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김창협(金昌協)의 시와 전원실경(田園實景)
1) 삶의 특징
2) 시와 전원실경
가. 현실과 좌절
나. 우국충정
다. 전원 속의 흥취
라. 실경산수(實景山水)
1) 삶의 특징
2) 시와 전원실경
가. 현실과 좌절
나. 우국충정
다. 전원 속의 흥취
라. 실경산수(實景山水)
본문내용
仲父를 모시고 동생 昌翕과 함께 개성을 구경했으며, 홀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東遊記’와 ‘東征賦’를 지었다. 24살에 용문산과 수원에서 尤菴 宋時烈을 뵙고 강설을 들었으며, 이듬해에 덕원으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진천에서 배웅하고, 영암으로 귀양가는 부친을 따라갔으며 여러 번 영암에 왕래하며 월출산과 동복 창평 등에 들렀다. 28살에 창흡과 함께 삼각산 증흥사에서 독서했으며, 철원으로 移配되는 부친을 용인에 나가 모셨다. 우암에게 경전에 대하여 질문하는 글을 올렸다.
29살에 부친의 명으로 氷平縣 鷹巖에 집을 짓고 전원에서 학문할 뜻을 ‘洞陰對’를 지어 드러냈다. 30살에 ‘隱求庵記’를 지었고, 유배에서 풀린 부친이 영의정이 되자 모시고 서울로 갔으며, 영평으로 돌아와 독서하여 가을 별시 초시에 장원했다. 겨울에 廣州 宮村으로 우암을 찾아뵈었다. 31살 태학생으로 율곡 우계 등을 문묘에 從祀하자고 상소했다.
나. 사환기(1682, 숙종8년-1688, 숙종14년): 32살에 아들 崇謙을 얻었고, 별시 문과에 회시 2등, 전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과 전적이 되었다. 33살에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영의정이라 언관을 맡을 수 없다고 사퇴하여 홍문관 수찬, 부교리가 되었고 한학교수를 겸하였다.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나 다시 引避 사퇴하였다. 34살에 홍문관 교리로 송시열을 부르자고 箚子를 올렸다. 이조좌랑이 되고, 암행어사로 영남을 살피고 돌아왔다. 송시열에게 글을 올려 ‘心經’의 의문난 점을 논하였다.
35살에 지제교, 헌납이 되었으나 사퇴하였고,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금강산을 거쳐 鏡城에 이르러 진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교리와 중학교수를 겸하였다. 36살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사헌부 집의,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吐血症으로 물러나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병조참의, 예조참의가 되었다. 37살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사퇴하여 대사성으로 옮겼다.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으나, 희빈 장씨의 일을 상소하여 조정이 불안하자 외직을 구하여 청풍부사가 되었다. 38살에 월악산과 단양에 놀았고 화양동으로 송시열을 찾아뵈었다.
다. 전원기(1689, 숙종15년-): 39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벼슬을 내 놓았다. 부친이 진도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고, 송시열도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장례를 치른 후 氷平縣 응암으로 돌아왔다. 40살 되던 해 仲父 金壽興이 장기 배소에서 죽었다. 42살 응암 동쪽 籠巖에 세 칸 畵室을 짓고 農巖樹屋이라고 하여 전원에 살 뜻을 굳혔다. 43살 白雲山寺에서 독서하며 ‘五子粹言’을 엮었다. 44살에 양주 奉印寺에서 독서했다. 조정에서 호조참의를 제수했으나, ‘천지간의 죄인’이고 아버지의 謙退하라는 유언에 따른다며 사퇴했으며, 이후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등 40여 회에 걸쳐 벼슬을 제수했지만 모두 사퇴했다. 농암의 淸瀨 위에 정자를 지었다.
45살 양주 石室書院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46살에 철원으로 형을 만나러 갔고, 횡성에서 문인을 조문하는 길에 淸平 寒溪를 유람하고 ‘東征記’를 썼으며, 수원에 가서 우암의 改葬에 제문 지어 제사했다. 47살에 농암과 渼陰을 왕래하며 제자를 만나고 道峯을 찾았으며, 서울에 계시는 모친을 자주 찾아뵙기 위해 양주 석실서원 옆에 집을 지어 머물며 그곳을 三洲라고 했다. 廣州 水鍾寺에서 부친의 행장을 지었다. 48살에 어머니를 모시고 형이 유수로 있는 강화에 다녀왔다. 49살 동생 昌緝과 조카들을 데리고 송도 천마산을 구경하고 강화를 둘러보고 三洲로 돌아왔다.
50살에 향음주례에 참석했고, 딸 吳氏婦와 19살 된 아들 숭겸이 죽었다. 51살에 ‘四端七情說’을 지었다. 53살에 딸 李氏婦가 죽었고, 모친상을 당했다. 55살에 복을 벗고 삼주로 돌아왔다. 57살에 外兄 李濡의 이웃인 鹿川에 머물다가 道峰을 찾고, 水落山 玉流洞, 妙寂寺 등에 놀았다. 58살에 형과 함께 前江에서 배를 타고 觀魚했으며, 妙寂寺에 놀았다. 4월 11일에 三洲 正寢에서 죽었다. 金昌協, 앞의 책, 卷35-6, 附錄, 年譜, 618-639쪽 참조. 숙종실록CD. 참조.
사관은 그의 졸기를 이렇게 썼다.
①천성이 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②문장은 전아하며 무르익고 빛나서 六一居士의 정수를 깊이 얻었다. 국조 이래로 문장가는 한 둘에 불과했는데, 그가 이들과 鼎立했다고 할 만하다. 시도 역시 漢魏를 출입하면서 杜甫로 補翼하였다. 高古하고 雅健하였으나 얕은 일이라 힘쓰지 않았고, ③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비가 힘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마침내 六經에만 오로지 정진하고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가 정확하고 공부가 독실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朱子書에 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이 <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설을 많이 썼다. 그 뒤에 義理가 막히고 斯文이 갈라지는 때를 당하여, 명분과 의리를 바르게 하고 사악하고 교활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여 울연히 유림의 宗匠이 되었다. 따라 배운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가르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후생 가운데 文詞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에 나아가게 하였다.
④젊어서 장원급제하여, 한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경연에서 진강할 때, 淳夫처럼 삼매의 경지에 있다는 聲譽가 있었다. 더욱 임금의 덕이 모자람을 애타 하고, 일을 만나면 규범을 내세워서 임금의 노여움을 피하지 않았다. 기사년의 禍를 만나자, 다시는 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다시 정국이 풀린 뒤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외진산골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며 굳게 지조를 지키고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의 순수함과 문장의 높음과 학술의 심오함을 논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鴻儒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肅宗實錄, 34年 4月 11日, CD-ROM 조선왕조실록 참조.
그의 특징을 ① 천품이 청수하고, ② 문장과 시에 빼어난 재능을 지
29살에 부친의 명으로 氷平縣 鷹巖에 집을 짓고 전원에서 학문할 뜻을 ‘洞陰對’를 지어 드러냈다. 30살에 ‘隱求庵記’를 지었고, 유배에서 풀린 부친이 영의정이 되자 모시고 서울로 갔으며, 영평으로 돌아와 독서하여 가을 별시 초시에 장원했다. 겨울에 廣州 宮村으로 우암을 찾아뵈었다. 31살 태학생으로 율곡 우계 등을 문묘에 從祀하자고 상소했다.
나. 사환기(1682, 숙종8년-1688, 숙종14년): 32살에 아들 崇謙을 얻었고, 별시 문과에 회시 2등, 전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과 전적이 되었다. 33살에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영의정이라 언관을 맡을 수 없다고 사퇴하여 홍문관 수찬, 부교리가 되었고 한학교수를 겸하였다.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나 다시 引避 사퇴하였다. 34살에 홍문관 교리로 송시열을 부르자고 箚子를 올렸다. 이조좌랑이 되고, 암행어사로 영남을 살피고 돌아왔다. 송시열에게 글을 올려 ‘心經’의 의문난 점을 논하였다.
35살에 지제교, 헌납이 되었으나 사퇴하였고,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금강산을 거쳐 鏡城에 이르러 진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교리와 중학교수를 겸하였다. 36살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사헌부 집의,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吐血症으로 물러나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병조참의, 예조참의가 되었다. 37살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사퇴하여 대사성으로 옮겼다.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으나, 희빈 장씨의 일을 상소하여 조정이 불안하자 외직을 구하여 청풍부사가 되었다. 38살에 월악산과 단양에 놀았고 화양동으로 송시열을 찾아뵈었다.
다. 전원기(1689, 숙종15년-): 39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벼슬을 내 놓았다. 부친이 진도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고, 송시열도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장례를 치른 후 氷平縣 응암으로 돌아왔다. 40살 되던 해 仲父 金壽興이 장기 배소에서 죽었다. 42살 응암 동쪽 籠巖에 세 칸 畵室을 짓고 農巖樹屋이라고 하여 전원에 살 뜻을 굳혔다. 43살 白雲山寺에서 독서하며 ‘五子粹言’을 엮었다. 44살에 양주 奉印寺에서 독서했다. 조정에서 호조참의를 제수했으나, ‘천지간의 죄인’이고 아버지의 謙退하라는 유언에 따른다며 사퇴했으며, 이후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등 40여 회에 걸쳐 벼슬을 제수했지만 모두 사퇴했다. 농암의 淸瀨 위에 정자를 지었다.
45살 양주 石室書院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46살에 철원으로 형을 만나러 갔고, 횡성에서 문인을 조문하는 길에 淸平 寒溪를 유람하고 ‘東征記’를 썼으며, 수원에 가서 우암의 改葬에 제문 지어 제사했다. 47살에 농암과 渼陰을 왕래하며 제자를 만나고 道峯을 찾았으며, 서울에 계시는 모친을 자주 찾아뵙기 위해 양주 석실서원 옆에 집을 지어 머물며 그곳을 三洲라고 했다. 廣州 水鍾寺에서 부친의 행장을 지었다. 48살에 어머니를 모시고 형이 유수로 있는 강화에 다녀왔다. 49살 동생 昌緝과 조카들을 데리고 송도 천마산을 구경하고 강화를 둘러보고 三洲로 돌아왔다.
50살에 향음주례에 참석했고, 딸 吳氏婦와 19살 된 아들 숭겸이 죽었다. 51살에 ‘四端七情說’을 지었다. 53살에 딸 李氏婦가 죽었고, 모친상을 당했다. 55살에 복을 벗고 삼주로 돌아왔다. 57살에 外兄 李濡의 이웃인 鹿川에 머물다가 道峰을 찾고, 水落山 玉流洞, 妙寂寺 등에 놀았다. 58살에 형과 함께 前江에서 배를 타고 觀魚했으며, 妙寂寺에 놀았다. 4월 11일에 三洲 正寢에서 죽었다. 金昌協, 앞의 책, 卷35-6, 附錄, 年譜, 618-639쪽 참조. 숙종실록CD. 참조.
사관은 그의 졸기를 이렇게 썼다.
①천성이 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②문장은 전아하며 무르익고 빛나서 六一居士의 정수를 깊이 얻었다. 국조 이래로 문장가는 한 둘에 불과했는데, 그가 이들과 鼎立했다고 할 만하다. 시도 역시 漢魏를 출입하면서 杜甫로 補翼하였다. 高古하고 雅健하였으나 얕은 일이라 힘쓰지 않았고, ③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비가 힘쓸 일이 아니라고 여겨 마침내 六經에만 오로지 정진하고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가 정확하고 공부가 독실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朱子書에 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이 <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설을 많이 썼다. 그 뒤에 義理가 막히고 斯文이 갈라지는 때를 당하여, 명분과 의리를 바르게 하고 사악하고 교활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세상 사람들이 의지하여 울연히 유림의 宗匠이 되었다. 따라 배운 자가 매우 많았는데 가르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후생 가운데 文詞에 힘쓰는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에 나아가게 하였다.
④젊어서 장원급제하여, 한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경연에서 진강할 때, 淳夫처럼 삼매의 경지에 있다는 聲譽가 있었다. 더욱 임금의 덕이 모자람을 애타 하고, 일을 만나면 규범을 내세워서 임금의 노여움을 피하지 않았다. 기사년의 禍를 만나자, 다시는 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다시 정국이 풀린 뒤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외진산골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며 굳게 지조를 지키고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의 순수함과 문장의 높음과 학술의 심오함을 논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鴻儒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肅宗實錄, 34年 4月 11日, CD-ROM 조선왕조실록 참조.
그의 특징을 ① 천품이 청수하고, ② 문장과 시에 빼어난 재능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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