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이규보의 생애와 주요저서(이규보의 산문과 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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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문학사]이규보의 생애와 주요저서(이규보의 산문과 시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이 규 보
1이규보의 생애
2주 요 저 서

Ⅱ이규보의 산문
1백 운 소 설 ( 白雲小說 )
1)개 관
2)요점정리
3)본 문
4)구불의체
2슬 견 설 ( 芒犬說 )
1)요점정리
2)본 문
3)이규보의 슬견설 해설
① 작품의 이해와 감상
② 풍자적 입장에서 해석
3경 설 ( 鏡 說 )
1)요점정리
2)본 문
3)이규보의 경설 해설
① 이해와 감상
② 보충설명

Ⅲ이규보의 시관
1이규보의 시세계
1)어릴적부터 타고난 천재적인 시인의 면모
2)해좌칠현과의 접촉을 통한 비판적 안목의 형성
3)천마산 시절의 역사 인식과 창작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
4)이규보에 관한 어용시비(御用是非)에 관한 소견
5)하급 벼슬생활 중의 이규보의 시세계
6)인천仁川 시기의 이규보

본문내용

이여
바깥 오랑캐로서 명을 어기는 자는
하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하리로다.
화창한 기운은 우주에 어리었고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다투어 상서로운 것을 바친다.
사시로 옥촉(玉燭)을 비쳐주고
칠요(七曜)는 만방을 돌아간다.
숭고한 뫼에서는 재보(宰輔)를 내리고
오직 임금은 충량(忠良)을 썼다.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이 다한 덕이니
소소히 황실 당(唐)에 실렸도다.

했다. 상고하여 주(柱)했으니, 영휘(永徽)원년(650)에 진덕(眞德)이 백제의 무리를 대파하자, 곧 비단을 짜면서 오언(五言)으로 <태평시>를 지어서 드렸다 한다. 살피건대 영휘는 곧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3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파천왕(破天荒)의 큰 공을 세워 우리나라 학자들이 다 그를 종사(宗師)로서 높이 받들었다. 그의 작품 <비파행(琵琶行)> 한 수(首)는 당나라 시가집인 <당음유향(唐音遺響)>에 무명시 작으로 수록되었다. 그리하여 고운이 지은 것인지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시에 있는 \"동정호에 달 떨어지자 고운이 돌아가다(洞庭月落孤雲歸).\"라는 글귀를 가지고 그것이 최치원의 글이라고 증명하지만, 이것 역시 단안 내리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고운의 <토황소격>같은 것이 옛날 사적(史籍)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소(巢)가 <토황소격>의 \"천하 사람들이 다 드러내 놓고 죽이려 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땅 속의 귀신까지도 죽이려고 음모했다.\"는 데까지 읽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떨어져 기(氣)가 꺽였다고 하니, 귀신을 울리고 바람을 휘몰아치는 재주가 아니었다면 어찌 이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었으랴. 그의 시는 별로 경지가 높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가 당나라 만년에 중국에 들어간 때문이었을까.

4

중국의 정사(正史) {당서(唐書)}의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문(四六文)\' 1권이 실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그의 문집(계원필경(桂苑筆耕)) 10권을 따로 간행하였다. 나는 중국 사람들의 마음이 넓어서 외국 사람인데도 그것으로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사서(史書)에 수록하고, 또 문집을 간행해 준 것을 가상히 여긴다.
그러나 그 <예문지>의 \'열전\'에 최치원을 위해 그의 전기를 따로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의 사적(事跡)을 전기(傳記)에 싣기가 부족하다고는 볼 수 없다. 치원이 열두 살에 바다를 건너 당나라에 가 수학하여 단번에 갑과(甲科)에 급제하고, 나중에는 고변의 종사(從事)가 되어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을 지어 황소의 기를 꺾었다.
후에 도통 순관 시어사(都統巡官侍御史)의 벼슬에 올랐고, 본국에 돌아올 즈음에는 같이 급제했던 고운(高雲)이 <유선가(儒仙歌)>를 그에게 지어 주었는데, 그 한 구절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문장은 중국인을 감동케 하였다.\"고 했고, 그의 자서전에서도 \"무협 중봉(巫峽重峰)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와서,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금의 환향했다.\"고 했다. 이것은 열두 살에 당(唐)에 들어가 스물 여덟에 본국에 돌아왔음을 말한 것이다. 그의 사적(事跡)은 이와 같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전기를 만든다면 말할 것없이 <예문지>의 \'열전\'에 실려있는 심전기(沈 期), 유병(柳倂), 최원한(崔元翰), 이빈(李瀕) 등의 반(半)장짜리 열전(列傳)과는 거리가 있다. 외국인이기 때문이었다면 그의 작품이 이미<예문지>에 실려 있음에랴.
또 무사들의 전기를 집성한 {번진호용(藩鎭虎勇)}의 \'열전(列傳)\'에는 이정기(李正己),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은 다 고려인들인데, 제각기 그들의 전기를 써서 그들의 사적을 완비하여 기록하고 있다. 어찌해서 <예문지>의 \'열전\'에만은 치원을 위한 그의 전기를 따로 두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건대, 옛날 사람은 문장에서 서로 시기하여 남을 헐뜯었는데, 하물며 치원은 외국의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와 당시 유명한 문인들을 능가했다. 그래서 사실대로 그 전기를 쓴다면 그들의 시기를 사지 않을까 두려워서 생략한 것이리라. 그러나 나도 이것에 대해서는 확실한 면을 밝히지 못하는 바이다.

5

삼한(三韓)은 하(夏)나라 때에 비로소 중국과 통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수(隨), 당(唐)나라 이후에야 작자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일지 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에게 보낸 시와 신라 여왕이 당나라 임금에게 바친 송시(頌詩) 등이 기록되어 있으나, 그 수가 너무 적어 적막함을 면치 못하였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서야 비로소 온 세상에 문장으로 유명해졌으니, 그의 시 한 편에 이르기를 \"곤륜산(崑崙山)이 동쪽으로 뻗어 다섯 산이 푸르렀고/성수해(星宿海)가 북쪽으로 흘러 황하수(黃河水)가 누렇다(崑崙東走 五山碧 星宿北流一水黃).\" 치원과 같은 연배인 고운(顧雲)이 \" 이 구절은 곧 지리서(地理書)이다.\" 라고 평했듯이, 중국의 동, 서, 남, 북 중앙에 위치한 오악(五嶽)은 다 곤륜산에서 뻗어 나왔고, 황하(黃河)는 성수하로부터 흘러 나왔다고 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의 <윤주 자화사에서 쓴 시(潤州慈和寺詩)>의 한 구절에 \"화각(畵角) 울리는 가운데 아침 저녁으로 물결 출렁이고/청산(靑山) 그림자 속에 고금(古今)의 사람들 오고 간다(畵角聲中朝暮浪 靑山影古今人)\" 했고, 학사(學士) 박인범(朴仁範)의 <경주 용삭사에서 쓴 시(涇州龍朔寺詩>에는 \"반딧불 같은 등불은 험하고 작은 샛길을 밝혀주고/무지개 같은 층계 그림자는 바위 밑 문턱에 걸렸다(燈 螢光明鳥道 梯回虹影落巖 )\" 했으며,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의 <사주 귀산사에서 쓴 시(泗州]龜山寺詩)>에는 \"문 앞의 나그네는 큰 물결 속에서 급히 노 젓고/ 대낮에 중은 대숲 아래 한가하게 바둑을 둔다(門前客槽風浪急 竹下僧棋白日閑)\" 했다. 동방 우리나라의 시로서 중국에 이름을 떨치기로는 이 세 사람으로 비롯되는, 문장으로 빛난 우리 나라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6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학사(學士) 정지상(鄭知常)은 일찍이 산 속의 어떤 절에서 공부를 했는데, 어느 달 밝은 밤에 혼자서 불전에 앉아 있으려니까 난데없이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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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0
  • 저작시기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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