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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결국 그는 유교란, 경전을 해석하는 하나의 기술적인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뒤 동증성의 학살에 엄격한 검토와 문제점 찾기에 골몰한다.
스무 살이 된 사마천은 자신의 일상적인 안일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드디어 천하주유의 등장에 오르는 것이다. <사기>에 전말마다 붙어 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태사 공자서>를 보면, 그가 주유천하하는 동안에 느낀 감상을 잘 적어 놓고 있다.
그는 고대 5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유적을 찾고 그들의 전설에 접하면서 감격해 하고 있다.
역사적인 영웅인 제의 태공망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그의 인간됨에 유념하기도 한다.
곡부에 들러 숭배해 마지않던 공자의 묘당을 방문함며 공자의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오래 동안 상상해 보기도 한다.
주의 무왕이 포악한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그나마도 무력혁명이라 하여 그 밑에서 녹 먹을 것을 비굴하게 여겨 수양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백이. 숙제의 유적을 찾고는 심란해 한다.
전국시대의 맹상군과 신릉군과 춘신군 등과 인연이 있던 지방을 지나칠 때에는 q반드시 그들의 유적을 답사하고는 후손들에게 그들 생전의 인간 됨됨이를 자세히 물어 두곤 했다.
초의 회왕 때 간신의 참소를 받고 끝내 강남의 멱라수에 투신자살한 충신 굴원의 유적을 찾고는 그의 신세를 억울해 하기도 한다.
진나라가 구축한 만리장성 위로 올라, 산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를 메운 장대한 광경을 목도하고 상상하면서 이런 대사업에 투입되어 죽어 간 슬픈 농민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치기도 한다.
장성 축조를 지휘했던 장군 몽염이 시황제의 죽음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느끼며 홀로 착잡해 하기도 한다.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장 한신의 고향을 굳이 찾아, 그가 가난에 쪼들리고 비천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원대한 꿈을 잃지 않더라는 촌로들의 얘기를 들으며, 큰 인물로서의 비범한 재능과 행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세심히 관찰 기록한다.
사마천은 맨처음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가서 남하해 회수와 양자강 유역을 돌아 회계산을 올랐으며, 구의산을 둘러보고 원수와 상수를 배로 건넜으며, 다시 북상해 민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공자의 조국인 노의 수도 곡부를 거쳐 천하 명산 태산에 올랐고, 추현의 역산에도 올랐으며, 파현. 설현. 팽성형을 들르고 양과 초를 거쳐서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다.
적어도 3년은 충분히 걸렸으리라는 추측이며, 돌아온 직후 낭중 벼슬에 오르는 것으로 돼 있다.
그가 처음부터 역사를 서술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역사적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점은 가히 운명적이랄 수 있다. 역사적 문헌을 탐독할 수 밖에 없던 인연이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 혹은 위인들의 고향을 찾아 그 곳의 인정. 풍속을 접하게 되는 천하주유의 대장정 감행 또한 역사가로서 그의 숙명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전력 없이는 중국 역사학의 걸작인 <사기>는 탄생될 수가 없는 일이다.
B.C. 2세기경인 효무제가 통치하는 재위 54년 간은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빛나던 시대로 일컬어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사상. 문학 등에서 그 동안 축적돼 온 중국인의 저력이 일시에 폭발되는 문예부흥기로 말해진다.
효무제가 태양이라면 그 주위로 빛나는 위성들처럼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인물들이 많다. 역사가 사마천을 필두로 사상가 동중서, 시인 사마상여, 해학가 동방삭, 대장군 위청, 경골한 급암, 여행가 장건, 청년작전가 곽거병 외에도 당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효무제는 국가적인 행사로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을 단행코자 했다.
봉선이란 태산의 산정에 올라 토단을 쌓고 천신인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태산의 구릉인 양보로 내려와 지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그 행사는 성전이었다. 개인에게는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말까 하여 봉선의식 참가는 그지없는 영광이었다.
봉선에 참가코자 하는 고관들이 하도 많아 정부로서는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중이천석의 봉록을 받는 삼공과 9경들은 어쩔 수 없었더라도 기타의 하급 관리들은 지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6백 석의 봉록을 받는 사마담은 불행히도 봉선 참례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더구나 기록관인 태사령으로서도 참례 못 하게 된 사실이 못내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병이 되었다. 동도 낙양에 잔류하면서 실의와 낙담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이 더욱 위중해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직감했다.
병석에 누운 채 사람을 시켜서 아들 사마천을 급히 낙양으로 불렀다.
\'주공단이 사거한 지 5백 년 만에 공자가 <춘추>를 저술해 끊어졌던 기록의 전통이 되살아났다. 공자 또한 사거한 지 5백 년 만인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명주와 현군과 충신과 역사 등의 수효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사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족적을 기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급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못다 한 일 때문에 한이 많구나. 나를 대신하여 네가 그 기록들을 남겨 내 한을 풀어 주면 어떻겠느냐.\'
아들 천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불민한 자식이오나 삼가 아버님의 유지를 모시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구래의 기록들을 잘 정리해 결코 빠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약속이 사마천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다.
그는 우선 황실도서관에 비장되는 책으로 일컬어지는 석실. 금궤의 서들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전제국의 연대기를 읽었다. 한제국의 조칙과 대신들의 상주문 따위e들도 섭렵했다. 오경인 <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도 다시 정독했다. <좌씨전> <국어> <세본> <초한춘추>등도 열심히 탐독했다.
드디어 <사기> 저술에 착수했다. 거기에 몰두한 지 7년 뒤 어느 날, 사마천에는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장군 이능이 5천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북방 원정길에 올랐다가 흉노군 1만의 적을 베고도 8만 대군에 포
스무 살이 된 사마천은 자신의 일상적인 안일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드디어 천하주유의 등장에 오르는 것이다. <사기>에 전말마다 붙어 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태사 공자서>를 보면, 그가 주유천하하는 동안에 느낀 감상을 잘 적어 놓고 있다.
그는 고대 5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유적을 찾고 그들의 전설에 접하면서 감격해 하고 있다.
역사적인 영웅인 제의 태공망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그의 인간됨에 유념하기도 한다.
곡부에 들러 숭배해 마지않던 공자의 묘당을 방문함며 공자의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오래 동안 상상해 보기도 한다.
주의 무왕이 포악한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그나마도 무력혁명이라 하여 그 밑에서 녹 먹을 것을 비굴하게 여겨 수양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백이. 숙제의 유적을 찾고는 심란해 한다.
전국시대의 맹상군과 신릉군과 춘신군 등과 인연이 있던 지방을 지나칠 때에는 q반드시 그들의 유적을 답사하고는 후손들에게 그들 생전의 인간 됨됨이를 자세히 물어 두곤 했다.
초의 회왕 때 간신의 참소를 받고 끝내 강남의 멱라수에 투신자살한 충신 굴원의 유적을 찾고는 그의 신세를 억울해 하기도 한다.
진나라가 구축한 만리장성 위로 올라, 산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를 메운 장대한 광경을 목도하고 상상하면서 이런 대사업에 투입되어 죽어 간 슬픈 농민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치기도 한다.
장성 축조를 지휘했던 장군 몽염이 시황제의 죽음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느끼며 홀로 착잡해 하기도 한다.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장 한신의 고향을 굳이 찾아, 그가 가난에 쪼들리고 비천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원대한 꿈을 잃지 않더라는 촌로들의 얘기를 들으며, 큰 인물로서의 비범한 재능과 행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세심히 관찰 기록한다.
사마천은 맨처음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가서 남하해 회수와 양자강 유역을 돌아 회계산을 올랐으며, 구의산을 둘러보고 원수와 상수를 배로 건넜으며, 다시 북상해 민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공자의 조국인 노의 수도 곡부를 거쳐 천하 명산 태산에 올랐고, 추현의 역산에도 올랐으며, 파현. 설현. 팽성형을 들르고 양과 초를 거쳐서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다.
적어도 3년은 충분히 걸렸으리라는 추측이며, 돌아온 직후 낭중 벼슬에 오르는 것으로 돼 있다.
그가 처음부터 역사를 서술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역사적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점은 가히 운명적이랄 수 있다. 역사적 문헌을 탐독할 수 밖에 없던 인연이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 혹은 위인들의 고향을 찾아 그 곳의 인정. 풍속을 접하게 되는 천하주유의 대장정 감행 또한 역사가로서 그의 숙명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전력 없이는 중국 역사학의 걸작인 <사기>는 탄생될 수가 없는 일이다.
B.C. 2세기경인 효무제가 통치하는 재위 54년 간은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빛나던 시대로 일컬어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사상. 문학 등에서 그 동안 축적돼 온 중국인의 저력이 일시에 폭발되는 문예부흥기로 말해진다.
효무제가 태양이라면 그 주위로 빛나는 위성들처럼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인물들이 많다. 역사가 사마천을 필두로 사상가 동중서, 시인 사마상여, 해학가 동방삭, 대장군 위청, 경골한 급암, 여행가 장건, 청년작전가 곽거병 외에도 당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효무제는 국가적인 행사로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을 단행코자 했다.
봉선이란 태산의 산정에 올라 토단을 쌓고 천신인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태산의 구릉인 양보로 내려와 지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그 행사는 성전이었다. 개인에게는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말까 하여 봉선의식 참가는 그지없는 영광이었다.
봉선에 참가코자 하는 고관들이 하도 많아 정부로서는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중이천석의 봉록을 받는 삼공과 9경들은 어쩔 수 없었더라도 기타의 하급 관리들은 지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6백 석의 봉록을 받는 사마담은 불행히도 봉선 참례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더구나 기록관인 태사령으로서도 참례 못 하게 된 사실이 못내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병이 되었다. 동도 낙양에 잔류하면서 실의와 낙담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이 더욱 위중해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직감했다.
병석에 누운 채 사람을 시켜서 아들 사마천을 급히 낙양으로 불렀다.
\'주공단이 사거한 지 5백 년 만에 공자가 <춘추>를 저술해 끊어졌던 기록의 전통이 되살아났다. 공자 또한 사거한 지 5백 년 만인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명주와 현군과 충신과 역사 등의 수효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사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족적을 기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급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못다 한 일 때문에 한이 많구나. 나를 대신하여 네가 그 기록들을 남겨 내 한을 풀어 주면 어떻겠느냐.\'
아들 천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불민한 자식이오나 삼가 아버님의 유지를 모시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구래의 기록들을 잘 정리해 결코 빠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약속이 사마천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다.
그는 우선 황실도서관에 비장되는 책으로 일컬어지는 석실. 금궤의 서들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전제국의 연대기를 읽었다. 한제국의 조칙과 대신들의 상주문 따위e들도 섭렵했다. 오경인 <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도 다시 정독했다. <좌씨전> <국어> <세본> <초한춘추>등도 열심히 탐독했다.
드디어 <사기> 저술에 착수했다. 거기에 몰두한 지 7년 뒤 어느 날, 사마천에는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장군 이능이 5천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북방 원정길에 올랐다가 흉노군 1만의 적을 베고도 8만 대군에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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