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한성순보
2. 독립신문
3. 한성신보
4. 태서문예신보
5. 천희당시화
6. 서유견문
7. 해에게서 소년에게
8. 혈의 누
9. 天로역정
10. 금수회의록
11. 자유종
12. 무정
1. 한성순보
2. 독립신문
3. 한성신보
4. 태서문예신보
5. 천희당시화
6. 서유견문
7. 해에게서 소년에게
8. 혈의 누
9. 天로역정
10. 금수회의록
11. 자유종
12. 무정
본문내용
것은 서유견문을 참고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황성신문에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거나 약간의 문맥만 수정한 채 실은 논설들이 눈에 뛴다. 개화론을 언급할 경우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1898년 9월 23일자 논설은 다름 아니라 서유견문의 14편 개화의 등급의 핵심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처럼 황성신문의 논설이 서유견문의 본문을 거의 그대로 발췌한 것은 무엇보다 유길준의 개화사상이 오륜 혹은 인륜을 실천하는 행실의 개화를 기초로 삼고 시대적·지역적 상황을 참작하여 정치·법률 등의 제도와 기계·물품 등의 물질적 개화를 추진하려는 현실주의적 개혁론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시세와 처지를 중시하고 우리의 장점과 전통을 바탕으로 삼아 자주적으로 현실의 사정에 맞게 개화를 도모하자는 그의 주장은 갑오개혁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서유견문을 대본으로 쓰인 황성신문의 논설은 유학자 계층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에게 개화사상을 보급 발전시키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서유견문은 이승만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 하거나 저술하는 과정에서 좋은 참고자료로서 활용되었다. 실제로 이승만이 남긴 글들을 살펴보면, 서유견문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된다. 그가 옥중에서 대국신문에 기고한 1902년 8월 20일자 논설에 “지금의 개화세계라 말하면 의례히 구라파와 북미주로 알고 반개와 미개한 세계를 말하면 의례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주로 아느니”라는 부분은 서유견문의 미개·반개·개화 단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많은 예를 들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서유견문은 유길준의 일본 망명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이 책은 공식적으로 소학교학생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비록 그 출처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의 논설에 인용되었으며 이승만 등 지식인들에게도 탐독됨으로써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개화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해에게서 소년에게
(1)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많은 다른 논의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신체시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문학사적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에도 신체시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개화기 시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장르가 바로 신체시 혹은 신시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다. 신체시의 그 명칭에서 보듯이 이전의 시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스스로 표방하고 있다. ‘신체시’란 명칭은 일본 명치 연간 초에 동경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편찬한 『신체시초(新體詩抄)』에서 명치시가 명칭의 하나로 사용 되었던 용어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 명칭은 전통적으로 지속 되어왔던 시가와는 다른, 이른바 근대적 성격의 새로운 시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체시는 보다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자 한 의식적 노력의 산물인 이유로, 본격적 근대시로서의 성격보다는 거기에 이르기 위한 전단계적 이행기문학의 성격을 보다 많이 지닌 개화기 시가의 한 양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체시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와 이듬해 1909년에 발표 되었지만 작가가 1907년에 지은 것으로 밝힌 ‘구작삼편’ 및 ‘꽃두고’(1909), 이후 김억과 황석우의 몇몇 시작품과 주요한의 ‘불노리’(1919)가 발표되기 이전의 최남선과 이광수의 일련의 시편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윤병로(1996),「한국근현대문학사」,명문당,p58
(2) 최초의 신체시로서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 시가 우리 근대시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졌다. 하나는 한국 신체시를 대표하는 작품인 동시에 그 최초라는 생각이다. 다른 견해는 최남선이 1907년 지었다고 밝히고 1909년 발표한 ‘구작삼편(舊作三編)’이 최초가 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구작삼편’을 신체시의 기점으로 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근대적인 인쇄술이 도입된 이후의 작품은 활자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발표가 이루어진 것으로 손꼽힌다. 식민지 체계 안에서 우리 문학은 제작 발표의 제약, 규제가 가해진 상태로 발표시기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구작삼편’은 그러한 범주에 들지 않으며 발표 시기가 늦어진 것에 대해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또한 그 형식상에서도 후렴구가 있고 그 형태의 일부가 75조의 자수율로 이루어져 신체시라기보다는 창가의 형태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작삼편’을 최초의 신체시로 삼는다면 그 전의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이 더욱 가중 될 것이다.
어떤 성질이나 경향을 가진 첫 작품을 따지는 것은 자칫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그것이 갑자기 나타난다기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준비하여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신체시로 알려진 ‘해에게서 소년에게’ 또한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종래의 위상을 승계할 만한 작품이 달리 없는 것이 실정이며 논란의 풍파 속에서도 우리나라 근현대시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운명이라 하겠다. 조연현 해설신동욱 편(1982), 「崔南善과 李光洙의 문학」『<海에게서 少年에게>의 이해』,새문사,p26-28
권오만(2002),「한국근대시의 출발과 지향」,<육당 최남선과 그의 시대>,국학자료원,p174
(3) 형식적 측면에서의 문학사적 의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그 형식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우리 시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기존의 시의 34조,44조 등의 외형율을 깨뜨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형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의의를 갖게 되다.
우리 시가의 외형율의 양상은 가화기 시가의 선행인 개화가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다가 창가에서는 75조의 양상을 보이며 그 다음 단계인 신체시에 이르러서 새로운 율격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총 6연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여러 그 변화의 양상을 살펴보겠다.
텨……ㄹ썩, 텨……ㄹ썩,
황성신문에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거나 약간의 문맥만 수정한 채 실은 논설들이 눈에 뛴다. 개화론을 언급할 경우 가장 빈번히 인용되는 1898년 9월 23일자 논설은 다름 아니라 서유견문의 14편 개화의 등급의 핵심내용을 부분적으로 발췌해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처럼 황성신문의 논설이 서유견문의 본문을 거의 그대로 발췌한 것은 무엇보다 유길준의 개화사상이 오륜 혹은 인륜을 실천하는 행실의 개화를 기초로 삼고 시대적·지역적 상황을 참작하여 정치·법률 등의 제도와 기계·물품 등의 물질적 개화를 추진하려는 현실주의적 개혁론에 입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시세와 처지를 중시하고 우리의 장점과 전통을 바탕으로 삼아 자주적으로 현실의 사정에 맞게 개화를 도모하자는 그의 주장은 갑오개혁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서유견문을 대본으로 쓰인 황성신문의 논설은 유학자 계층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에게 개화사상을 보급 발전시키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서유견문은 이승만이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 하거나 저술하는 과정에서 좋은 참고자료로서 활용되었다. 실제로 이승만이 남긴 글들을 살펴보면, 서유견문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된다. 그가 옥중에서 대국신문에 기고한 1902년 8월 20일자 논설에 “지금의 개화세계라 말하면 의례히 구라파와 북미주로 알고 반개와 미개한 세계를 말하면 의례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주로 아느니”라는 부분은 서유견문의 미개·반개·개화 단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으로 많은 예를 들지 못한 한계는 있지만, 서유견문은 유길준의 일본 망명 이후에도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이 책은 공식적으로 소학교학생들의 교과서로 사용되었으며 비록 그 출처가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의 논설에 인용되었으며 이승만 등 지식인들에게도 탐독됨으로써 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개화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7. 해에게서 소년에게
(1)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많은 다른 논의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신체시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문학사적 측면에서 고려해 볼 때에도 신체시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하겠다. 개화기 시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이는 장르가 바로 신체시 혹은 신시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이다. 신체시의 그 명칭에서 보듯이 이전의 시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음을 스스로 표방하고 있다. ‘신체시’란 명칭은 일본 명치 연간 초에 동경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편찬한 『신체시초(新體詩抄)』에서 명치시가 명칭의 하나로 사용 되었던 용어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 명칭은 전통적으로 지속 되어왔던 시가와는 다른, 이른바 근대적 성격의 새로운 시 개념으로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체시는 보다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자 한 의식적 노력의 산물인 이유로, 본격적 근대시로서의 성격보다는 거기에 이르기 위한 전단계적 이행기문학의 성격을 보다 많이 지닌 개화기 시가의 한 양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체시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와 이듬해 1909년에 발표 되었지만 작가가 1907년에 지은 것으로 밝힌 ‘구작삼편’ 및 ‘꽃두고’(1909), 이후 김억과 황석우의 몇몇 시작품과 주요한의 ‘불노리’(1919)가 발표되기 이전의 최남선과 이광수의 일련의 시편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윤병로(1996),「한국근현대문학사」,명문당,p58
(2) 최초의 신체시로서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 시가 우리 근대시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졌다. 하나는 한국 신체시를 대표하는 작품인 동시에 그 최초라는 생각이다. 다른 견해는 최남선이 1907년 지었다고 밝히고 1909년 발표한 ‘구작삼편(舊作三編)’이 최초가 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구작삼편’을 신체시의 기점으로 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근대적인 인쇄술이 도입된 이후의 작품은 활자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발표가 이루어진 것으로 손꼽힌다. 식민지 체계 안에서 우리 문학은 제작 발표의 제약, 규제가 가해진 상태로 발표시기가 불분명한 작품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구작삼편’은 그러한 범주에 들지 않으며 발표 시기가 늦어진 것에 대해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또한 그 형식상에서도 후렴구가 있고 그 형태의 일부가 75조의 자수율로 이루어져 신체시라기보다는 창가의 형태에 더욱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구작삼편’을 최초의 신체시로 삼는다면 그 전의 유사 작품들과의 차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논란이 더욱 가중 될 것이다.
어떤 성질이나 경향을 가진 첫 작품을 따지는 것은 자칫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그것이 갑자기 나타난다기보다는 긴 시간에 걸쳐 서서히 준비하여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신체시로 알려진 ‘해에게서 소년에게’ 또한 많은 논란들이 있지만 종래의 위상을 승계할 만한 작품이 달리 없는 것이 실정이며 논란의 풍파 속에서도 우리나라 근현대시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운명이라 하겠다. 조연현 해설신동욱 편(1982), 「崔南善과 李光洙의 문학」『<海에게서 少年에게>의 이해』,새문사,p26-28
권오만(2002),「한국근대시의 출발과 지향」,<육당 최남선과 그의 시대>,국학자료원,p174
(3) 형식적 측면에서의 문학사적 의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그 형식적인 면에서도 기존의 우리 시가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기존의 시의 34조,44조 등의 외형율을 깨뜨리고 완전히 자유로운 형식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의의를 갖게 되다.
우리 시가의 외형율의 양상은 가화기 시가의 선행인 개화가사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다가 창가에서는 75조의 양상을 보이며 그 다음 단계인 신체시에 이르러서 새로운 율격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총 6연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부분적으로 인용하여 여러 그 변화의 양상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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