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속의 화랑의 다양한 면모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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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가 속의 화랑의 다양한 면모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三國遺事』에 등장하는 향가 속의 화랑
1.1 『三國遺事』의 찬술의도
1.2 작품 속에 드러난 화랑의 모습
1.2.1 「慕竹旨郞歌」
1.2.2 「讚耆婆郞歌」
1.3 문제인식
2.『花郞世紀』에 등장하는 향가 속의 화랑
2.1 『花郞世紀』의 찬술의도
2.2 『花郞世紀』에 드러난 화랑의 모습
3.『花郞世紀』향가작품의 창의적 분석
3.1 작품배경- 자유부인 미실과 화랑
3.2 작품- 「風浪歌」, 「靑鳥歌」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에 전하는 14수와 균여전에 전하는 11수를 합쳐 25수이다. 이중 화랑이 등장하는 향가는 「讚耆婆郞歌」와 「慕竹旨郞歌」 이며 이 둘은 모두 삼국유사 《紀異》편 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찬사서이다. 따라서 편찬자의 주관과 의지가 편찬물에 반영될 수밖에 없으며,『삼국유사』소재 향가 역시 일연의 의도에 의한 편찬물의 일부이므로 향가를 살펴봄에 있어 『삼국유사』의 찬술의도와 관련지어 볼 필요성이 있다.
1.1 『삼국유사』의 찬술의도
고려사회는 가문과 문벌을 중요시하는 호족출신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집중된 특권을 누리는 귀족제도의 사회였다. 그들은 왕실과 親姻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 관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겸병하여 그 정점에 서 있었다. 이들 문신귀족정권은 점차적으로 중앙귀족, 왕도중심으로 굳어져 타의 정치참여를 거부하는 독선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기층사회와의 괴리. 국가와 사회, 정권과 민중 사이의 유리가 발생하였다. 이런 지배체제가 지속됨에 따라 내부의 반목과 전통적 민중의식의 상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제적 균형감각을 잃어 야만시 해오던 여진에 대한 칭신하는 굴욕적인 사대외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문벌귀족들의 폭압과 멸시에 견디다 못한 무인들의 정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신정권역시 바른 질서 회복과는 거리가 멀었고, 새로운 무단의 살육과 독재가 계속되었으며, 그간 고려중기 문신귀족의 횡행 아래 발달한 사적 대토지 횡탈에 따른 농장은 더 성행하였다. 정무룡, 정경주 외, 『삼국유사의 문화적 탐색』, 신지서원, 1998
이런 상황에서 민란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여기에 원의 침략이 닥쳐왔다. 고종 18년 이래 계속된 몽고의 야만적 침략과 지배는 민족적 분노와 좌절을 체험케 했다. 국내적으로 문무의 독선적 정권이 자행한 폭압을 겪고, 몽고와의 30년 항전을 치르면서 그 분노와 저항의식은 곧 역사전통에 대한 민족적 의식으로 심화되게 되었다. 이런 심화된 민족적 의식이 보다 지방적이며 보다 민중 속에서 성장한 신진사인이나 신흥의 선승들에게서 더욱 구체적 인식이 보이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京都에의 療治를 위한 최씨 무인정권의 갖가지 역청에 불응한 채, 평생을 산간에서 지냈던 일연으로서는 절급하게 의식되었던 것이 역사적 전통의 새로운 발견과 그 회복을 위한 일이 국가와 사회적인 요청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신진사인 이규보가 이 시기에 동명왕의 사적을 읊으면서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도읍임을 알게 하려함이다.”라고 함은 자국의 역사전통에 대한 강렬한 자부의식의 체현이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런 신진사인은 보다 넓은 국가적인 차원의 민족의식, 자기의 역사전통에 대한 긍정의 새로운 인식을 체득하고 있던 것이다. 정무룡 정경주 외, 앞의 책
『삼국유사』또한 이러한 의식의 전승에서 빚어진 산물이었다. 일연은 이런 대몽 항쟁 기를 거쳐 원의 지배기에 접어든 매우 암울한 시대를 사람이다. 전반 생애가 대개 몽고의 침략기에 해당한다면 후반 생애는 원나라의 간섭 기에 속한다. 30여년에 걸친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는 초토화, 미처 정신 차리기도 전이 원나라 간섭이 잇따른 이런 시기에 국사로서 고려의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그에게 이런 특수한 신분의식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일연의 『삼국유사』는 이런 민족적 혼란기라는 시대적 요구에 호응하여, 일연의 찬술목적에 따라 혼란기 속의 우리 민족에게 현실적 차원에서의 구원과 희망을 주기 위한 노력 채상식, 『一然의 사상적 경향』, 한국문화연구, 1988
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또한 일연의 의도대로 일정한 조와 편목에 놓여진 것이므로 그 나름대로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모죽지랑가」와「찬기파랑가」가 그 서사물과 함께 「기이」편에 수록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기이」편은 신라 사 중심으로 역대왕의 기이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으로 『삼국유사』전체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가장 많다. 위에서 언급한 일연의 찬술의도와 관련지어 보면, 다른 편과 달리 유일하게 序가 있다는 점과 그 서에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롭고 이상한데서 탄생했다는 것이 무엇이 괴이하랴. 이것이 이 책 첫머리에 기이 편을 두는 까닭이며 의의도 여기 있다”라 한 것에서 그의 당대의 민족적 위기의 상황에서 자주의식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이런 관점으로 삼국유사 소재 향가 속에 등장하는 화랑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2 향가 작품 속에 드러난 화랑의 모습
1.2.1 「모죽지랑가」
「모죽지랑가」는 ‘孝昭王代 竹旨郞’조에 속해 있다. 죽지랑은 김유신과 더불어 삼국 통일에 이바지한 화랑으로 이 작품의 작자인 득오(일반화랑 즉 낭도)에게 꿈과 희망을 준 인물이다. 그는 위대한 인간됨을 지녀 추앙을 받았던 당대 인물로,「모죽지랑가」는 이러한 죽지랑을 사모하여 禮讚적 어조로 부른 시가다. 임기중,『새로 읽는 향가문학』, 아세아문화사. 1972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해서 지은 것이라는 언급은 삼국유사 속의 서사 물에 명시되어 있는 이상 이 노래의 성격 또한 그 서사 물을 무시하고 다룰 수 없다. 우선 이 조목의 배경기사를 서술 순서대로 보면 죽지랑이 익선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낭도 득오를 구하고 익선을 징벌하는 부분, 죽지랑의 신이한 태생과 그의 위업을 그린 부분, 득오가 그런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다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렇게 ‘효소왕대 죽지랑’ 조는 그 조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내용상으로 죽지랑에 대한 전기적인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노랫말에서도 죽지랑을 사모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모죽지랑가」의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모죽지랑가>
去隱春皆林米 간 봄 그리매 毛冬居叱哭屋尸以憂音 모 것 우리 시름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아 나토샤온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즈 샬㈓ 디니져目煙廻於尸七史伊衣눈 돌칠 이예逢烏支惡知作乎下是맛보디 지리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낭이여 그릴 녀올길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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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09
  • 저작시기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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