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洋務運動)의 전개와 그 한계 : -양무파의 등장과 근대화 산업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전개와 그 한계 : -양무파의 등장과 근대화 산업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양무운동의 전개
1. 양무운동의 배경과 전개
2. 양무파의 등장
3. 양무파의 사상적 기반

Ⅲ. 양무운동의 내용
1. 군수산업의 육성
2. 해군의 창설
3. 근대기업의 설립
4. 관독상판(官督商辦) 경영
5. 근대 교육의 실시

Ⅳ. 양무운동의 성격 및 한계
1. 양무운동의 성격
2. 양무운동의 실패와 그 원인
3. 중국 민족자본주의 발생
4.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의 태동

Ⅴ. 마치며

본문내용

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회군은 상해지역의 풍부한 자금원을 바탕으로 하여 급성장하여 증국번의 상군 다음가는 군사집단을 이루었고, 태평청국의 진압과 함께 상군이 해체된 이후, 사실상 청조의 주력군으로 자리 잡았다. 회군의 세력을 바탕으로 이홍장은 1870년 증국번의 뒤를 이어 직예총독에 임명된 이래, 청일전쟁의 패배로 사임할 때까지 줄곧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는 지방관의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북양대신으로서 대외교섭을 사실상 전담하였으며, 양무운동시기에 설립된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의 후원이나 직접적인 지원에 의해 설립되었다. 朴赫淳, 앞의 책, pp.169~172.
3. 양무파의 사상적 기반
서양문물의 수용이 확대됨에 따라 이를 중국의 전통적 가치체제, 사상과 관련시키려는 사상적 지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양무를 주장한 증국번은 서양인의 기술은 중국에게도 있다는 생각 아래 서양인의 장기는 대포만드는 기술과 윤선(輪船)만드는 일이므로 중국이 배워야할 것은 이것이라고 하였다. 이홍장 또한 서양의 장기(長技)는 대포와 배 만드는 기술이고 제도와 문물은 중국이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양무파의 지도사상은 즉 양무운동의 기본 강령은 ‘中學爲體와 西學爲用’이었다. 이러한 사상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이 풍계분(馮桂芬)으로 그는 1861년에 쓴 『교빈려항의(校廬抗議)』에서 인재의 등용, 자원의 개발, 군신의 회통(會通). 명실(名實)의 부합 등에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개혁의 원리는 ‘복고(復古)’에 의해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양의 장기(長技)를 배워 그들을 제압한다는 위원의 주장을 비판하며 중국에 부족한 ‘선견포리(船堅砲利)’를 서양에서 구해야 할 뿐, ‘중국의 윤상명교(倫尙名敎)를 원본으로 삼고 서양제국의 부강한 기술로서 이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한 복고는 과거로의 복귀라기보다는 복귀해야 할 것을 가려낸 연후에, 그 고(古)에로 복귀한다는 의미로서 삼대성인(三大聖人)의 법도내에서의 개혁을 의도한 개념이다. 즉, 그는 ‘황상(皇上)’이 기강을 쇄신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고 있다. 朴赫淳, 앞의 책, p.195.
뒤이어 설복성(薛福成) 설복성의 경우에는 이러한 체(體), 용(用)의 관념은 등량(等量) 개념으로 진화시켜 도덕, 충효, 시서(詩書)를 체로 규정하고, 시세(時勢)와 기수(器數), 수륙(水陸)의 군사, 중외(中外)의 언어에 밝은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여 체와 용을 아울러 겸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 왕도(王韜) 등도 모두 이와 비슷한 사상을 이야기하였는데 왕도의 경우 “기(器)는 서국(西國)에서 취하고 도(道)는 스스로의 것으로서 하니 만세토록 불변한 것은 공자의 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880~90년대에 이르러 「중체서용(中體西用)」이란 말은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그 의미도 더욱 명확하여 졌다. 예를 들면 정관응(鄭觀應)은『성세위언(盛世危言)』「서학편(西學篇)」에서 ‘中學은 그 體이며 西學은 그 末이니 中學으로서 主하고 西學으로서 輔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비로서 『만국공보(萬國公報)』의 편자인 심수경(沈壽庚)이 처음으로 ‘중학위체 서학위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1898년 5월 장지동은 「권학편(勸學篇)」에서 ‘구학위체(舊學爲體), 신학위용(新學爲用)’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양무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서양의 발전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 이해하지를 못하였다. 때문에 양무(自强)운동을 전개하는데에 있어서도 내치(內治) 즉 기강을 바로잡고 정교(政敎)를 일으키는 것을 앞에 내세우고, 양무를 그 다음으로 보는 주장이었다. 과거 북경조약체결 이후에 나타난 현실을 목도(目睹)하고, 또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서양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야 한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양무 바람이 일어났으나 그 내용은 서양을 이기기 위한 해방이 중심이었다. 이어서 풍계분은 「采西學」에서 서양의 장기만이 아니라 서양의 좋은 법도 배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辛勝夏, 앞의 책, pp.169~170.
Ⅲ. 양무운동의 내용
1. 군수산업의 육성
청조의 관료들은 서양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영국, 프랑스 등의 외국인 교관을 초빙하여 중국군대를 훈련시켰고, 군사지식을 습득하기 위하여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선에서 필요한 각종 화약과 총탄, 총포류를 직접 생산하여 공급하고자 군수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1861년 증국번에 의해 ‘안경내군계소(安慶內軍械所)’, 1862년 이홍장에 의해 ‘상해양포국(上海洋砲局)’, ‘소주양포국(蘇州洋砲局)’ 등의 소규모 군수공장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1865년 이홍장에 의해 ‘강남제조총국(江南製造總局)’ 이홍장은 미국계 양행인 기기철공창(機器鐵工廠)을 매입한 후 상해양포국과 소주양포국을 병합하여 상해에 강남제조총국을 설립했다. 초기의 설비는 소형 증기기관과 50여명의 노동자, 3인의 서양인 기술자가 근무하는 소규모였으나 강해관(江海關)의 이성양세(二成洋稅)를 조선경비로 충당하고, 상해의 근교로 이전 확장하였다. 이후 강남제조총국의 규모는 꾸준히 확대되어 중국최대의 군수공장으로 자리 잡았고, 각종 기기공장뿐 아니라 번역관도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군수품은 총포 외 수뢰 탄약류, 군함과 각종 철강재 등이 있었다.
이 설립됨으로써 본격적인 군수공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게 된다.
강남제조총국에서 생산된 초기의 무기는 영국 등의 무기의 모방 제조, 서양인 기사의 고용을 통한 구형 무기의 제조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신형무기의 제조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군함을 제조하였는데, 1865년 서수(徐壽), 화형방(華芳)이 주축이 되어 외국선박을 모방하여 시험 제조한 ‘염길호(恬吉號)’를 서두로 하여 이후 1885년까지 대형 8척, 소형 7척의 선박이 건조되었다. 다만 선박 건조시 대부분의 부품과 엔진이 외국에서 수입되어 조립되었고, 이들 선박이 대부분 목선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해군의 주력으로 사용되기에는 부족하였으며 건조비용 또한 막대하였기 때문에 선박제조는 1885년 이후 중단되었다.
1866년 좌종당은 프랑스인 지

추천자료

  • 가격3,5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9.09.04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121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