면’은 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는 춤이고, ‘속독’은 광대가 춤을 추는 서역우이고 ‘산예’는 서역에서 전해온 사자춤이다. 특히 월전에서는 광대의 모습이 치올라간 어깨에 목은 들어가고 머리 위 상투는 뾰족이 나왔다하여 선비를 풍자하는 희극적 상황을 제시하는 장면도 있다. 이로보면 오기는 자생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가 상호 영향 아래 융합되던 시대의 산물이고 이는 후기 민속극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대면 1수를 옮겨보면 “황금탈 쓴 그 사람이 구슬채찍을 휘두르며 귀신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 있게 춤추니 마치 태평성세에 붉은 봉황새의 춤 같구나”라 하여 가면무를 간결하면서도 극명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오수는 최치원이 ‘향악’ 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이미 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 가면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되는 셈이다.
4. 고려, 조선의 전통극
(1) 고려시대의 전통극
통일신라와 조선을 이어 준 고려는 북방민족의 잦은 침탈을 받으면서도 독창적 문화를 성장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신라 때부터 무속신앙이 기반이 되어 서민 놀이와 외래종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발전하게 된 산대잡극은 고려시대에는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연희되었다. 여기에는 처용무. 곡예, 불꽃놀이 등 다양한 잡희와 함께 산대놀이가 펼쳐졌던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잇다. 나희는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구나 의식에 불과했던 굿이었으나 나중에 창우 또는 광대 심지어는 무격들의 놀이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놀이는 국가에서 관장하였으며, 이 때에는 ‘오방귀무’와 같은 제사 춤을 비롯하여 곡예, 탈놀이. 답교, 처용무, 박무수 등을 펼쳤다. 이 가운데 곡예와 답교 외에는 모두 탈놀이로 간주된다.
(2) 조선시대 전통극
신라시대 처용무를 제와하고 우리나라에는 상류층연극이 없었다. 따라서 연극은 그 담당계층이 서민이었듯이 관객층도 서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이 고급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민간연희로서 놀아져왔고 명칭도 민속극으로 붙여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민속전통극의 종류는 그 놀이 양식에 따라 탈춤(가면극). 꼭두각시놀음(인형극), 그림자극(영회극), 판소리 4종류로 분류된다. 이상 4종류의 민속극이 개화기까지 흘러 내려오다가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일본과 서양문화에 밀려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고려조에서와 같은 규모는 아니더라도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서서히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산대잡극과 나례 쪽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산대나
(3) 신라
신라의 기록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많이 남아있다. 유리왕 때에는 한가위를 맞아 가무백희를 했고 진흥왕 때에는 팔관회를 열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든 온갖 놀이를 벌이면서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면서 화해와 단합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신라에서는 하층민 뿐 아니라 상층 계급에서도 광대가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헌강왕은 신라 초기 이후 민간으로만 전승되는 수호신 굿을 다시 국가적 행사로 부활시켰는데, 처용무와 같은 것이 한 종류이다. 처용무는 신라의 대표적 연극이다. <삼국유사>권2의 기록은 신라인의 민속행사에 관한 주변 정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처용은 신격의 가면을 쓴 사람이 역신의 가면을 쓴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었는데 뒤에 역신을 물리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로 성격이 바뀌면서 굿으로의 효과보다는 연극적인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처용가>의 주술적 성격과 함께 <처용무>의 종교적 제의성을 나타내는데 절대 권위의 신에 일방적으로 의탁한 채 주술적 효과만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춤과 노래, 그리고 가면 등과 같은 예술적 장치를 통한 적극적인 기원을 형상화 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내듸 처용연희가 있기 이전의 신라의 처용은 이미 굿과 관련된 연극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조의 기록에는 처용 무신의 이야기에 이어 남산신, 북악신, 지신 등 여러 토착신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다. 처용 전승과 관련된 연극은 탈을 쓴 사람들이 굿에 참석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함께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성격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처용무에 관한 이러한 접근은 신라 시대의 연극이 상대의 국중 대화 등이 지녔던 제의성보다는 놀이성이 강화된 형태였다는 의미에서 다음 시대 탈춤극으로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신라에는 원효가 박을 가지고 춤추며 놀았다는 <무애무>가 있다. <무애무>의 전통이 서역으로부터 전해져온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무애무>는 종교적 의미와 교화성을 담고 사찰 행사나 궁중 정재에 편입되어 연행되었다. 그리고 기원문헌상으로 뚜렷이 나타나는 한국 가면극의 기원은 신라 때가 된다. 통일 신라시대 말엽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이 지은 한시 한약잡영 5수가 삼국사기 권 32<악지>에 수록되었는데 이 중 월전, 대면, 속독, 산예는 가면을 사용한 놀음이다. ‘향악’이라는 호칭은 당악에 대하여 우리나라 음악을 지칭한다고 보인다. 이는 금환, 대면, 산예는 당악에도 그 이름을 보이기 때문이다. <향악잡영> 다섯수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금환’은 공을 공중에 던지면서 노는 곡예이고 ‘월전’은 기이한 모습의 광대들이 선비를 풍자하는 서역의 배우놀이다. 또 ‘대면’은 가면을 쓰고 귀신을 쫓는 춤이고, ‘속독’은 광대가 춤을 추는 서역우이고 ‘산예’는 서역에서 전해온 사자춤이다. 특히 월전에서는 광대의 모습이 치올라간 어깨에 목은 들어가고 머리 위 상투는 뾰족이 나왔다하여 선비를 풍자하는 희극적 상황을 제시하는 장면도 있다. 이로보면 오기는 자생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가 상호 영향 아래 융합되던 시대의 산물이고 이는 후기 민속극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대면 1수를 옮겨보면 “황금탈 쓴 그 사람이 구슬채찍을 휘두르며 귀신 부리네, 빠른 걸음 조용한 모습으로 운치 있게 춤추니 마치 태평성세에 붉은 봉황새의 춤 같구나”라 하여 가면무를 간결하면서도 극명하게 묘사하였다. 이러한 오수는 최치원이 ‘향악’ 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이미 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 가면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되는 셈이다.
4. 고려, 조선의 전통극
(1) 고려시대의 전통극
통일신라와 조선을 이어 준 고려는 북방민족의 잦은 침탈을 받으면서도 독창적 문화를 성장시키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신라 때부터 무속신앙이 기반이 되어 서민 놀이와 외래종교인 불교의 영향으로 발전하게 된 산대잡극은 고려시대에는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연희되었다. 여기에는 처용무. 곡예, 불꽃놀이 등 다양한 잡희와 함께 산대놀이가 펼쳐졌던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잇다. 나희는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으로 처음에는 단순히 구나 의식에 불과했던 굿이었으나 나중에 창우 또는 광대 심지어는 무격들의 놀이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놀이는 국가에서 관장하였으며, 이 때에는 ‘오방귀무’와 같은 제사 춤을 비롯하여 곡예, 탈놀이. 답교, 처용무, 박무수 등을 펼쳤다. 이 가운데 곡예와 답교 외에는 모두 탈놀이로 간주된다.
(2) 조선시대 전통극
신라시대 처용무를 제와하고 우리나라에는 상류층연극이 없었다. 따라서 연극은 그 담당계층이 서민이었듯이 관객층도 서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이 고급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민간연희로서 놀아져왔고 명칭도 민속극으로 붙여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민속전통극의 종류는 그 놀이 양식에 따라 탈춤(가면극). 꼭두각시놀음(인형극), 그림자극(영회극), 판소리 4종류로 분류된다. 이상 4종류의 민속극이 개화기까지 흘러 내려오다가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일본과 서양문화에 밀려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고려조에서와 같은 규모는 아니더라도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서서히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산대잡극과 나례 쪽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산대나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