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자표기의 발달/ 향찰,이두,구결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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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차자표기의 발달/ 향찰,이두,구결의 차이점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차례 -
1. 요약

2. 차자표기

3. 음차와 훈차

4. 이두

5. 향찰

6. 구결

7. 향찰, 이두,구결의 차이점

8. 현재 학교문법이나 일반적인 통설의 내용

9. 견해 및 감상

10. 참고문헌

본문내용

문법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국어 문법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하여 그 정도가 일정하지 않다. 이두문체의 이러한 특징은 그것이 문서체(文書體)에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이두문은 경기체가(景幾體歌)나 시조 또는 소설에서도 사용된 예가 있기는 하나 본격적인 문예문의 문체로까지는 발달하지 못하였다.
① 명사
進賜(나리/나으리)·件記(긔/ 물건의 이름을 열거한 목록)·告目(고목/상사람이 양반에게 올리는 글)·根脚(근각/신분 조사서)·題音(뎨김/소장이나 청원서에 내리는 관청의 판결문이나 지령문)·卜數(짐수/백성들이 부담한 수량)
② 대명사
吾(나/1인칭)·汝(너/2인칭)·矣身(의몸/제 자신)·他矣(남의, 져의/남의, 저 사람의)
③ 조사
亦(이)·是(이)·敎是(이시/존칭)·矣(의)·乙(을)·良中(아)·中(희)·亦中(여)·以(으로)·果(과, 와)·隱(은)·段·叱段·式(식)·乃(이나)·乙良(란)
④ 동사
望良(라-)·使內(리-)·進叱(낫드러)·當爲(당여)·依良(라)·除良(더러)·知遣(알고)·無去乙(업거늘)·別爲(별/특별한)
⑤ 어미
爲乎(온/한)·爲臥乎(누온/하는)·爲良(야)·餘良(남아)·爲遺(고)·爲乎矣(오/하되)·爲昆(곤)·爲去沙(하거,고야)·敎矣(이샤/-이시되)·爲有如可(잇다가/하였다가)·爲去等(거든)·爲去乃(거나)·爲齊(제)·爲如(다)
⑥ 부사
强亦(구틔여)·無亦(업스여/없이)·茂火(더브러)·粗也(아야라/겨우)·適音(마/마침)
ex ) 凡同姓是遣(범동성시견) - 무릇 성이 같고(이고) (대명률직해 中)
여기서 우리말 -이고를 한자 是遣로 썼으니 是는 뜻을 사용하고 遣은 음을 사용했습니다
향찰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국어 문장을 적은, 신라 시대에 발달한 국어 표기법으로 차자 표기법 가운데 가장 발달한 표기법이다. 가요(歌謠), 특히 향가(鄕歌)의 표기에 이용되었기 때문에 향기식 표기법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문장 전체를 적었다는 점에서 고유 명사 표기법과 한문 문장의 끝에 토로 쓰이던 이두(吏讀)와 구별하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향찰이 명사·동사·어미를 비롯한 국어 문장 전체를 표기했다고 해도 차자 방법은 의미부가 새김을, 형태부가 음을 빌려 오기 때문에 고유 명사 표기법이나 이두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향찰 표기는 전체 문장을 대상으로 우리말 표기를 시도한 것이지만 표기법이 복잡하였기 때문에 널리 실용적인 표기로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향찰이라는 명칭은 『균여전(均如傳)』(1075)에 실린 최행귀(崔行歸)의 역시(譯詩) 서문에 처음 나타난다. 이 서문은 균여대사(均如大師)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최행귀가 균여대사가 지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한시로 번역하면서 쓴 것으로, 여기에서의 향찰이라는 말은 신라어로 적은 문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당악(唐樂)에 대한 향악(鄕樂), 당언(唐言)에 대한 향언(鄕言), 당인(唐人)에 대한 향인(鄕人)의 경우와 같이 우리 고유의 것을 \'향(鄕)\'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당문(唐文)에 대해 상대적인 뜻으로 향찰(鄕札)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향찰로 표기된 향가를 보면 명사 동사를 비롯한 모든 우리말 노래가 한자의 새김과 음으로 표기되어 한자가 멋대로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중국인들은 해석 불가) 그러나 엄밀히 관찰하면 한자 차용 형식에 어떤 원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원칙적으로 의미 요소에 대하여는 훈차 즉 한자의 새김을, 형태 요소에 대하여는 음차 즉 한자의 음을 빌고 있다.
향찰 표기 체계의 확립 시기는 국어 구문에 맞도록 형태 요소인 접미사의 표기 방식을 창안하여 사용한 이상 의미 요소에까지 이를 확대시켜 전면적 표기를 시도하게 됨은 시기적으로 큰 간격을 두지 않았으리라는 점과 삼국유사의 향가가 거의 7~8세기의 작품들임에 비추어 이때는 향찰 문학의 전성기였다고 생각되므로 5~6세기를 전후하여 발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삼국유사의 향가 14수 중 5수가 신라 경덕왕대의 작품들로 이는 경덕왕의 한자식 지명 변경과 더불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사실은 이때 이미 한자음의 고정으로 향찰 표기 체계가 확립되고 따라서 지명 변경도 용이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6세기경에 발달한 향찰의 전면적 표기 방식은 한자음이 국어의 음은 체계에 맞게 고정되면서 더욱 널리 성행하여 7~8세기경에는 그 전성기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전면적 향찰 표기가 향가라는 노래의 창작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문자 생활의 비중이 무거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향찰 표기 체계와 관련하여 우리말 표기가 아닌 우리말 어순식의 한문체를 일찍이 창안하여 사용한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향찰이 구결이나 이두와는 달리 한문 또는 한자 어구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국어 문장을 표기하였다는 사실과 향가 문학의 발달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향찰은 국어를 표기하려는 노력의 집대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 君隱父也(군은부야) - 임금은 아버지야 (안민가 中)
君, 父 - 훈독 隱, 也 - 음독
善花公主主隱(선화공주주은) - 선화공주님은 (서동요 中)
善花公主, 隱 - 음독 主 - 훈독
구결
구결은 한문의 원전을 읽는데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한 수단으로 통사적 구조상 한문의 구절마다 토를 달아 우리말로 읽히는 차자 체계이다. 이에 대한 문헌적 기록으로는 신라의 설총이 방언으로 구령을 읽었다 하고 또는 우리나라 경서의 구결과 석의는 설총에서 비롯하여 고려의 정포은과 권근이 대성했다는 기록 외에도 그 원조를 설총으로 보는 기록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자 체계는 설총 개인이 만들었다기 보다 한문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문 문장을 그대로 두고 이를 우리 문장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읽는 방법을 모색하여 사용해 오던 것을, 설총이 이를 모아 정리하여 체계화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는 문자의 기원상 관습적인 원시 기호나 그림 문자 같은 것이 어느 개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님과 같은 것이다.
한문 문장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구절이 끝나는 곳에 끼워 넣던 우리말의 문법 요소.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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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16
  • 저작시기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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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35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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