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란 무엇인가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실크로드란 무엇인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실크로드란 무엇인가

2. 실크로드의 실태

3. 고대의 동서문화교류

4. 서역개통

5. 서역제국과 불교의 전래

6. 당대의 동서문화교류

7. 아랍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실크로드

8. 10~12세기의 실크로드

9. 팍스 몽골리카

본문내용

박트리아인은 점차 서북인도에 촉수를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248년 경, 박트리아의 서쪽에 이란계의 파르티아(Parthia)왕국이 독립하는 데 이 나라는 이란인이 그리이스세력을 완전히 쫓아내고 순이란문화를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박트리아와 그리이스 본국과의 연락은 파르티아의 출현으로 불가능하게 되지만, 이 이후 박트리아는 점차 힌두쿠쉬 남쪽으로 진출하여 카불(Kabul)에서 펀잡(Punjab)지방으로 세력을 뻗어 나갔다. 박트리아의 힌두쿠쉬 산맥 남부지방으로의 진출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의 남방원정이었다. 헬레니즘이 카불강변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이 시대(기원전 190년경) 이후의 일이다. 이리하여 박트리아는 힌두쿠쉬 산맥 남부와 북부에 영토가 미치는 극성기를 현출하지만, 마침내 기원전 174년 경 데메트리우스가 없는 허점을 틈타 본국에서 에우크라티데스(Eukratides)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에 따라 박트리아의 왕통은 둘로 분열되어 양자간에 장기간에 걸친 항쟁이 계속되다가 결국 기원전 160년경 데메트리우스는 에우크라티데스 때문에 살해되고 만다. 그러나 에우크라티데스도 곧 그의 아들 아폴로도투스(Appolodotus)에게 암살되고, 아폴로도투스 역시 형제인 헬리오클레스(Heliocles)에게 살해되고 만다.
박트리아의 이러한 쇠퇴는 서쪽의 파르티아와 북쪽의 스키타이족의 강세를 가져왔다. 스트라본(Strabon)에 따르면 박트리아는 결국 아시오이(Asioi), 파시아노이(Pasianoi), 토카로이(Tokharoi), 사카라울로이(Sacarauloi) 등 스키타이족의 남하로 말미암아 멸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트리아의 그리이스인은 이미 데메트리우스시대부터 속속 힌두쿠쉬 산맥 남부의 간다라 지방으로 이주하고 있어 오히려 이 지방에서 새로이 일어난 불교와 만남으로써 아시아문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그리이스인들은 간다라지방으로 와서 불교와 접촉했을 때에도 우상과 신전이 없는 이 종교에 대하여 한없는 불만을 품었다. 이 새로운 종교를 위하여 공예가들은 다투어 불상을 만들고 건축가는 장엄하고 화려한 신전을 쌓았다. 이렇게하여 화려한 간다라불교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불교가 퍼져나감에 따라 그리이스예술의 요소를 다분히 가A신전을는 불교예술이 찬연하게 빛을 내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쿠차(K는 ha), 투르판(Turfan), 호탄(Khotan), 니야(에 ya), 미란(앍 ran)을 을 을 을중국의돈황, 운강, 용문, 그리고 일본의 호류지(法隆寺:법륭사) 와 쇼소인(正倉院:정창원)에서 향기높은 그리이스 미술의 편린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림 3-4 비단 드레스를 입은 로마 여인


제4장 서역개통
제1절 장건의 서역대장정
전국시대에 흥기한 흉노는 한초에 이르러 대부분의 서역제국을 그 통치하에 두었다. 기원전 209년 흉노는 冒頓單于(모돈선우)가 등극한 후 국력이 급속히 강화되어 대부분의 주변 제민족을 복속시켰고 남으로 중국을 압박해서 황하연안까지 진출해서 한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흉노의 존재는 한에 대해 일대 위협이 아닐 수 없었고 한초 60년간 국력회복을 위해 한은 흉노에 대해 화친책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100만의 유능한 기마정예병을 보유하고 있는 흉노는 한의 화친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한의 변방을 침범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치하의 서역제국에 막대한 공물과 납세를 강요하는 등 횡포를 자행함으로써 한의 안전을 각방에서 위협하고 한과 서역제국간의 내왕도 방해했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B.C.140-87)의 등극으로 한과 흉노와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약관 16세에 등극한 그는 흉노의 부단한 침범에 의분을 표시하면서 선왕들이 못다한 유업을 달성하기 위해 대흉노강경책을 취하게 되었다. 그가 등극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의 한 투항자로부터 흉노에 의해 멀리 서북방으로 쫓겨간 대월씨가 흉노에 대한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대월씨와 함께 흉노를 동서로 협공할 의중을 굳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월씨와의 동맹결성을 위해 당시 郎位(낭위)의 지위에 있던 長騫(장건)을 기원전 138년 대월씨에 사신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장건은 수행원감부(甘父)와 함께 100여명을 인솔하고 장안을 떠나 오늘날의 甘肅省(감숙성)에 이르렀을 때 더 서진하지 못하고 이미 이 지방까지 남하한 흉노군에 체포되어 흉노에 압송되었다. 그는 흉노에서 흉노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보고 10년간을 보내던 중 기회가 생겨 감부, 처와 함께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寤寐不忘(오매불망)하던 그는 서쪽으로 수십일 걸어 드디어 大宛(대원), 康居(강거), 대월씨(大月氏)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망을 안고 찾아간 대월씨의 정세에는 그간 변화가 일어났다. 신왕이 나타나 대하(大夏)를 병합하고 오손(烏孫)을 피하여 이리강(Ili 강)으로부터 멀리 서투르키스탄지역으로 서천하여 국태민안의 성기를 맞아 흉노에 대한 공격의향을 이미 포기하고 말았다. 실망한 장건은 대월씨를 떠나 大夏에서 1년간 체류하다가 기원전 128년 천산남로를 따라 귀국길에 올랐으나 도중 또다시 흉노에게 재차 체포되어 1년간 다시 구류되었다. 그가 구류된 기간 흉노선우의 죽음을 계기로 발생한 내란을 틈타 도주하여 기원전 126년 드디어 장안에 돌아왔다.

그림 4-1 장건의 제 1차 서역 사행로
곡절많은 장건의 사행은 전후 13년간이나 걸렸으며 살아남아 귀향한 사람은 그와 수행원 감부 한 사람뿐이었다. 무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봉하고 감부에게는 봉사군(奉使君)이란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장건의 제1차 서역사행이다. 장건의 제1차 사행은 비록 대흉노 공수동맹 결성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璿▼이 사행을 통해 흉노를 비롯한 관한 정보와 지식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견
  • 가격3,000
  • 페이지수48페이지
  • 등록일2009.10.20
  • 저작시기2008.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753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