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화이트헤드의 저서(과정과 실재)
Ⅲ.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사변이성의 모험과 문명의 창조)
Ⅳ.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상징적 연관)
Ⅴ.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생성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
Ⅵ.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불교철학의 비교(역사와 시간)
Ⅶ. 화이트헤드 철학관의 평가
참고문헌
Ⅱ. 화이트헤드의 저서(과정과 실재)
Ⅲ.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사변이성의 모험과 문명의 창조)
Ⅳ.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상징적 연관)
Ⅴ. 화이트헤드의 철학관(생성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
Ⅵ.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불교철학의 비교(역사와 시간)
Ⅶ. 화이트헤드 철학관의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존재하는 미래가 과연 현재에 내적(內的)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물론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에게 가능태의 모습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미래에 내가 어떠 어떠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꿈과 소망이 현재의 소년인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으로서만 현재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다. 만일 현실성으로서 영향을 끼친다면 그렇게 소망을 갖는 사람은 모두 그런 소망과 꿈을 이룬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미래가 언제나 반드시 현재를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만일 한 소년이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무조건 박사학위를 미리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가능성으로 현재에 들어와 있지 현실성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도, 엄밀히 말해서 미래가 현재를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 즉 현재 안에 들어 있는 미래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재의 미래, 더욱 정확히 말해서 현재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칠 때, 단지 가능성으로 영향을 끼쳐야지 현실태로서 영향을 끼친다면 논리적인 사고와 과학적 인과율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실과 미래를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사사무애에 근거한 시간관은 과학적 인과율을 무시한 인과율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도들도 이런 식의 분석에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잘 알다시피 불교의 사사무애가 자연과학이나 수학적인 인과율을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사무애는 고급 수준의 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깨달은 진리로서, 즉 깨달은 자는 타자와 나의 관계를 분석할 때, 그 양자를 별개의 분리된 인간들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서로 막힘없이 통하고 상호 생성되는 연기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인과율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과율이 단지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요청된 것이지, 자연과학과 수학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앞에서 확인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 된다.
즉 불교의 우주론이 설하고 있는 인과율이나 법칙들은 과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가 말하고 있는 이론들과는 다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우주론을 전개하는 방식이 철저히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느 누구의 우주론이 더 우월한가 하는 판단을 내리는 어리석은 작업은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Ⅶ. 화이트헤드 철학관의 평가
화이트헤드는 \'관계의 세계\' 속에서 그 주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는 자기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 있어 모든 주체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을 통하여 새로움에 참여한다. 모든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창조적 활동을 펴 나가는데 있어 하나같이 객체적 불멸성을 향유한다.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소멸하거나 사라지지 않게 된다. 무(無)로 돌아가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존재 는 불모의 시간 속에서 결코 무로 와해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시의(時宜)에 맞게 세계 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자기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저기, 양 쪽으로 기다랗게 놓여진 가로수를 지나가는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포풀러 가로수 밑에 떨어진 휴지 한쪽을 줍는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떨어진 휴지 한 쪽을 줍는 소녀의 행위는 단지 그녀만의 운동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그 소녀의 미덕은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모든 존재들에게 전달되어 영원히 간직된다. 우리 마음의 단층에는 이미 수백만 년을 영위한 인류의 자산이 정갈 하게 겹쳐져 있다. 그래서 그 장구한 세월을 거쳐 존속하는 인류의 자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깊이 삼투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주위를 감싸고, 공명을 일으키며 지금도 우리를 지탱한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도 객체적 불멸성을 통해 전달된 삶의 나이테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소멸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멸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세계에 축적된다. 우리의 삶은 영원에 의하여 향유되었고, 영원과 더불어 향유하고, 영원을 향하여 향유하려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의 숨결은 영원한 숨결이다. 실로 오늘을 달려가는 우리 삶은 역사적 경로의 계기를 타고 과거로부터 건너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미래를 향하여 계속 이어지며 불멸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 소녀의 미덕은 우리의 혈관에서 지금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인류를 향한 그 소녀의 보편적 행위는 어느덧 가로수를 넘어서 온 도시에 넘실거린다.
이제 <모든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의 저 깊은 시선은,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에 사로잡힌 현대 문명에 대하여 준엄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또한 묵묵한 발걸음으로 희망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빛을 오늘도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다.
참고문헌
박영식(2000), 서양철학사의 이해, 철학과현실사
스탠리 그렌츠·로저 올슨·신재구 역(1997), 20세기 신학, IVP
스털링 P. 램프레히트(1963),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윤병운, 서양철학사, 삼광출판사
존캅·데이비드·그리핀·류기종 옮김(1993), 과정신학, 열림
철학교재 편찬위원회, 철학의 이해, 중앙대학교 출판부
Robert B. Mellert·김상일 역(1989),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신학, 서울 : 지식산업사
물론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하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에게 가능태의 모습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미래에 내가 어떠 어떠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꿈과 소망이 현재의 소년인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가능성으로서만 현재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다. 만일 현실성으로서 영향을 끼친다면 그렇게 소망을 갖는 사람은 모두 그런 소망과 꿈을 이룬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게 영향을 끼치는 미래가 언제나 반드시 현재를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너무나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만일 한 소년이 모든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다고 해서 그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무조건 박사학위를 미리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가능성으로 현재에 들어와 있지 현실성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에도, 엄밀히 말해서 미래가 현재를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 즉 현재 안에 들어 있는 미래가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현재의 미래, 더욱 정확히 말해서 현재가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미래가 현재에 영향을 끼칠 때, 단지 가능성으로 영향을 끼쳐야지 현실태로서 영향을 끼친다면 논리적인 사고와 과학적 인과율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실과 미래를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불교의 사사무애에 근거한 시간관은 과학적 인과율을 무시한 인과율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도들도 이런 식의 분석에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잘 알다시피 불교의 사사무애가 자연과학이나 수학적인 인과율을 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사무애는 고급 수준의 높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깨달은 진리로서, 즉 깨달은 자는 타자와 나의 관계를 분석할 때, 그 양자를 별개의 분리된 인간들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서로 막힘없이 통하고 상호 생성되는 연기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인과율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과율이 단지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요청된 것이지, 자연과학과 수학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다시 앞에서 확인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 된다.
즉 불교의 우주론이 설하고 있는 인과율이나 법칙들은 과학자로서의 화이트헤드가 말하고 있는 이론들과는 다른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우주론을 전개하는 방식이 철저히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시간과 역사에 대한 이해도 달라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느 누구의 우주론이 더 우월한가 하는 판단을 내리는 어리석은 작업은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Ⅶ. 화이트헤드 철학관의 평가
화이트헤드는 \'관계의 세계\' 속에서 그 주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체는 자기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 있어 모든 주체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을 통하여 새로움에 참여한다. 모든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그리하여 세계는 창조적 활동을 펴 나가는데 있어 하나같이 객체적 불멸성을 향유한다.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소멸하거나 사라지지 않게 된다. 무(無)로 돌아가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존재 는 불모의 시간 속에서 결코 무로 와해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자신을 시의(時宜)에 맞게 세계 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자기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저기, 양 쪽으로 기다랗게 놓여진 가로수를 지나가는 한 소녀가 있다. 소녀는 포풀러 가로수 밑에 떨어진 휴지 한쪽을 줍는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떨어진 휴지 한 쪽을 줍는 소녀의 행위는 단지 그녀만의 운동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그 소녀의 미덕은 객체적 불멸성을 통하여 모든 존재들에게 전달되어 영원히 간직된다. 우리 마음의 단층에는 이미 수백만 년을 영위한 인류의 자산이 정갈 하게 겹쳐져 있다. 그래서 그 장구한 세월을 거쳐 존속하는 인류의 자산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깊이 삼투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주위를 감싸고, 공명을 일으키며 지금도 우리를 지탱한다. 기나긴 시간이 흘러도 객체적 불멸성을 통해 전달된 삶의 나이테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소멸하는 삶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멸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세계에 축적된다. 우리의 삶은 영원에 의하여 향유되었고, 영원과 더불어 향유하고, 영원을 향하여 향유하려는 삶이다. 그리고 우리의 숨결은 영원한 숨결이다. 실로 오늘을 달려가는 우리 삶은 역사적 경로의 계기를 타고 과거로부터 건너왔으며, 또한 앞으로도 미래를 향하여 계속 이어지며 불멸할 것이다. 그러기에 그 소녀의 미덕은 우리의 혈관에서 지금도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인류를 향한 그 소녀의 보편적 행위는 어느덧 가로수를 넘어서 온 도시에 넘실거린다.
이제 <모든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의 저 깊은 시선은, 자기 욕망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에 사로잡힌 현대 문명에 대하여 준엄한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또한 묵묵한 발걸음으로 희망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빛을 오늘도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다.
참고문헌
박영식(2000), 서양철학사의 이해, 철학과현실사
스탠리 그렌츠·로저 올슨·신재구 역(1997), 20세기 신학, IVP
스털링 P. 램프레히트(1963),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윤병운, 서양철학사, 삼광출판사
존캅·데이비드·그리핀·류기종 옮김(1993), 과정신학, 열림
철학교재 편찬위원회, 철학의 이해, 중앙대학교 출판부
Robert B. Mellert·김상일 역(1989), 화이트헤드의 철학과 신학, 서울 :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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