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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요약
느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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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루되어 비국교도로 낙인이 찍힌다. 1661년에 찰스 왕이 복귀하자 곧 두 교구로부터 축출 당했다. 그는 이전에도 목회를 하면서 의사로서 봉사를 하고 있었으나 축출당한 후부터는 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료 활동에 봉사하였다. 그는 의사로 살면서도 계속하여 설교하였고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마을의 교회에 초청받아 설교하였다. 1665년 국교정책에 반대하는 비국교도는 교구로부터 5마일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 안 되는 5마일 법령이 선포되자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마을에서 쫓겨나 도싯의 산골짜기에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았다. 그는 이러한 시련 중 젊은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당한다. 바톨로뮤는 추방당한 후 15년간의 삶을 고독과 고통으로 보내고 1680년 약 85년간의 신앙의 투사로써의 여정을 마친다.
존 웨슬리는 메도디즘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조부이다. 그는 바톨로뮤의 외아들로서 자신의 손자와 이름이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청도교 양육을 받으며 자랐고 특별히 신앙심이 깊어 항상 구원을 갈망하고 연구와 기도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소년 시절부터 영성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동양어와 신학을 전공하고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 후 아버지가 있는 차마우트 근처 웨이마우트에서 비국교도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해변가와 어촌 마을을 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는 안수 받지 않은 채로 1658년에 화이트처치 교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662년에 국교회로부터 강제 축출될 때까지 헌신적인 목회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5마일 법령이 선포되어 투옥되고 42세의 나이에 젊은 아내와 3남 1녀의 자식을 두고 떠났다.
사무엘 아네슬리는 메도디즘의 어머니 수산나를 낳은 존 웨슬리의 외조부다. 그는 17세기 대표적 청도교 목사요 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고 1644년에 성직 안수를 받고 영국 해군 함대의 군목이 되었다. 1648년에 옥스퍼드대학에서 민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국회의 초청으로 국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목받았다. 그는 설교에서 국왕을 비판하고 국왕 찰스 3세를 살해한 크롬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명성이 높아1657년에 성 바울 성당에서 매주일 설교하도록 임명되었다. 1662년에 왕정복고가 되었을 때에 그는 정책에 순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앙 양심과 참되고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런던에서 가장 좋은 교구인 성 가일 교구교회의 목사직을 떠났다. 그는 1672년에 장로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1696년 죽을 때까지 목회하였다.
사무엘은 1662년 영국 남부 도체스터에서 아버지 존 웨슬리의 네 자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도체스터 트리니티 교구의 목사요 도체스터 지방의 대부로 알려진 존 화이트 목사의 딸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부친 존 웨슬리는 1662년 비국교도 성직자 2,000명이 대축출될 때 함께 축출되어 담임하던 화이트처치 교구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사무엘의 가족은 살 집도 없이 방랑생활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박해와 시련, 지독한 가난과 고독을 견디며 살아야했다. 그리고 그가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홀로 네 자녀를 길렀다. 그의 어머니는 비국교도들의 도움을 조금 받았지만 역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사명은 네 자녀에게 정통 기독교 신앙과 교육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다.
사무엘은 16세까지 도체스터의 비국교도 학교에 다녔으며, 18세까지는 런던의 에드워드 빌 비국교도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아버지의 스승인 존 오웬의 추천을 받아 런던의 명문 비국교도 학교인 스토크 뉴잉톤 아카데미에 갈 수 있었다. 사무엘은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이때 벌써 훌륭한 작품이 수심 편의 에세이와 시가 있었다.
사무엘은 21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신앙과 청지적인 입장에서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선조들이 오랫동안 충실히 지켜온 비국교도 신앙을 떠나서 국교도가 결정한 것이다. 더 이상 비국교도 학교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몇 시간을 걸어서 옥스퍼드 대학으로 갔다. 비국교도는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이제 사무엘은 국교도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국교회 안에는 사무엘을 도와줄 사람이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성적부진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일을 하는 근로 장학생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배고픔과 추위와 고독으로 고생 했지만 성실하게 공부해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같이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 제일 먼저 B.A. 학위를 얻었다. 옥스퍼드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그는 확고한 국교도가 되었다. 그는 1688년에 집사, 다음해에 장로의 성직 임명을 받았다.
사무엘은 1688년에 명망 높은 청교도 지도자인 아네슬리 박사의 25자녀 중에 막내딸 수산나와 결혼하였다. 사무엘은 런던의 올더크에이트에 있는 보톨프교회에서 부목사로 첫 목회를 시작하였으나 곧 해군군목으로 나갔다. 그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갓 결혼한 아내와 첫 아이 사무엘에 대한 그리움에 1년만에 군목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근처에서 부목사로 일하였다. 사무엘은 다시 1년 만에 부목사직을 그만두고 잉글랜드의 북쪽 링컨 주의 사우스옴스비 교구교회에 담임사제로 부임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며 이때부터 그가 72세세로 소천하기까지 44년 동안 북잉글랜드 링컨 주의 외진 동네 시골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사우스옴스비는 260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농촌 교구였다. 그는 이곳에서 5년간 목회하면서 다섯 아이를 낳고 총 여섯 아이를 낳아 그중 세 아이가 죽었다. 그는 작은 교구를 돌아보며 여유 있는 시간을 이용 저술에 힘썼고, 1694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무엘 목사는 사우스옴스비에서 5년간 목회를 마치고 1697년에 엡
존 웨슬리는 메도디즘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조부이다. 그는 바톨로뮤의 외아들로서 자신의 손자와 이름이 같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청도교 양육을 받으며 자랐고 특별히 신앙심이 깊어 항상 구원을 갈망하고 연구와 기도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소년 시절부터 영성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동양어와 신학을 전공하고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 후 아버지가 있는 차마우트 근처 웨이마우트에서 비국교도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해변가와 어촌 마을을 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는 안수 받지 않은 채로 1658년에 화이트처치 교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662년에 국교회로부터 강제 축출될 때까지 헌신적인 목회를 하였다. 하지만 그는 5마일 법령이 선포되어 투옥되고 42세의 나이에 젊은 아내와 3남 1녀의 자식을 두고 떠났다.
사무엘 아네슬리는 메도디즘의 어머니 수산나를 낳은 존 웨슬리의 외조부다. 그는 17세기 대표적 청도교 목사요 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15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갔고 1644년에 성직 안수를 받고 영국 해군 함대의 군목이 되었다. 1648년에 옥스퍼드대학에서 민법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국회의 초청으로 국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목받았다. 그는 설교에서 국왕을 비판하고 국왕 찰스 3세를 살해한 크롬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명성이 높아1657년에 성 바울 성당에서 매주일 설교하도록 임명되었다. 1662년에 왕정복고가 되었을 때에 그는 정책에 순응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신앙 양심과 참되고 거룩한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런던에서 가장 좋은 교구인 성 가일 교구교회의 목사직을 떠났다. 그는 1672년에 장로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1696년 죽을 때까지 목회하였다.
사무엘은 1662년 영국 남부 도체스터에서 아버지 존 웨슬리의 네 자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도체스터 트리니티 교구의 목사요 도체스터 지방의 대부로 알려진 존 화이트 목사의 딸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부친 존 웨슬리는 1662년 비국교도 성직자 2,000명이 대축출될 때 함께 축출되어 담임하던 화이트처치 교구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사무엘의 가족은 살 집도 없이 방랑생활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박해와 시련, 지독한 가난과 고독을 견디며 살아야했다. 그리고 그가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홀로 네 자녀를 길렀다. 그의 어머니는 비국교도들의 도움을 조금 받았지만 역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사명은 네 자녀에게 정통 기독교 신앙과 교육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다.
사무엘은 16세까지 도체스터의 비국교도 학교에 다녔으며, 18세까지는 런던의 에드워드 빌 비국교도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여기서는 그의 아버지의 스승인 존 오웬의 추천을 받아 런던의 명문 비국교도 학교인 스토크 뉴잉톤 아카데미에 갈 수 있었다. 사무엘은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이때 벌써 훌륭한 작품이 수심 편의 에세이와 시가 있었다.
사무엘은 21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신앙과 청지적인 입장에서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선조들이 오랫동안 충실히 지켜온 비국교도 신앙을 떠나서 국교도가 결정한 것이다. 더 이상 비국교도 학교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몇 시간을 걸어서 옥스퍼드 대학으로 갔다. 비국교도는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이제 사무엘은 국교도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국교회 안에는 사무엘을 도와줄 사람이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성적부진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일을 하는 근로 장학생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배고픔과 추위와 고독으로 고생 했지만 성실하게 공부해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같이 입학한 학생들 중에서 제일 먼저 B.A. 학위를 얻었다. 옥스퍼드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그는 확고한 국교도가 되었다. 그는 1688년에 집사, 다음해에 장로의 성직 임명을 받았다.
사무엘은 1688년에 명망 높은 청교도 지도자인 아네슬리 박사의 25자녀 중에 막내딸 수산나와 결혼하였다. 사무엘은 런던의 올더크에이트에 있는 보톨프교회에서 부목사로 첫 목회를 시작하였으나 곧 해군군목으로 나갔다. 그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갓 결혼한 아내와 첫 아이 사무엘에 대한 그리움에 1년만에 군목 생활을 정리하고 런던으로 근처에서 부목사로 일하였다. 사무엘은 다시 1년 만에 부목사직을 그만두고 잉글랜드의 북쪽 링컨 주의 사우스옴스비 교구교회에 담임사제로 부임하였다. 그의 나이 28세의 일이며 이때부터 그가 72세세로 소천하기까지 44년 동안 북잉글랜드 링컨 주의 외진 동네 시골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사우스옴스비는 260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농촌 교구였다. 그는 이곳에서 5년간 목회하면서 다섯 아이를 낳고 총 여섯 아이를 낳아 그중 세 아이가 죽었다. 그는 작은 교구를 돌아보며 여유 있는 시간을 이용 저술에 힘썼고, 1694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무엘 목사는 사우스옴스비에서 5년간 목회를 마치고 1697년에 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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