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기들대로 이해한 바를 적어 놓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기지 사실은 \'역사적 예수\'였다. 교수들이나 책을 통해 예수님은 처녀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음이 거의 분명하다는 것과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과, 세상의 죄를 위해 죽는 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죽었다는 것 등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기독교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보그는 이런 틈새에서 신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30대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보는 유신론적 신관을 가지고서는 이 세상에 창궐한 재난이나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도저히 이런 신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초월도 내제도
최근에 와서는 많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초자연주의적 유신론도 아니고 내제주의적 범신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신론도 아닌, 제3 혹은 제4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은 우리와 하나님, 혹은 세상과 하나님을 분간한다. 분간은 하지만 물론 유신론처럼 하나님과 우리, 혹은 하나님과 세상이 동떨어진 개별적 존재로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신은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를 합한 것이 신이 아니다. 신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볼까?
처참한 식민지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신음하던 자기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하는 예수를 그 당시 영적 상태와 지적 능력과 심리적 필요와 실제적 문제와 정치적 여건과 사회적 환경들에 따라 예수상을 근간으로 해서 발전해 왔다.
예)조선시대 한반도에 예수님이 혹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과 의미를 심어준 분이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그는 도사라든가, 미륵불이라든가, 정도령이라든가, 무슨 보살이라든가, 후천개벽을 위한 한울님의 사신, 또는 천지공사를 위한 상제등으로 개념을 추리할 수 있다.
즉 4세기에 나온 기독론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의 관계에서 생겨났으며 로고스 사상이나 부활, 구원관은 희랍의 밀의 종교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오랜 기간을 두고 대화나 변증법적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맥락에서 예수를 조명하고 이해해야 한다.
성불(成佛)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영적 체험을 하셨다. 즉 성령의 체험을 함을 말한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시험을 받으실 때도 영적 체험을 하셨다. 그것은 ‘성령에 이끌리어’간 것이라고 했다. 눅4:18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라는 표현으로 변화산의 체험을 한다. 이런 수많은 성경의 기록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영적 체험을 하였는데 이게 부처의 성불 체험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불이란 “깨침을 이룸”이란 뜻이다. 월남 출신 틱
또한 예수님과 기독교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보그는 이런 틈새에서 신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30대로 접어든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보는 유신론적 신관을 가지고서는 이 세상에 창궐한 재난이나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도저히 이런 신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초월도 내제도
최근에 와서는 많은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초자연주의적 유신론도 아니고 내제주의적 범신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신론도 아닌, 제3 혹은 제4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론\'이라고 한다. 범재신론은 우리와 하나님, 혹은 세상과 하나님을 분간한다. 분간은 하지만 물론 유신론처럼 하나님과 우리, 혹은 하나님과 세상이 동떨어진 개별적 존재로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신은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를 합한 것이 신이 아니다. 신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볼까?
처참한 식민지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신음하던 자기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하는 예수를 그 당시 영적 상태와 지적 능력과 심리적 필요와 실제적 문제와 정치적 여건과 사회적 환경들에 따라 예수상을 근간으로 해서 발전해 왔다.
예)조선시대 한반도에 예수님이 혹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그런 희망과 의미를 심어준 분이 나타났다면 틀림없이 그는 도사라든가, 미륵불이라든가, 정도령이라든가, 무슨 보살이라든가, 후천개벽을 위한 한울님의 사신, 또는 천지공사를 위한 상제등으로 개념을 추리할 수 있다.
즉 4세기에 나온 기독론은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의 관계에서 생겨났으며 로고스 사상이나 부활, 구원관은 희랍의 밀의 종교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오랜 기간을 두고 대화나 변증법적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맥락에서 예수를 조명하고 이해해야 한다.
성불(成佛)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영적 체험을 하셨다. 즉 성령의 체험을 함을 말한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고 시험을 받으실 때도 영적 체험을 하셨다. 그것은 ‘성령에 이끌리어’간 것이라고 했다. 눅4:18에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라는 표현으로 변화산의 체험을 한다. 이런 수많은 성경의 기록들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영적 체험을 하였는데 이게 부처의 성불 체험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불이란 “깨침을 이룸”이란 뜻이다. 월남 출신 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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