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Vincent
2.어린 빈센트
3.고통과 미술
4.화가로서의 빈센트, 그리고 밀레
5.새로운 충격, 인상파와 일본판화
6.빈센트의 귀
7.다시 밀레로
8.오늘
2.어린 빈센트
3.고통과 미술
4.화가로서의 빈센트, 그리고 밀레
5.새로운 충격, 인상파와 일본판화
6.빈센트의 귀
7.다시 밀레로
8.오늘
본문내용
. 어쨌든 고갱은 이 그림을 그려준 후 아를을 떠나고자 했는데 고갱의 이야기를 따르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칼을 든 빈센트가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내가 노려보자 그는 멈추고 집으로 달아났다. 박홍규1, p.232
하지만 이는 고갱에 의한 말이므로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건 그날(88년 12월 23일) 밤 11시반, 빈센트가 한 창녀에게 신문지에 싼 자신의 잘린 귀를 잘 맡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지방 일간지<르 포롬 레퓌블리캉>에 실렸는데
지난 일요일 밤 11시 30분경, 빈센트 반 고흐라는 네덜란드인 화가가 1번 사창가에 나타나 라셀이라는 여급을 불러 자기 귀를 건네주며 “소중히 간직하시오”라고 이야기한 후 사라져버렸다. 형편없는 미치광이의 소행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런 내용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다음날 아침 그 사람을 찾아나섰다.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자기 침대에서 발견되어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Hulsker, Vincent and Theo, p.322
빈센트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길이 없는데 한가지 가설을 들자면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완전이 알고 있는 가운데 의도적으로 했동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실제로 측두엽 발작을 일으킨 환자는 의식이 거의 없는데 빈센트의 경우에도 깨어나 보니 상처가 나 있어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매울 놀라고 당황했다고 하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못했다. 캐슬린 에릭슨 지음, 안진이 역,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청림출판, 2008
빈센트는 퇴원하여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 때 그린 그림이 <귀에 붕대감은 자화상>인데 이 그림은 상당이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단호하고 결의에 찬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정신적인 불안에 시달려 시립병원에 수용되었다. 노란집은 폐쇄되고 아를의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며 두려워했다. 그곳에서 빈센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허락받았다.
7.다시 밀레로
처음 파리 시절 인상파에 심취했던 그는 밀레에 대한 관심이 식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를로 이주하면서 다시 밀레는 그에게 유일한 스승과 같은 역할을 했다. 고갱이 아를로 오기 전부터 밀레의 그림을 다시 모사하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듯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빈센트는 특히 보리밭을 사랑하여 강렬한 색채로 대지를 바다와 같이 표현했다. 당시 그는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 화가를 경멸했고 대지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화가를 바보로 보았다. 박홍규2, p.162
생레미에 입원한 후에 그는 밀레에 대해 더욱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1889년 9월 15일부터 밀레의 <들일> 연작 10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밀레 작품의 흑백 복사 판화를 보고 자신의 색채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밀레의 이 연작은 1852년에 그려졌다. 빈센트가 과거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것도 이 때 나타났으며 동생과 어머니에게 과거의 자신의 스케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밀레에 대한 그의 고집은 한 때 인상파에 대한 관심을 접고 밀레 이후 미술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까지 생각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오오, 밀레, 밀레! 인간이든 숭고한 존재이든 그가 그린 것은 얼마나 친숙하고 엄숙한가. 그런데 이 시대를 생각해보라. 밀레는 눈물을 흘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토와 안젤리코는 무릎을 꿇고 간원하면서 그림을 그렸다.-들라크루아는 슬픔에 젖어 감정에 북받쳐(...)미소를 흘릴 정도였다. 우리 인상파 화가들도 그래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생활에 쫓겨 타락한 것은 아닌가? (...) ‘혁명의 숨결에 빼앗긴 혼은 되돌릴 수 없다.’-이는 옛날 어떤 시인이 절규한 말이나, 그는 우리의 허약함, 병폐, 일탈을 예견한 듯 하다.
밀레는 오두막에 살면서 오직 교만과 기행(奇行)과는 무관한 사람들과 함께 지낸 모범을 보여주었다. 제멋대로의 정열보다도 도리어 오직 약간의 예지를 갖는 것, 그 외에는 불필요하다. (1890년 2월 20일의 편지) 박홍규2, p.190
이렇듯 빈센트는 밀레와 인상파 이전 시대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셍레미에서의 밀폐된 생활은 그에게 창조의 불을 지폈다. 1889년 5월 8일부터 다음해 5월 16일 까지 1년 동안 15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거의 이틀에 하나 꼴로 그림을 완성했던 샘인데 정신의 병은 깊어 갔으나 그 것에 대해 투쟁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생레미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간질 발작 환자들을 알게 되면서 큰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남들 말 처럼 미치광이가 아닌 단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두렵고 힘든 싸움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그 시절 그가 그렸던 밀레의 연작들을 보자면 <반달낫으로 베는 사람>을 들 수 있겠다. 밀레의 <들일> 연작 중 첫 작품인 이 그림은 밀레의 그림에 비해 얼굴이 크게 묘사되어있고 전체적으로 매우 거칠게 표현되어 너절한 농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큰 낫으로 베는 사람>은 밀레의 연작 모사 중에 가장 원작을 충실하게 본뜬 것이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 한 빈센트의 필치나 강렬한 색감은 변형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원작보다 더 크게 묘사된 인물은 마치 쓰러질 것만 같은 몸뚱아리를 길쭉한 낫자루로 받치고 있는 듯 하고 색감은 강한 빛에 탈색된 것 같아 보인다. 또한 흥미로운 작품은 <보릿단을 묶는 사람>인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빈센트의 모작에서는 인물의 옷이 파란색으로 표현되어 보리밭의 어두운 노란색과 대비된다. 특히나 재밌는 부분은 원작에서도 느껴지는 농부의 역동적인 자세인데 빈센트 특유의 스멀거리는 터치와 어우러져 인물자체가 보릿단 속에 파고들어가는 느낌이다. 빈센트는 주로 원작인 아닌 흑백의 판화를 보고 그림을 그렸는데 <양털을 깍는 사람들>같은 경우에는 그 색채적인 효과는 반감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유화의 원작을 보지 못한 결과로 오히려 이러한 색채의 빈곤은 그림 전체의 황량한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도움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칼을 든 빈센트가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내가 노려보자 그는 멈추고 집으로 달아났다. 박홍규1, p.232
하지만 이는 고갱에 의한 말이므로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건 그날(88년 12월 23일) 밤 11시반, 빈센트가 한 창녀에게 신문지에 싼 자신의 잘린 귀를 잘 맡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지방 일간지<르 포롬 레퓌블리캉>에 실렸는데
지난 일요일 밤 11시 30분경, 빈센트 반 고흐라는 네덜란드인 화가가 1번 사창가에 나타나 라셀이라는 여급을 불러 자기 귀를 건네주며 “소중히 간직하시오”라고 이야기한 후 사라져버렸다. 형편없는 미치광이의 소행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이런 내용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다음날 아침 그 사람을 찾아나섰다.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로 자기 침대에서 발견되어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다. Hulsker, Vincent and Theo, p.322
빈센트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 길이 없는데 한가지 가설을 들자면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완전이 알고 있는 가운데 의도적으로 했동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실제로 측두엽 발작을 일으킨 환자는 의식이 거의 없는데 빈센트의 경우에도 깨어나 보니 상처가 나 있어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매울 놀라고 당황했다고 하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도 못했다. 캐슬린 에릭슨 지음, 안진이 역, <영혼의 순례자 반 고흐>, 청림출판, 2008
빈센트는 퇴원하여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 때 그린 그림이 <귀에 붕대감은 자화상>인데 이 그림은 상당이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단호하고 결의에 찬 모습을 표현하였는데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정신적인 불안에 시달려 시립병원에 수용되었다. 노란집은 폐쇄되고 아를의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며 두려워했다. 그곳에서 빈센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허락받았다.
7.다시 밀레로
처음 파리 시절 인상파에 심취했던 그는 밀레에 대한 관심이 식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를로 이주하면서 다시 밀레는 그에게 유일한 스승과 같은 역할을 했다. 고갱이 아를로 오기 전부터 밀레의 그림을 다시 모사하고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듯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빈센트는 특히 보리밭을 사랑하여 강렬한 색채로 대지를 바다와 같이 표현했다. 당시 그는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 화가를 경멸했고 대지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화가를 바보로 보았다. 박홍규2, p.162
생레미에 입원한 후에 그는 밀레에 대해 더욱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1889년 9월 15일부터 밀레의 <들일> 연작 10점을 그리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밀레 작품의 흑백 복사 판화를 보고 자신의 색채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밀레의 이 연작은 1852년에 그려졌다. 빈센트가 과거에 그린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것도 이 때 나타났으며 동생과 어머니에게 과거의 자신의 스케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밀레에 대한 그의 고집은 한 때 인상파에 대한 관심을 접고 밀레 이후 미술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까지 생각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오오, 밀레, 밀레! 인간이든 숭고한 존재이든 그가 그린 것은 얼마나 친숙하고 엄숙한가. 그런데 이 시대를 생각해보라. 밀레는 눈물을 흘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토와 안젤리코는 무릎을 꿇고 간원하면서 그림을 그렸다.-들라크루아는 슬픔에 젖어 감정에 북받쳐(...)미소를 흘릴 정도였다. 우리 인상파 화가들도 그래야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생활에 쫓겨 타락한 것은 아닌가? (...) ‘혁명의 숨결에 빼앗긴 혼은 되돌릴 수 없다.’-이는 옛날 어떤 시인이 절규한 말이나, 그는 우리의 허약함, 병폐, 일탈을 예견한 듯 하다.
밀레는 오두막에 살면서 오직 교만과 기행(奇行)과는 무관한 사람들과 함께 지낸 모범을 보여주었다. 제멋대로의 정열보다도 도리어 오직 약간의 예지를 갖는 것, 그 외에는 불필요하다. (1890년 2월 20일의 편지) 박홍규2, p.190
이렇듯 빈센트는 밀레와 인상파 이전 시대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셍레미에서의 밀폐된 생활은 그에게 창조의 불을 지폈다. 1889년 5월 8일부터 다음해 5월 16일 까지 1년 동안 15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거의 이틀에 하나 꼴로 그림을 완성했던 샘인데 정신의 병은 깊어 갔으나 그 것에 대해 투쟁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생레미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간질 발작 환자들을 알게 되면서 큰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남들 말 처럼 미치광이가 아닌 단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두렵고 힘든 싸움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그 시절 그가 그렸던 밀레의 연작들을 보자면 <반달낫으로 베는 사람>을 들 수 있겠다. 밀레의 <들일> 연작 중 첫 작품인 이 그림은 밀레의 그림에 비해 얼굴이 크게 묘사되어있고 전체적으로 매우 거칠게 표현되어 너절한 농민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큰 낫으로 베는 사람>은 밀레의 연작 모사 중에 가장 원작을 충실하게 본뜬 것이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 한 빈센트의 필치나 강렬한 색감은 변형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원작보다 더 크게 묘사된 인물은 마치 쓰러질 것만 같은 몸뚱아리를 길쭉한 낫자루로 받치고 있는 듯 하고 색감은 강한 빛에 탈색된 것 같아 보인다. 또한 흥미로운 작품은 <보릿단을 묶는 사람>인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빈센트의 모작에서는 인물의 옷이 파란색으로 표현되어 보리밭의 어두운 노란색과 대비된다. 특히나 재밌는 부분은 원작에서도 느껴지는 농부의 역동적인 자세인데 빈센트 특유의 스멀거리는 터치와 어우러져 인물자체가 보릿단 속에 파고들어가는 느낌이다. 빈센트는 주로 원작인 아닌 흑백의 판화를 보고 그림을 그렸는데 <양털을 깍는 사람들>같은 경우에는 그 색채적인 효과는 반감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유화의 원작을 보지 못한 결과로 오히려 이러한 색채의 빈곤은 그림 전체의 황량한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도움이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