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요시다토요히코의 경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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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회과학] 요시다토요히코의 경영철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하늘에서 뛰노는 북륙(北陸)의 매

2. 독창적인 상품과 상각자산

3. 위기에서 배우다 화재에서 재건까지

4. 요시다 토요히코를 낳은 야마시로(山城)온천의 계보

5. 요시다 토요히코, 기업가로서의 길

6. 하나야에서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로

7.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개업과 대형 투자전개

8.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지정학(지오폴리틱스)

9. 독창적 상품인 [오마츠리광장]의 탄생

10. 전략상품[우메바치테이(梅鉢亭)] 의 도전

11. 지금보다 더 높게 비약하기 위한 태동

12. 좌담 -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미래

본문내용


새롭게 오픈 한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3개월은 요시다에게 있어서는 늘 불안의 나날이었다. 물론 자신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어음과 융자의 변제는 요시다의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아무리 야마시로 온천에서 제일가는 호텔이라고 해도, 전국적으로 보면 야마시로 온천 자체가 아직 무명인데다, 야마시로 온천 자체가 4월이 되면 전체적으로 관광객이 줄어드는 전형적인 온천관광지로서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에는 [드링크 바] 와 같은 갖가지 여러 아이디어를 통해서 간신히 연명했지만, 여름만 되면 손님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여름 가뭄을 잘 넘겨야만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는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요시다는 대도시의 여행업자에 대한 세일즈를 강화하고 또 자체적인 다이렉트 메일로 손님을 확보하였다.
당시 여관과 호텔업은 손님의 환송영이 잘 갖춰 있어야만 했다. 즉 손님을 모셔오고, 바래다주는 시스템인데, 이 시스템의 적용은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인력부족을 초래하였다. 요시다는 손님을 태우고 직접 운전을 하는 등, 종업원이 하는 일은 모두 다 했으며, 부인, 가족부터 종업원 모두가 정신 없이 매달려야만 했다. 게다가 하나야를 동시에 운영을 하고 있었기에 더 더욱 정신이 없었다.
하나야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야 출신 종업원을 한 명만 데리고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를 경영한 것이다. 하냐야를 포기 못한 것은 하나야의 수익으로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를 꾸려갔기 때문이다. 하나야는 역사가 오래되어서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 있었지만,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경영은 요시다 자신은 물론 간부, 종업원 모두가 초보자였던 것이다.
그 후 3년 뒤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운영은 궤도에 올라 건물을 새롭게 증축하기에 이른다. 단체객을 주로 상대로 하였기 때문에 객실서비스의 질적인 차를 가능한 없앴으며 크고 작은 연회시설로 손님을 맞이하였다. 이 후 점차 지명도가 높아져, 오사카의 여행사에게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입니다]하면, [아, 야마시로온천의]라고 인식이 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하나야 시절에는 아무리 부탁해도 절대로 손님을 보내주지 않던 대형 여행사들도 점차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에 손님을 넣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1인당 숙박료는 단체 평균 2770엔, 특별실은 1만5000엔, 일반은 4000엔 정도였다. 그러나,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주위는 그 때 당시로는 전혀 개발되지 않은 논이었다. 밤만 되면 개구리의 합창이 들리는, 아름답고 조용한 풍경이라고는 전혀 없는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이였지만, 독특한 상품과 철저한 서비스 정신으로 연간 매출이 1억8000만 엔에 이르렀다. 당시 야마시로 최고의 여관이었던 하나야의 평균 숙박료가 1500~2000엔에 비하면 매우 비싼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는 야마시로 온천의 여관 중 최고 매출액을 갱신해갔다.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를 증축함에 있어서 요시다는 일부러 3층까지만 짓고 공사를 중단시킨 채 오픈을 하였다. 갑자기 객실을 늘리면 서비스가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비스의 향상 없이 양만 추구해서는 곧 실패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서비스의 향상 없이 양적 추구만 서두르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요시다는 말한다. 이 후 공사가 완공되고 완전한 오픈은 그로부터 1년이나 지난 뒤였다.
요시다는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경영이 궤도에 오르자, 또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온천지에 손님들을 오래, 또 자주 체재하게 하려면 아름다운 경치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좋은 서비스와 오래 있고 싶어지는 호텔. 정보를 얻기 위해 요시다는 하와이로 갔다. 하와이는 당시 일본인들의 최고 인기 리조트였다.
하와이에서 돌아온 요시다는 곧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 바로 밑의 땅 4천 평의 논을 샀다.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를 ‘리조트 아일랜드’로 만들기 위한 부지였다. 목적은 7~8월의 여름 고갈을 타파시킬 새로운 상품의 개발이었다. 요시다는 다시 과감한 거대규모의 투자에 뛰어들었다. 대형 원형 수영장을 건설한 것이다. 이 수영장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요시다 본인이 대힛트작이라고 웃을 만큼. 여름철 호텔 가동률은 40%대에서 갑자기 80%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요시다는 이 원형 수영장의 성공에 힘을 얻어 또 다시 새로운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관(南館)의 건설이었다. 남관의 건설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것은 하와이안쇼와 같은 이벤트를 볼 수 있는 시어터 레스토랑과 대형 목욕탕이었다. 요시다는 하나야의 원형식 온천장이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온천목욕이야말로 온천여관의 생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대형 목욕탕에는 야마시로 온천지에서는 첫번째로 사우나를 등장시킨다. 시어터 레스토랑은 수영장의 흑자를 그대로 가을, 겨울로 이어가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수영장이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결국은 여름 뿐이었기 때문이다. 쇼를 통해서 1년 내내 손님을 모으고 싶었던 것이다. 시어터 레스토랑과 대형 목욕탕은 수영장과 마찬가지로 대박이었다. 6개월 동안 매출은 2 배가 되었다.
이 시점에서 요시다는 41살, 정력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간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 는 업계의 정상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이후 계속 부지를 매수, 1972년에는 대형 볼링장을 건설, 1973년에는 빌라 햐꾸만고꾸(百萬石) 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1974년에는 노천 목욕탕을 건설하였다. 즉 1965년 완공된 이래, 평균 2년마다 거액의 투자를 한 셈이다. 양과 질, 그리고 퍼블릭 부문을 모두 만족시킨 것이다.
그러나 호텔 햐꾸만고꾸(百萬石)의 실패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는 룸서비스 시스템을 배제한 빌라 햐꾸만고꾸(百萬石)의 실패였다. 일본식 온천의 정서를 원하는 손님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온천에 오면, 철저한 인적서비스를 원하는 손님들에게 콘도식 여관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또 다른 실패는 너무나 유행이 빨리 지나가 버린 볼링장이었다. 볼링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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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5.08
  • 저작시기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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