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대안교육의 개념
1. ‘대안교육’의 유래
2. 대안교육의 의미
Ⅱ. 대안교육의 발달
1. 대안교육의 등장배경
1) 1990년대 이전의 대안적 교육 실천 - 민중교육운동 (야학)
2) 1990년대 이후의 대안교육 운동
Ⅲ. 대안학교 창시자
1. 몬테소리 교육학
2. 예나플랜 교육학
3. 프레네 교육학
4. 발도로프 교육학
Ⅳ. 대안학교의 유형과 사례
1. 자유 학교형 대안학교
2. 생태 학교형 대안학교
3. 재적응 학교형 대안학교
4. 고유 이념 추구형 대안학교
※ 국내의 대안학교 - 간디학교 (숲속 마을 작은 학교)
※ 국외의 대안학교 - 섬머힐 학교(Summerhill School)
Ⅴ. 대안학교의 이념
1. 평화교육
2. 노작교육
3. 인간화 교육
Ⅵ. 대안교육의 시사점
1. 대안교육의 이점
1) 생태주의적인 측면
2) 효과적인 학습방법
3) 인간화, 개성, 인격, 존중
4) 공동체적 가치 추구
2. 대안교육의 문제점 - 12가지
Ⅶ. 결론
1. ‘대안교육’의 유래
2. 대안교육의 의미
Ⅱ. 대안교육의 발달
1. 대안교육의 등장배경
1) 1990년대 이전의 대안적 교육 실천 - 민중교육운동 (야학)
2) 1990년대 이후의 대안교육 운동
Ⅲ. 대안학교 창시자
1. 몬테소리 교육학
2. 예나플랜 교육학
3. 프레네 교육학
4. 발도로프 교육학
Ⅳ. 대안학교의 유형과 사례
1. 자유 학교형 대안학교
2. 생태 학교형 대안학교
3. 재적응 학교형 대안학교
4. 고유 이념 추구형 대안학교
※ 국내의 대안학교 - 간디학교 (숲속 마을 작은 학교)
※ 국외의 대안학교 - 섬머힐 학교(Summerhill School)
Ⅴ. 대안학교의 이념
1. 평화교육
2. 노작교육
3. 인간화 교육
Ⅵ. 대안교육의 시사점
1. 대안교육의 이점
1) 생태주의적인 측면
2) 효과적인 학습방법
3) 인간화, 개성, 인격, 존중
4) 공동체적 가치 추구
2. 대안교육의 문제점 - 12가지
Ⅶ. 결론
본문내용
이념과 방식에서 대안교육을 실천하는 곳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학교는 대안교육 운동의 초창기에 커다란 힘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1) 1990년대 이전의 대안적 교육 실천 - 민중교육운동 (야학)
우리나라에서 야학은 구한말에 처음 등장하여 일제 시대에는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할 만큼 그 유래가 깊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자위를 감춘 뒤 광복 후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1950년대 말 빈곤 청소년을 위한 천막학교 형태였으며, 1960년대 초 4.19 혁명의 좌절을 겪은 대학생들의 제2브나로드 운동이 5.16 군사 정변의 재건국민운동과 만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좀더 본격적인 야학 운동은 1970년대에 들어 전개되었다. 경제 개발의 진전으로 이농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학교교육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층이 증가하는 한편, 1960년대 말부터 노동 운동이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근로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에는 도시 빈민지역이나 소공장 밀집 지역에서 천막학교나 교회부설학교 등의 야학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개 야학의 운영자나 교사는 대학생들이었다. 특히 1970년의 전 태일 분신 사건과 2년 후의 유신체제 등장은 대학생들의 야학 참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학 운동은 1980년대 초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노동운동과 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한 당국의 탄압, 중고등학교의 취학이 보편화됨에 따라 야학 학생의 자원이 감소하고 주요 교사 자원인 대학생들의 관심도 급진적 사회운동에 집중됨에 따라 규모나 역할 측면에서 크게 쇠퇴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970-80년대의 민중교육은 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을 대상으로 그들 스스로의 의식적인 자각과 이를 통한 사회 변화의 주체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생활과 거리가 먼 지식과 기존 사회의 주류 가치 습득을 위주로 하는 학교교육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교육은 전반적으로 사회운동의 한 계기로 이해되고 실천되었기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 사회운동의 퇴조와 맥을 같이 하였다.
2) 1990년대 이후의 대안교육 운동
1980년대에는 급진적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이 거세어짐에 따라 민중교육 부문은 물론 학교교육 안에서도 기존 교육에 대한 대안적 이념과 형식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심도 있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들은 1990년대 초를 넘기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부분적인 민주화의 진전으로 한국사회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이완되는 한편, 대신에 정보화나 세계화 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육부문에도 반영되어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던 학교 안팎의 교육적 실천들이 약화되는 대신 새로운 경향의 다양한 교육적 실천들이 소규모 단위로 모색되었다. 이들은 사회 변화라는 큰 주제보다는 입시나 교과 성적 위주의 학교교육에서 고통 받는 학생들에게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데 큰 관심을 두었으며,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한 소모임 또는 캠프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많은 교육 소 모임들이 집중적으로 출현한 것은 입시 중압감으로 인한 청소년의 자살과 비행이 급증함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교육현실에 대한 절박감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학교교육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교육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메마른 지식과 경쟁을 지양하고 자율적이되 남과 더불어 살며 감성이 풍부한 인간을 지향하는 한편, 자연 속에서의 노작과 체험을 중시하였다.
Ⅲ. 대안학교 창시자
1. 몬테소리 교육학
몬테소리 교육학은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가 구축한 교육학이다.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로서 처음에는 정신박약아동을 의학적으로 연구하다가 아동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개발한 교수법을 통하여 공부한 장애아동들이 다른 아동들과 대등하거나 부분적으로 더 높은 성적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몬테소리 교육학은 빠르게 명성을 얻어갔다. 교육을 정상화로 보는 입장, 아동의 자발성의 강조, 아동은 특정한 단계에서 특정한 분야의 학습능력을 보인다는 민감기 이론, 각 발달단계에 맞는 이른바 준비된 환경의 강조, 소극적 교육론 등이 몬테소리 교육학의 골자이다.
몬테소리 교육은 처음에는 주로 유치원 어린이를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로 초등중등학교까지 확대되었다. 몬테소리가 함께 일한 동료들과 힘을 모아 꾸준히 개발한 많은 교구들은 현재 다수의 몬테소리 유치원과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2. 예나플랜 교육학
예나플랜(Jenaplan)은 페터젠(Peter Petersen)이 1924년 이래로 독일 예나대학 부속실습학교에서 개발하고 실현시킨 학교 안이다. 교사와 교장, 대학교수를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이, 페터젠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인물이다. 예나플랜에는 한편으로 현장에서 교육실제, 다른 한편으로 사실연구에서 나온 교육 과학적 성과들이 녹아 있다. 이와 더불어 예나 플랜은 당시 국제적 운동으로서의 신교육 운동의 틀에서 독일이 내놓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예나플랜”이라는 명칭은 1927년 8월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열린 신교육협회 제4차 회의에서 새겨난 것이다. 42개국에서 온 1200명이 참가한 이 최의에서 페터젠은 자신이 예나대학에서 시도하고 있는 학교의 원리들, 발달과정 그리고 드러나는 문제점 등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이때 회의의 진행을 맡았던 영국인들이 그의 강연을 “예나플랜”이라는 이름을 붙여 소개하였다. 당시 이미 유명했던 학교시도들이 달톤플랜(Daltonplan), 위네트카플랜(Winnetkaplan), 개리플랜(Garyplan)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관례에 따라서 그렇게 불렀던 것인데, 그 이후 페터젠의 학교개혁안은 예나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예나플랜 교육학은 당시 시도된 여러 학교개혁안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페터젠이 자신의 교육사상을 실현시키는데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나갔던 것
1) 1990년대 이전의 대안적 교육 실천 - 민중교육운동 (야학)
우리나라에서 야학은 구한말에 처음 등장하여 일제 시대에는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할 만큼 그 유래가 깊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부분 자위를 감춘 뒤 광복 후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1950년대 말 빈곤 청소년을 위한 천막학교 형태였으며, 1960년대 초 4.19 혁명의 좌절을 겪은 대학생들의 제2브나로드 운동이 5.16 군사 정변의 재건국민운동과 만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좀더 본격적인 야학 운동은 1970년대에 들어 전개되었다. 경제 개발의 진전으로 이농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학교교육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층이 증가하는 한편, 1960년대 말부터 노동 운동이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근로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에는 도시 빈민지역이나 소공장 밀집 지역에서 천막학교나 교회부설학교 등의 야학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대개 야학의 운영자나 교사는 대학생들이었다. 특히 1970년의 전 태일 분신 사건과 2년 후의 유신체제 등장은 대학생들의 야학 참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야학 운동은 1980년대 초까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노동운동과 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한 당국의 탄압, 중고등학교의 취학이 보편화됨에 따라 야학 학생의 자원이 감소하고 주요 교사 자원인 대학생들의 관심도 급진적 사회운동에 집중됨에 따라 규모나 역할 측면에서 크게 쇠퇴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970-80년대의 민중교육은 주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을 대상으로 그들 스스로의 의식적인 자각과 이를 통한 사회 변화의 주체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생활과 거리가 먼 지식과 기존 사회의 주류 가치 습득을 위주로 하는 학교교육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교육은 전반적으로 사회운동의 한 계기로 이해되고 실천되었기 때문에 1990년대에 들어 사회운동의 퇴조와 맥을 같이 하였다.
2) 1990년대 이후의 대안교육 운동
1980년대에는 급진적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이 거세어짐에 따라 민중교육 부문은 물론 학교교육 안에서도 기존 교육에 대한 대안적 이념과 형식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심도 있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들은 1990년대 초를 넘기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부분적인 민주화의 진전으로 한국사회의 급진적 변화에 대한 기대가 이완되는 한편, 대신에 정보화나 세계화 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들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육부문에도 반영되어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던 학교 안팎의 교육적 실천들이 약화되는 대신 새로운 경향의 다양한 교육적 실천들이 소규모 단위로 모색되었다. 이들은 사회 변화라는 큰 주제보다는 입시나 교과 성적 위주의 학교교육에서 고통 받는 학생들에게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데 큰 관심을 두었으며,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한 소모임 또는 캠프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처럼 비슷한 시기에 많은 교육 소 모임들이 집중적으로 출현한 것은 입시 중압감으로 인한 청소년의 자살과 비행이 급증함에도 불구하고 그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교육현실에 대한 절박감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기존의 학교교육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교육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메마른 지식과 경쟁을 지양하고 자율적이되 남과 더불어 살며 감성이 풍부한 인간을 지향하는 한편, 자연 속에서의 노작과 체험을 중시하였다.
Ⅲ. 대안학교 창시자
1. 몬테소리 교육학
몬테소리 교육학은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가 구축한 교육학이다. 몬테소리는 이탈리아 최초의 여의사로서 처음에는 정신박약아동을 의학적으로 연구하다가 아동의 교육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개발한 교수법을 통하여 공부한 장애아동들이 다른 아동들과 대등하거나 부분적으로 더 높은 성적을 올린 일이 계기가 되어 몬테소리 교육학은 빠르게 명성을 얻어갔다. 교육을 정상화로 보는 입장, 아동의 자발성의 강조, 아동은 특정한 단계에서 특정한 분야의 학습능력을 보인다는 민감기 이론, 각 발달단계에 맞는 이른바 준비된 환경의 강조, 소극적 교육론 등이 몬테소리 교육학의 골자이다.
몬테소리 교육은 처음에는 주로 유치원 어린이를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로 초등중등학교까지 확대되었다. 몬테소리가 함께 일한 동료들과 힘을 모아 꾸준히 개발한 많은 교구들은 현재 다수의 몬테소리 유치원과 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다.
2. 예나플랜 교육학
예나플랜(Jenaplan)은 페터젠(Peter Petersen)이 1924년 이래로 독일 예나대학 부속실습학교에서 개발하고 실현시킨 학교 안이다. 교사와 교장, 대학교수를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이, 페터젠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인물이다. 예나플랜에는 한편으로 현장에서 교육실제, 다른 한편으로 사실연구에서 나온 교육 과학적 성과들이 녹아 있다. 이와 더불어 예나 플랜은 당시 국제적 운동으로서의 신교육 운동의 틀에서 독일이 내놓은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예나플랜”이라는 명칭은 1927년 8월 스위스의 로카르노에서 열린 신교육협회 제4차 회의에서 새겨난 것이다. 42개국에서 온 1200명이 참가한 이 최의에서 페터젠은 자신이 예나대학에서 시도하고 있는 학교의 원리들, 발달과정 그리고 드러나는 문제점 등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이때 회의의 진행을 맡았던 영국인들이 그의 강연을 “예나플랜”이라는 이름을 붙여 소개하였다. 당시 이미 유명했던 학교시도들이 달톤플랜(Daltonplan), 위네트카플랜(Winnetkaplan), 개리플랜(Garyplan)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관례에 따라서 그렇게 불렀던 것인데, 그 이후 페터젠의 학교개혁안은 예나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예나플랜 교육학은 당시 시도된 여러 학교개혁안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페터젠이 자신의 교육사상을 실현시키는데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나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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