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문학사 이해의 새로운 관점
2. 첫째 시대:원시문학
3. 둘째 시대:고대문학
4. 셋째 시대:중세전기문학 제1기·삼국 남북국시대
5. 셋째 시대:중세전기문학 제2기·고려 전기
6. 넷째 시대:중세후기문학 제1기·고려 후기
7. 넷째 시대:중세후기문학 제2기·조선 전기
8. 다섯째 시대: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조선 후기(1), (2)
9. 다섯째 시대: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2기·1860~1910년
2. 첫째 시대:원시문학
3. 둘째 시대:고대문학
4. 셋째 시대:중세전기문학 제1기·삼국 남북국시대
5. 셋째 시대:중세전기문학 제2기·고려 전기
6. 넷째 시대:중세후기문학 제1기·고려 후기
7. 넷째 시대:중세후기문학 제2기·조선 전기
8. 다섯째 시대: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1기·조선 후기(1), (2)
9. 다섯째 시대: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제2기·1860~1910년
본문내용
함께 제시하고 있는 점에서 두 노래는 무척 대조적이다.
- 소악부는 한시이면서도 우리말 노래, 특히 민요의 진솔한 사연을 담으려 했기에 주목된다. 한시와 우리말 내로가 공존하는 것이 중세문학의 특징이라 했는데,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는 둘을 서로 접근시키려는 방안의 하나로 소악부를 창안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말 노래가 한시와 같은 격조를 갖출 수 있는 시조를 만들어 냈다. 소악부는 한시가 민족문학으로서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기에 이때 이루어진 모형이 게속 중요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단한 융성을 보게 되었다.
6.7. 설화, 무가, 연극의 양상
- 연극의 주류는 민간연극이고 하층연극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사회적인 장벽을 무너뜨리고 누구나 함께 어울려 즐거워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민간연극의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6.8.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형성
- <한림별곡>에서 시작된 경기체가는 유식한 문인이 창작한 것이며,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점에서 서정시가 아니라 교술시라 해야 할 새로운 갈래이다.
- <한림별곡>이 나온 지 한 세기 정도 지나서 안축이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었다. 안축의 작품은 여럿이 돌림노래로 짓지 않고 혼자서 창작할 수 있는 경기체가의 첫 예라는 점에서 소중할 뿐만 아니라, 신흥사대부가 경기체가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표현한 명백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신흥사대부들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또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기철학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고, 밖에서 들어온 학설이 적절하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에게는 경기체가와 같은 교술시와 함께 시조와 같은 서정시도 필요했다. 시조는 경기체가에 이어서 나왔고 내면의식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우리말 서정시를 다시 이룩하는 것은 교술시의 경우보다 더욱 큰 의의와 사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 시조는 경기체가처럼 한문어구를 열거해서 표기할 수 없고 향찰로 정착된 바도 없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작품을 다루는 데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 몇 백 년 동안 구전되다가 비로소 국문으로 기록된 것을 두고서 작자를 살피고 작품론을 전개하자면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
- 신흥사대부가 시조를 필요로 했던 절실한 이유는 나아가 세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번민하는 심정을 토로하자는 데 있었다.
- 가사가 고려말에 성립되었다는 견해는 나옹화상 혜근의 <승원가>가 발견되어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 처음에는 경기체가와 가사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가사와 시조의 관계도 소원했다 하겠다. 그러나 선승의 노래로 시작된 가사가 사대부문학의 영역안으로 들어오고, 사대부의 가사가 오히려 더욱 큰 구실을 하게 되면서 경기체가 시조 가사는 사대부문학의 갈래체계에서 공존하게 되고 서로의 구실과 작용이 가까워서 문제가 되었다. 경기체가는 독립된 사물을 하나씩 거론하고 거기서 감흥을 찾는다면, 가사는 사물에 대한 폭넓은 서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자 자신의 생활의 내용을 다각도로 대상화하면서 마땅한 자세가 무엇인지 묻는 점이 서로 다르다.
이런 이유에서 사대부가 사물에서 생활로 관심을 확대하고 심화하면서 경기체가는 위축되고 가사가 득세했다. 그렇지만 시조와 가사는 단가와 장가로서, 또는 서정시와 교술시로서 경쟁적이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를 가지고 나란히 발전했다.
6.9. 사대부문학의 방향과 문제의식
- 최해는 생애가 불우하고 단명했으나 <동인문>이란 총서를 완성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발견을 해야겠다는 의식이 투철하였다.
- 안축은 최해처럼 비참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뜻대로 영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는 고려가 자주성을 되찾고 내부적인 문제도 가능한 대로 해결하도록 하자고 애썼다.
- 이제현의 문학은 참으로 호한해서 간단하게 말할 수 없으나, 크게 보아 원나라를 지향하는 뜻과 고려를 지향하는 뜻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앞의 것을 수단으로 뒤의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곡은 이제현이 이미 제시했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해서 유학의 도리를 근거로 삼고 교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을 일으키고자 했다.
- 이색은 신유학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를 온통 배격할 필요는 없으며, 사상이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 이달충은 이색만큼 폭이 넓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고민과 좀더 적극적으로 부딪히고자 한 사람이었다.
- 정몽주는 시를 짓기 좋아하는 성미라, 분주하게 다니는 길에서도 느낀 바가 있으면 읊어서 호탕한 기백을 지닌 풍류스런 작품을 이룩했다.
- 이존오는 신돈을 규탄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자기자신은 은거가 분수일 수밖에 없었으며, 시를 지어서 울분과 나타내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7. 넷째 시대 : 중세후기문학
- 제2기 조선 전기 -
7.1. 왕조 교체기의 한문학
- 문학은 도리를 구현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생각은 스승인 이색이 이미 주장한 바이고 동학인 정몽주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도전은 문학이 재도를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재도란 다름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잡는 실천적 활동이라 했다. 이색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정도전은 사물을 바르게 다루어야 도리가 살아난다고 했다.
- 원천석은 왕조 교체기를 자기대로 특이하게 살아간 사람이었다. 방외인이라고 하게 되는 사람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하겠다.
7.2. 훈민정음의 창제와 서사지, 언해
- 훈민정음으로 국문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제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 국문문학이 나타난 이후의 한문학이라 해서 버려야 할 것은 결코 아니며 그것대로의 의의를 계속 깊이 주목해야 하지만, 국문문학은 국문학이 언어표현에서조차 민족문학으로서의 특징을 뚜렷하게 가질 수 있게 했다. 상하층이 함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나아가서는 사대부가 역사적인 한계를 노출했을
- 소악부는 한시이면서도 우리말 노래, 특히 민요의 진솔한 사연을 담으려 했기에 주목된다. 한시와 우리말 내로가 공존하는 것이 중세문학의 특징이라 했는데,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는 둘을 서로 접근시키려는 방안의 하나로 소악부를 창안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우리말 노래가 한시와 같은 격조를 갖출 수 있는 시조를 만들어 냈다. 소악부는 한시가 민족문학으로서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기에 이때 이루어진 모형이 게속 중요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단한 융성을 보게 되었다.
6.7. 설화, 무가, 연극의 양상
- 연극의 주류는 민간연극이고 하층연극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사회적인 장벽을 무너뜨리고 누구나 함께 어울려 즐거워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민간연극의 기본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6.8.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형성
- <한림별곡>에서 시작된 경기체가는 유식한 문인이 창작한 것이며,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하면서 감흥을 찾는다는 점에서 서정시가 아니라 교술시라 해야 할 새로운 갈래이다.
- <한림별곡>이 나온 지 한 세기 정도 지나서 안축이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었다. 안축의 작품은 여럿이 돌림노래로 짓지 않고 혼자서 창작할 수 있는 경기체가의 첫 예라는 점에서 소중할 뿐만 아니라, 신흥사대부가 경기체가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표현한 명백한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신흥사대부들은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또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기철학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고, 밖에서 들어온 학설이 적절하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사대부에게는 경기체가와 같은 교술시와 함께 시조와 같은 서정시도 필요했다. 시조는 경기체가에 이어서 나왔고 내면의식의 문제를 절실하게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우리말 서정시를 다시 이룩하는 것은 교술시의 경우보다 더욱 큰 의의와 사명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 시조는 경기체가처럼 한문어구를 열거해서 표기할 수 없고 향찰로 정착된 바도 없기 때문에 이른 시기의 작품을 다루는 데 적지 않은 지장이 있다. 몇 백 년 동안 구전되다가 비로소 국문으로 기록된 것을 두고서 작자를 살피고 작품론을 전개하자면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다.
- 신흥사대부가 시조를 필요로 했던 절실한 이유는 나아가 세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번민하는 심정을 토로하자는 데 있었다.
- 가사가 고려말에 성립되었다는 견해는 나옹화상 혜근의 <승원가>가 발견되어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 처음에는 경기체가와 가사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가사와 시조의 관계도 소원했다 하겠다. 그러나 선승의 노래로 시작된 가사가 사대부문학의 영역안으로 들어오고, 사대부의 가사가 오히려 더욱 큰 구실을 하게 되면서 경기체가 시조 가사는 사대부문학의 갈래체계에서 공존하게 되고 서로의 구실과 작용이 가까워서 문제가 되었다. 경기체가는 독립된 사물을 하나씩 거론하고 거기서 감흥을 찾는다면, 가사는 사물에 대한 폭넓은 서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자 자신의 생활의 내용을 다각도로 대상화하면서 마땅한 자세가 무엇인지 묻는 점이 서로 다르다.
이런 이유에서 사대부가 사물에서 생활로 관심을 확대하고 심화하면서 경기체가는 위축되고 가사가 득세했다. 그렇지만 시조와 가사는 단가와 장가로서, 또는 서정시와 교술시로서 경쟁적이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를 가지고 나란히 발전했다.
6.9. 사대부문학의 방향과 문제의식
- 최해는 생애가 불우하고 단명했으나 <동인문>이란 총서를 완성한 사람이었다.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발견을 해야겠다는 의식이 투철하였다.
- 안축은 최해처럼 비참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뜻대로 영달한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는 고려가 자주성을 되찾고 내부적인 문제도 가능한 대로 해결하도록 하자고 애썼다.
- 이제현의 문학은 참으로 호한해서 간단하게 말할 수 없으나, 크게 보아 원나라를 지향하는 뜻과 고려를 지향하는 뜻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앞의 것을 수단으로 뒤의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이곡은 이제현이 이미 제시했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해서 유학의 도리를 근거로 삼고 교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을 일으키고자 했다.
- 이색은 신유학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를 온통 배격할 필요는 없으며, 사상이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리게 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 이달충은 이색만큼 폭이 넓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고민과 좀더 적극적으로 부딪히고자 한 사람이었다.
- 정몽주는 시를 짓기 좋아하는 성미라, 분주하게 다니는 길에서도 느낀 바가 있으면 읊어서 호탕한 기백을 지닌 풍류스런 작품을 이룩했다.
- 이존오는 신돈을 규탄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 자기자신은 은거가 분수일 수밖에 없었으며, 시를 지어서 울분과 나타내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7. 넷째 시대 : 중세후기문학
- 제2기 조선 전기 -
7.1. 왕조 교체기의 한문학
- 문학은 도리를 구현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생각은 스승인 이색이 이미 주장한 바이고 동학인 정몽주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도전은 문학이 재도를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재도란 다름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잡는 실천적 활동이라 했다. 이색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도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정도전은 사물을 바르게 다루어야 도리가 살아난다고 했다.
- 원천석은 왕조 교체기를 자기대로 특이하게 살아간 사람이었다. 방외인이라고 하게 되는 사람의 선구자가 되었다고 하겠다.
7.2. 훈민정음의 창제와 서사지, 언해
- 훈민정음으로 국문문학작품을 창작하는 것은,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제 직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라고 할 수 있다.
- 국문문학이 나타난 이후의 한문학이라 해서 버려야 할 것은 결코 아니며 그것대로의 의의를 계속 깊이 주목해야 하지만, 국문문학은 국문학이 언어표현에서조차 민족문학으로서의 특징을 뚜렷하게 가질 수 있게 했다. 상하층이 함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나아가서는 사대부가 역사적인 한계를 노출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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