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들은 후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왔다. 거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마를 주니 아이들이 따르게 되었다. 그제는 동요를 지어 가지고 그 아이들을 꾀어서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동요가 서울 안에 퍼져서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모든 관리들이 떠들고 나서는 바람에 먼 지방으로 공주를 귀양 보냈는데,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와서 인사를 드리고 호위해 가겠다고 하니 공주가 비록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나 우연히 마음에 들어서 따라 오게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좋아진 이후 서동이란 이름을 알고서 동요가 맞는다고 믿게 된 것이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놓고 살림을 차릴 것을 의논하는데 서동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게 무어요?”
공주가 말하기를
“이게 황금이요. 이만해도 한평생 잘살 수 있소.”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데는 내버려서 쌓인 것이 흙더미 같소.”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서 하는 말이
“이것이 천하에 다시 없는 보물이요. 만일 당신이 금이 있는 데를 알거든 그 보물을 우리 부모가 계신 궁전으로 보내 드리는 것이 어떻겠소?”
서동이 말하기를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아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수송할 방법을 물었더니 법사의 말이
“내가 신비스러운 힘으로 보낼 수 있소. 금만 가져오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가 놓았더니 법사가 신비스러운 힘으로서 하룻밤 동안 신라 궁전까지 수송하였다. 진평왕이 이런 신비스러운 일을 이상히 여겨서 몹시 존경하게 외고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니 서동이 이로써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을 데리고 사자사로 나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른즉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존경하는 예를 행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여기다가 큰절을 짓도록 하십시요. 그게 내 소원입니다.”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신비스러운 힘으로서 하룻밤 동안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위해 놓은 불상은 삼회의 미륵불이요 전각, 탑, 바깥채도 따로따로 지어서 미륵사라는 패를 붙이었다.(우리나라 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다.) 그때 진평왕이 각색 장인들을 보내서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그 절이 보존되어 있다.(삼국사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는데 여기서 전하기를 혼자 된 여자의 아들이라니 알 수 없다.)
<혜성가>
1.노래
동쪽 옛나루
건달파 노니는 고장을 바라 보고
왜병이 들어 왔다
봉화를 울린 국경이고나
세 화랑이 명산 유람 가련다
듣고서
달수를 브지러니 혜여 갈제
길을 블 별을 바라 보고
혜성이라 여쭙는 사람이 있다
아야
드르르 갔더라
이벗아 께름한 혜성이랄게 있을가
2.배경설화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다섯째의 거열랑, 여섯째의 실처랑(한편으로는 돌처랑이라고 한다.) 일곱째의 보도랑등 세 화랑의 무리가 금강산 유람을 떠나려고 하던 차에 심성의 큰 별이 있는 근처에 혜성이 나타나니 화랑의 무리는 겁이 나서 유람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그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혜성도 그만 없어지고 일본 군사도 저의 나라로 돌아가서 도리어 경사를 이루게 되었다. 임금이 기뻐서 화랑들을 보내어 금강산을 유람케 하였다.
<풍요>
1.노래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2.배경설화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양지란 중은 집안과 고향을 알지 못하나 선덕왕때에 그 행적이 유명해졌다. 지팡이 대가리에 베자루를 달면 지팡이가 제 혼자 날아서 단골집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 지팡이가 흔들어 소리를 내면 그집에서 알고 나와서 재에 쓸 비용을 집어 넣는다. 마침내 자루가 차면 날라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있는 절을 석장사라고 불렀으니 그의 신기하고 야릇한 행적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여러 가지의 재주를 배워서 교묘하기 짝이 없었으며, 글씨를 쓰거나 새기는 데 또한 능하여 영묘사의 세 부처, 천왕의 상과 전각, 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방, 법림사의 주장되는 부처 셋과 좌우쪽의 금강신등 모두 그가 조각한 것이다. 영묘사, 법림사 두 절 이름도 그가 써붙이었다. 또 일찍이 벽돌로 적은 탑 하나를 만들고 그 속에 부처 삼천을 앉힌 후 그 절에 모시고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그가 영묘사의 부처를 조각할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고 정수소대로 유식을 삼기 때문에 성안의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투어 가면서 흙을 져서 날랐다.
지금까지 일꾼들이 방아를 찧거나 힘드는 일을 할 때 모두 그 노래를 부르는 바 이는 대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비용으로 곡식 2만 3천 7백석이 들었다.
평론하는 사람들의 말이 이 대사야말로 재주가 구비되고 덕이 가득한 분이니 큰 인격을 가지고 조그만 기술에 숨어서 지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를 예찬하여 시를 지었다.
“재 끝난 방 앞에 지팡이 한가하니 향로에 불 담아 향불을 피는 고나. 불경을 읽고 나서 다른 일 더 없으니 부처님 새겨 놓고 합장해 뵈리라.”
<원왕생가>
1.노래
달아 이제
서쪽으로 지나 갈 것가?
무량수불앞에
말씀을 가져다 전해 다오
다짐이 깊으신 부처님 우러러
두손 모와 꽂으며 사뢰기를
원왕생 원왕생
념원하는 사람 있다 전해 다오
아야
이 몸이 끼쳐 두고
사십팔 큰 소원 이루실가?
2. 배경설화
광덕엄장
문무왕 시대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중이 서로 친하게 지냈다. 평상시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은 꼭 알려주고 가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동리에 살면서(혹은 황룡사에 서거방이 있다고 하는데 어느편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짚신을 삼아서 생활을 하였는데 처자를 데리고 있었고, 엄장은 남쪽 산위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농사를 크레 벌리고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하루는 저녁 노을이 붉게 타고 소나무 그림자가 점점 어두어지는 때 창 밖에서 부르는 소리기 들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 서방(극락의 뜻)으로 가네. 자네는 부디 잘 있다가 속히 날 따라오게.”
엄장이 문을 박차고
동요가 서울 안에 퍼져서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모든 관리들이 떠들고 나서는 바람에 먼 지방으로 공주를 귀양 보냈는데,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 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와서 인사를 드리고 호위해 가겠다고 하니 공주가 비록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하나 우연히 마음에 들어서 따라 오게 하였다. 그러다가 서로 좋아진 이후 서동이란 이름을 알고서 동요가 맞는다고 믿게 된 것이다. 함께 백제로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놓고 살림을 차릴 것을 의논하는데 서동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게 무어요?”
공주가 말하기를
“이게 황금이요. 이만해도 한평생 잘살 수 있소.”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데는 내버려서 쌓인 것이 흙더미 같소.”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서 하는 말이
“이것이 천하에 다시 없는 보물이요. 만일 당신이 금이 있는 데를 알거든 그 보물을 우리 부모가 계신 궁전으로 보내 드리는 것이 어떻겠소?”
서동이 말하기를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아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수송할 방법을 물었더니 법사의 말이
“내가 신비스러운 힘으로 보낼 수 있소. 금만 가져오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가 놓았더니 법사가 신비스러운 힘으로서 하룻밤 동안 신라 궁전까지 수송하였다. 진평왕이 이런 신비스러운 일을 이상히 여겨서 몹시 존경하게 외고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으니 서동이 이로써 인심을 얻어서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을 데리고 사자사로 나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른즉 미륵불 셋이 못 속으로부터 나타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존경하는 예를 행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여기다가 큰절을 짓도록 하십시요. 그게 내 소원입니다.”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신비스러운 힘으로서 하룻밤 동안에 산을 무너뜨리고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위해 놓은 불상은 삼회의 미륵불이요 전각, 탑, 바깥채도 따로따로 지어서 미륵사라는 패를 붙이었다.(우리나라 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다.) 그때 진평왕이 각색 장인들을 보내서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그 절이 보존되어 있다.(삼국사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는데 여기서 전하기를 혼자 된 여자의 아들이라니 알 수 없다.)
<혜성가>
1.노래
동쪽 옛나루
건달파 노니는 고장을 바라 보고
왜병이 들어 왔다
봉화를 울린 국경이고나
세 화랑이 명산 유람 가련다
듣고서
달수를 브지러니 혜여 갈제
길을 블 별을 바라 보고
혜성이라 여쭙는 사람이 있다
아야
드르르 갔더라
이벗아 께름한 혜성이랄게 있을가
2.배경설화
융천사 혜성가 진평왕대
다섯째의 거열랑, 여섯째의 실처랑(한편으로는 돌처랑이라고 한다.) 일곱째의 보도랑등 세 화랑의 무리가 금강산 유람을 떠나려고 하던 차에 심성의 큰 별이 있는 근처에 혜성이 나타나니 화랑의 무리는 겁이 나서 유람을 중지하려고 하였다. 그때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혜성도 그만 없어지고 일본 군사도 저의 나라로 돌아가서 도리어 경사를 이루게 되었다. 임금이 기뻐서 화랑들을 보내어 금강산을 유람케 하였다.
<풍요>
1.노래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2.배경설화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양지란 중은 집안과 고향을 알지 못하나 선덕왕때에 그 행적이 유명해졌다. 지팡이 대가리에 베자루를 달면 지팡이가 제 혼자 날아서 단골집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그 지팡이가 흔들어 소리를 내면 그집에서 알고 나와서 재에 쓸 비용을 집어 넣는다. 마침내 자루가 차면 날라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있는 절을 석장사라고 불렀으니 그의 신기하고 야릇한 행적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여러 가지의 재주를 배워서 교묘하기 짝이 없었으며, 글씨를 쓰거나 새기는 데 또한 능하여 영묘사의 세 부처, 천왕의 상과 전각, 탑의 기와, 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방, 법림사의 주장되는 부처 셋과 좌우쪽의 금강신등 모두 그가 조각한 것이다. 영묘사, 법림사 두 절 이름도 그가 써붙이었다. 또 일찍이 벽돌로 적은 탑 하나를 만들고 그 속에 부처 삼천을 앉힌 후 그 절에 모시고 불공을 드리게 하였다. 그가 영묘사의 부처를 조각할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고 정수소대로 유식을 삼기 때문에 성안의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투어 가면서 흙을 져서 날랐다.
지금까지 일꾼들이 방아를 찧거나 힘드는 일을 할 때 모두 그 노래를 부르는 바 이는 대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비용으로 곡식 2만 3천 7백석이 들었다.
평론하는 사람들의 말이 이 대사야말로 재주가 구비되고 덕이 가득한 분이니 큰 인격을 가지고 조그만 기술에 숨어서 지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를 예찬하여 시를 지었다.
“재 끝난 방 앞에 지팡이 한가하니 향로에 불 담아 향불을 피는 고나. 불경을 읽고 나서 다른 일 더 없으니 부처님 새겨 놓고 합장해 뵈리라.”
<원왕생가>
1.노래
달아 이제
서쪽으로 지나 갈 것가?
무량수불앞에
말씀을 가져다 전해 다오
다짐이 깊으신 부처님 우러러
두손 모와 꽂으며 사뢰기를
원왕생 원왕생
념원하는 사람 있다 전해 다오
아야
이 몸이 끼쳐 두고
사십팔 큰 소원 이루실가?
2. 배경설화
광덕엄장
문무왕 시대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두 중이 서로 친하게 지냈다. 평상시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은 꼭 알려주고 가자고 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동리에 살면서(혹은 황룡사에 서거방이 있다고 하는데 어느편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짚신을 삼아서 생활을 하였는데 처자를 데리고 있었고, 엄장은 남쪽 산위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농사를 크레 벌리고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하루는 저녁 노을이 붉게 타고 소나무 그림자가 점점 어두어지는 때 창 밖에서 부르는 소리기 들리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 서방(극락의 뜻)으로 가네. 자네는 부디 잘 있다가 속히 날 따라오게.”
엄장이 문을 박차고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