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한시속의 삶과 의식<<책속의 김창협 요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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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한시속의 삶과 의식<<책속의 김창협 요약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김창협(金昌協)의 시와 전원실경(田園實景)

1) 삶의 특징

2) 시와 전원실경

가. 현실과 좌절

나. 우국충정

다. 전원 속의 흥취

라. 실경산수(實景山水)

본문내용

생활과 학문에의 침잠, 그리고 산수자연에 대한 흥취 등을 진실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그 자신의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실적 경향으로 바뀌어간 조선시(朝鮮詩) 쇄신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소명출판, 1999, 37-55쪽 참조.
또 회화의 진경산수(眞景山水)와도 얼마간의 관련
이 있다. 사실 진경산수화는 겸재 정선에서 비롯되었고 吳世昌, 槿域書畵徵, 卷5, 시공사 영인본, 1998, 167쪽. 謙齋長於山水 尤善眞景 自成一家 爲東方
山水之宗畵
겸재는 김창협의 형 김창집(金昌集)의 추천으로 도화서에 들어갔던 만큼 같은 책, 166쪽. 謙齋吾先世舊隣也 少而善畵 家貧親老 謀斗祿於先高祖忠獻公 忠獻勸其入畵署 (楓皐集)
이들은 교류가 있었으며 김창협의 진시에 대한 생각은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眞景畵壇과 金昌協, 昌翕家의 교류 및 交感은 李勝洙의 三淵 金昌翕 硏究(安東金氏三淵公派宗中,
1998), 494-504쪽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참다운 시란 전원실경(田園實景)의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삶의 특징
김창협(1651, 효종2년-1708, 숙종34년)의 일생은 성장기, 사환기, 전원기로 나눌 수 있다.
가. 성장기(1651-1681, 숙종7년): 金壽恒과 羅氏의 여섯 아들 중 둘째로 과천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자는 仲和, 호는 農巖이다. 그의 증조부가 金尙憲이고, 仲父가 金壽興으로 관료 학자의 명문집안이다. 또한 형은 昌集, 동생은 昌翕, 昌業, 昌緝, 昌立으로 관료나 시문으로 이름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9살에 외조부인 해주목사 羅星斗를 따라가 독서하며 조리 있는 말로 외조부를 감탄시켰다. 15살에 靜觀齋 李端相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장인에게서 성리학의 대의를 배워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19살에 이단상이 죽었고, 21살에 仲父를 모시고 동생 昌翕과 함께 개성을 구경했으며, 홀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東遊記’와 ‘東征賦’를 지었다. 24살에 용문산과 수원에서 尤菴 宋時烈을 뵙고 강설을 들었으며, 이듬해에 덕원으로 귀양가는 송시열을 진천에서 배웅하고, 영암으로 귀양가는 부친을 따라갔으며 여러 번 영암에 왕래하며 월출산과 동복 창평 등에 들렀다. 28살에 창흡과 함께 삼각산 증흥사에서 독서했으며, 철원으로 移配되는 부친을 용인에 나가 모셨다. 우암에게 경전에 대하여 질문하는 글을 올렸다.
29살에 부친의 명으로 氷平縣 鷹巖에 집을 짓고 전원에서 학문할 뜻을 ‘洞陰對’를 지어 드러냈다. 30살에 ‘隱求庵記’를 지었고, 유배에서 풀린 부친이 영의정이 되자 모시고 서울로 갔으며, 영평으로 돌아와 독서하여 가을 별시 초시에 장원했다. 겨울에 廣州 宮村으로 우암을 찾아뵈었다. 31살 태학생으로 율곡 우계 등을 문묘에 從祀하자고 상소했다.
나. 사환기(1682, 숙종8년-1688, 숙종14년): 32살에 아들 崇謙을 얻었고, 별시 문과에 회시 2등, 전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과 전적이 되었다. 33살에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나 아버지가 영의정이라 언관을 맡을 수 없다고 사퇴하여 홍문관 수찬, 부교리가 되었고 한학교수를 겸하였다.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나 다시 引避 사퇴하였다. 34살에 홍문관 교리로 송시열을 부르자고 箚子를 올렸다. 이조좌랑이 되고, 암행어사로 영남을 살피고 돌아왔다. 송시열에게 글을 올려 ‘心經’의 의문난 점을 논하였다.
35살에 지제교, 헌납이 되었으나 사퇴하였고, 함경북도 병마평사가 되어 금강산을 거쳐 鏡城에 이르러 진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교리와 중학교수를 겸하였다. 36살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라는 명을 받았다. 사헌부 집의, 승정원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吐血症으로 물러나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병조참의, 예조참의가 되었다. 37살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사퇴하여 대사성으로 옮겼다.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으나, 희빈 장씨의 일을 상소하여 조정이 불안하자 외직을 구하여 청풍부사가 되었다. 38살에 월악산과 단양에 놀았고 화양동으로 송시열을 찾아뵈었다.
다. 전원기(1689, 숙종15년-): 39살에 기사환국이 일어나 벼슬을 내 놓았다. 부친이 진도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고, 송시열도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장례를 치른 후 氷平縣 응암으로 돌아왔다. 40살 되던 해 仲父 金壽興이 장기 배소에서 죽었다. 42살 응암 동쪽 籠巖에 세 칸 畵室을 짓고 農巖樹屋이라고 하여 전원에 살 뜻을 굳혔다. 43살 白雲山寺에서 독서하며 ‘五子粹言’을 엮었다. 44살에 양주 奉印寺에서 독서했다. 조정에서 호조참의를 제수했으나, ‘천지간의 죄인’이고 아버지의 謙退하라는 유언에 따른다며 사퇴했으며, 이후 이조참판, 대제학, 예조판서 등 40여 회에 걸쳐 벼슬을 제수했지만 모두 사퇴했다. 농암의 淸瀨 위에 정자를 지었다.
45살 양주 石室書院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다. 46살에 철원으로 형을 만나러 갔고, 횡성에서 문인을 조문하는 길에 淸平 寒溪를 유람하고 ‘東征記’를 썼으며, 수원에 가서 우암의 改葬에 제문 지어 제사했다. 47살에 농암과 渼陰을 왕래하며 제자를 만나고 道峯을 찾았으며, 서울에 계시는 모친을 자주 찾아뵙기 위해 양주 석실서원 옆에 집을 지어 머물며 그곳을 三洲라고 했다. 廣州 水鍾寺에서 부친의 행장을 지었다. 48살에 어머니를 모시고 형이 유수로 있는 강화에 다녀왔다. 49살 동생 昌緝과 조카들을 데리고 송도 천마산을 구경하고 강화를 둘러보고 三洲로 돌아왔다.
50살에 향음주례에 참석했고, 딸 吳氏婦와 19살 된 아들 숭겸이 죽었다. 51살에 ‘四端七情說’을 지었다. 53살에 딸 李氏婦가 죽었고, 모친상을 당했다. 55살에 복을 벗고 삼주로 돌아왔다. 57살에 外兄 李濡의 이웃인 鹿川에 머물다가 道峰을 찾고, 水落山 玉流洞, 妙寂寺 등에 놀았다. 58살에 형과 함께 前江에서 배를 타고 觀魚했으며, 妙寂寺에 놀았다. 4월 11일에 三洲 正寢에서 죽었다. 金昌協, 앞의 책, 卷35-6, 附錄, 年譜, 618-639쪽 참조. 숙종실록CD. 참조.
그의 특징을 ① 천품이 청수하고, ② 문장과 시에 빼어난 재능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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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18
  • 저작시기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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