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발해사인식의 전제
2. 고려시대의 발해사 인식
3. 조선시대의 발해사 인식
4. 한말의 발해사 인식
5. 독립운동기의 발해사 인식
2. 고려시대의 발해사 인식
3. 조선시대의 발해사 인식
4. 한말의 발해사 인식
5. 독립운동기의 발해사 인식
본문내용
의 논리는 한국사의 지리적 숙명론을 제기하여 일본의 온정적 지배를 정당화하여 그들의 침략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논리는 급기야 이른바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라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으로 비약하여 침략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보다 큰 야욕인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사의 연고 지역인 만주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에도 정열적이었다.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식민사학의 논리는 당연히 한국사 상의 발해사 서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부터의 발해사 서술은 한국사와는 별개인 만주사로서 서술되기 시작했다. 좋은 본보기로는 한말의 《조선사》에서 이미 발해를 기록했던 하야시가 그의 개정판인 《조선통사》에서 발해를 제외시키고 신라의 통일 및 쇠망만을 기록한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선사의 길잡이》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쓰여졌다는 사실도 주목하여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조선 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25장으로 편찬한 것으로서, 발해사는 25개의 장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였고, 다만 제6장 신라일통시대에서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잠시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국사의 체계는 발해사를 제외시킨 채 하야시에 의해 선창표제화된 통일신라가 삼국에 이어 단일 정통 왕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하야시가 한국사 체계에 대한 서술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역사적 환경에 따라 바뀌는 역사 인식의 문제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심각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왔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식민사학이 고구려사 마저도 한국사에서 떼어내 만주사로 편입시키려 하였던 사실은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제의 강제 점령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시기의 발해사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학에 저항하는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반식민사학쪽에서 적극적이었다.
즉, 한국사의 모순을 한국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민족 정신에서 찾으려는 민족사학과 한국사의 중세부재론을 극복하고 한국사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구의 유물사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해사의 만주사화에 대한 반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논리는 급기야 이른바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이라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으로 비약하여 침략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보다 큰 야욕인 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사의 연고 지역인 만주를 한국사에서 제외시키는 작업에도 정열적이었다.
이른바 만선사관(滿鮮史觀)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식민사학의 논리는 당연히 한국사 상의 발해사 서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제부터의 발해사 서술은 한국사와는 별개인 만주사로서 서술되기 시작했다. 좋은 본보기로는 한말의 《조선사》에서 이미 발해를 기록했던 하야시가 그의 개정판인 《조선통사》에서 발해를 제외시키고 신라의 통일 및 쇠망만을 기록한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조선사의 길잡이》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쓰여졌다는 사실도 주목하여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총독부가 일제의 조선 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25장으로 편찬한 것으로서, 발해사는 25개의 장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였고, 다만 제6장 신라일통시대에서 신라가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는 과정에서 잠시 언급되고 있을 따름이었다.
한국사의 체계는 발해사를 제외시킨 채 하야시에 의해 선창표제화된 통일신라가 삼국에 이어 단일 정통 왕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하야시가 한국사 체계에 대한 서술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역사적 환경에 따라 바뀌는 역사 인식의 문제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심각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중요한 본보기가 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왔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시 식민사학이 고구려사 마저도 한국사에서 떼어내 만주사로 편입시키려 하였던 사실은 짚고 넘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제의 강제 점령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시기의 발해사 인식은 일제의 식민사학에 저항하는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반식민사학쪽에서 적극적이었다.
즉, 한국사의 모순을 한국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오는 민족 정신에서 찾으려는 민족사학과 한국사의 중세부재론을 극복하고 한국사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구의 유물사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해사의 만주사화에 대한 반기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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