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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농지개혁(토지개혁)의 경제적 배경

Ⅱ. 농지개혁(토지개혁)의 과정
1. 남한에서의 토지 개혁
2. 북한의 토지 개혁

Ⅲ. 농지개혁(토지개혁)의 성격과 의의
1. 남한의 토지 개혁 성격과 의의
2. 북한의 토지 개혁 성격과 의의

Ⅳ. 농지개혁(토지개혁)의 평가
1. 농지개혁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2.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개혁을 완수하게 되는 것은, 대중의 동원을 통한 정당성 확보에 있다. 소련 진주군과 한국인 공산당지도자들은 45년 가을부터 소작료 3.7제 투쟁을 전개하여 식민지시기에 소작 쟁의 경험을 지니고 있는 농민들의 의식과 투쟁 경험을 고취시킨다. 소작제 변경을 요구하는 밑으로부터의 요구를 곧바로 토지 소유의 요구로 뒤바뀌었으며 이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토지 개혁의 정상성을 확보해 주었으며 이들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토지 개혁의 성공을 위하여 농민의 동원과 조직화를 내세웠는데, 이들은 그 당시 농촌의 민간 무장력이었던 농촌 자위대를 이용하여 공식 국가기구의 몇 배에 달하는 212,194명의 농촌 자치조직을 토지 개혁시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게 한다. 이 자위대는 혁명적 동원체제의 전형적인 초기 원형으로서 농민을 효율적으로 묶는 역할을 한다. 농민이 중심이 된 농촌 위원회는 토지 개혁의 추진 기관이 되었으며, 공산당 전 간부들은 지방으로 파견되어 토지 개혁을 조직화한다. 전국적으로 35만의 노동자가 토지 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동원되었으며 약 300만의 군중을 동원하여 토지 개혁을 전 사회의 동원화와 직접적으로 연계시킨다. 결론적으로 토지 개혁이라는 경제적 개혁은 그 의미를 넘어서 현재 북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동원체제를 등장시키게 되며 공산당의 하향 파견, 300만의 대중 동원, 농촌 위원회의 구성은 국가의 침투능력과 동원 능력을 결정적으로 높인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 동원을 통한 북한의 권력 형성 과정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Ⅳ. 농지개혁(토지개혁)의 평가
1. 농지개혁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농지개혁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것이 봉건적 토지소유를 해체시켰는가, 아니면 양적으로만 부분적으로 해체시켰을 뿐 그대로 존속시켰는가 하는 데 두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한국의 농지개혁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위로부터의 부르주아적 개혁으로서 반봉건적인 지주적 토지소유를 기본적으로 해체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확립시킨 것에 있다. 소작농이었던 농민들은 대부분 자작농화했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의 가능성이 열리기도 하였다.
또한 농지개혁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크게 촉진하였다. 소작료를 농민 계급이 차지하게 됨으로써 농가의 자녀교육확대에 의한 저렴한 임노동력 공급이 가능했으며, 농민에 대한 저곡가를 통한 수탈, 조세수탈과 인플레이션에 의한 수탈로 거둬들인 재원을 재벌들에게 특혜로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또 농지개혁은 지주계급이 가졌던 자본을 자본가계급이 가지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촉진하였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농지개혁 후 자본가계급으로 전신하는 데 실패하였지만 그들이 소유하던 토지자본은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어 그 뒤의 자본주의화에 밑거름이 된 것이다.
2.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
민족해방운동 전선에서 제시된 토지개혁안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반민족행위자의 모든 재산을 몰수, 국유화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에서는 그것이 실현되지 않았다. 더구나 농토를 제외한 과수원, 임야 등은 ‘개혁’의 대상에서 누락되어 일반 지주 소유지는 말할 것도 없고 반민족행위자의 소유지에도 소유권이 인정되어 후손에게 고스란히 유산으로 넘겨졌다. 예를 들면 이완용의 경우도 반민족행위로 확보한 막대한 토지자산이 후손에게 전해졌다.
이승만 정권의 농지개혁이 갖는 역사적 성격에 대해 지주적 개혁이었고 반봉건적 토지소유가 타협적으로 해소되었다고 보는 입장과, 부르주아적 개혁이어서 봉건적 토지소유가 해체되고 농민적 토지소유가 확보되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분명한 것은 유상몰수·유상분배여서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익 전선이 모두 지향했던 혁명적 개혁은 못되었다는 점이다. 지주 특히 중소지주의 산업부르주아로의 전환에도 실패했고, 분배농지의 매매금지조항이 한시적이어서 농민적 토지소유제의 완성에도 실패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권병탁(1993), 농지개혁의 긍정적 의의, 근현대사강좌 제3호
구로역사연구소(1993), 바로 보는 우리 역사, 거름
김일영(2001),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한울아카데미
농지개혁사편찬위원회(1970), 농지개혁사, 농림부농지국
박진도(1993), 농지개혁의 역사적 한계, 근현대사강좌 제3호
박석두(1993), 대한민국의 수립과 농지개혁, 쟁점 한국근현대사 제3호, 서울 한국근대사연구소
장상환(1993), 농지개혁과 한국자본주의 발전, 쟁점 한국근현대사 제3호, 서울 한국근대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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