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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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과정

●활동

●귀국

●임시정부 유적지

본문내용

하였고, 중국 중앙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제스(蔣介石)와 그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임정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와 각계 요인 2백 명을 초청하여 환송회를 개최해 주었다.
귀국후 임시정부는 서울특별시에 자리잡았으며 김구의 경교장을 청사로 활용하였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를 중심으로 임정법통론이 제기되었다. 임시정부는 북한의 고위 관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공작대원들을 파견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임정 정치공작대원 김정의·최기성 등을 파견해 최용건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집을 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이 "실세"로 그대로 남았고, 임시정부의 통일노선이 제1공화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계승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임시정부 유적지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는 1919년부터 1932년까지 13년간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은 머물렀던 곳이다. 임정은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군을 피해 항저우를 비롯한 중국 6개의 도시를 유랑하다 일제 말기인 40년에는 충칭으로 이전하였다.
상하이 유적지는 마땅루 306농4호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티엔디(新天地)와 가까워 이곳에서 걸어가면 된다. 오래된 건물이 붙어 있는 건물에서 1층과 2층에 유물을 전시하고, 비디오를 보며, 설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 내부에는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태극기 등의 유물, 백범 김구의 집무실, 각 부처의 집무실 등이 있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이동을 하였다.
☞상하이(上海, 상해): 1919년 4월~ 1932년 5월
☞항저우(杭州, 항주): 1932년 5월 ~ 1932년 10월
☞전장(鎭江): 1932년 10월 ~ 1932년 11월
☞난징(南京, 남경): 1932년 11월~1937년 11월
☞(피난) 자싱(嘉興, 가흥): 1935년 10월~1936년 2월
☞창사(長沙, 장사): 1937년 12월~1938년 7월
☞광저우(廣州, 광주): 1938년 7월~1938년 11월
☞류저우(柳州): 1938년 11월~1939년 5월
☞치장(江): 1939년 5월~ 1940년 9월
☞충칭(重慶, 중경): 1940년 9월 ~ 1945년 11월
위의 유적지 중 임시정부 유적지가 복원된 곳은 상하이, 항저우, 충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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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19
  • 저작시기2009.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8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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