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성주신앙
Ⅱ. 창조신앙
Ⅲ. 진묵신앙
Ⅳ. 가신신앙
Ⅴ. 하늘신앙
1. 신앙 대상의 고유한 이름
2. 민중 속에 나타난 하느님, 증산
Ⅵ. 삼신신앙
Ⅶ. 미륵신앙
참고문헌
Ⅱ. 창조신앙
Ⅲ. 진묵신앙
Ⅳ. 가신신앙
Ⅴ. 하늘신앙
1. 신앙 대상의 고유한 이름
2. 민중 속에 나타난 하느님, 증산
Ⅵ. 삼신신앙
Ⅶ. 미륵신앙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회의 나태와 위선에 비수를 들이댄 셈이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진묵대사의 파계 행각에 대한 이야기는 僧과 俗의 차별을 극복하고, 생활과 수양을 둘이 아니라 하나로 혁신하기를 바랐던 민중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둘째, 구비 전승에서는 진묵대사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을 도와주는 자비의 화신으로 파악되어 있다. 가난한 누님의 살림을 보태주기 위하여 하늘 나라의 三星을 누님 집으로 불러들인 일하며, 누이의 귀가 길을 밝히기 위하여 밤이 새도록 해를 하늘에 붙들어 놓은 일이 그러한 예이다.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가난한 누님이란, 보기에 따라서는 바로 힘 없고 재산 없는 민중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축약시켜 놓은 것이다. 따라서 누님을 돕는 진묵대사는 민중을 도탄에서 구제할 제세의생의 영웅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누님이 곧 민중의 상징이라는 해석에 대하여는 물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남 고흥군 점암면 남열리에서 채록된 다음과 같은 설화는 필자의 논지를 한층 강화시켜 주고 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해 보자면 대강 다음과 같다.
진묵대사는 돌 일곱 개를 주워다가 도암사에서 매일 같이 염불하였다. 그러자 하늘의 북두칠성이 빛을 잃었다. 임금이 천문을 관측하는 일관(日官)에게 그 원인을 물었더니, 크게 積善을 해야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모든 죄수를 석방시켰다. 결국 진묵대사는 도술로써 옥에 갇힌 많은 죄수를 석방시킨 셈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구제의 대상이 되어 있는 죄수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자그마한 죄를 범한 불쌍한 사람들, 또는 권력의 횡포에 희생이 되고 만 민중 자신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바로 그러하였기 때문에, 구비 전승에서는 풀려난 죄수들이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진묵대사에 대한 비판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진묵대사의 자비심에 대한 민중의 인식은 마침내 그를 부처의 화신으로까지 여기게 만들었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전하고 있는 구비 전승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진묵대사는 일찍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북하면의 운문암에 왔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는 차를 끓여서 神衆들에게 공양하라는 소임이 배당되었다. 그러자 신중들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서 차를 바치는 소임을 바꾸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이유인 즉, 어린 진묵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신중들로서는 부처님의 공양을 받기가 너무도 죄송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셋째, 구비 전승에서는 진묵대사가 불법의 중흥을 한 몸으로 담당할 큰 인물인 동시에, 한국의 근대화를 이룩할 영웅으로 인식된 사실이 발견된다. 불법을 상징하는 진묵대사가 유학자를 대변하는 김봉국과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각지에 퍼져 있는데, 이는 진묵대사를 護法과 불교 重唱의 주체로 파악한 민중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진묵대사가 도술을 이용하여 수백리 떨어진 곳에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화재를 단숨에 진압하였다는 이야기는 그의 호법적 성격을 말한다. 그에 비하여, 진묵대사가 몸뚱이를 절간에 두고 영혼만 서역으로 날라가서 불경을 구해 왔다는 이야기는 불교의 부흥을 기대하던 민중의 염원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역으로 날아갔던 진묵대사의 영혼은 불경을 가져오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불법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학자인 김봉국이 진묵대사가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 신체를 화장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법의 중흥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유교와의 대립에서 실패하였던 불교의 참패라고 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민중의 날카로운 인식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민중은 진묵대사를 무력한 패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영혼만 남은 진묵대사가 도술을 부림으로써 김봉국의 마을은 사실상 폐촌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각지의 전승에서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요컨대, 민중은 불법을 중흥시킬 진묵대사가 살아서 다시 이 땅에 오기를 수백 년 동안이나 염원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금강산 연기도량설과 미륵 신앙의 전통위에서 불법을 중흥시키고자 한 대종사가 진묵대사의 화신임을 선언하였을 때, 그것이 민중들 사이에 과연 어떠한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을지는 이미 자명한 것이다.
유교를 국시로 걸었던 조선 오백년의 왕조가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침몰하게 되었을 때, 망한 것은 왕실을 포함한 유교적 지배계급만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서양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서 이웃 나라를 무력으로 합병시키는 데에 성공한 일본 식민주의에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은, 힘 없고 배움도 없는 이 땅의 민중이었다. 따라서 일제 침략의 마수에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선뜻 항복해 버린 유교적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분노는 실로 컸다. 사정이 그러하였기에, 민중은 유교와의 싸움에서 지고 만 그들의 영웅 진묵대사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필자의 추측을 밑받침하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사는 한 노인은 진묵대사의 서역 여행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진묵대사가 여행을 떠나면서 제자에게 말하기를) 서천 서역국에 가서, 지금으로 말하면 서양이든 개비여(모양이야). 거기 가서 기계화를, 기계를 잘 배워 가지고 와서 동양에다 발전시키다 보면, 우리 나라가 훨씬 발전이 쉽게 될 것이다. 그 기술을 배우러 갈란다. 기술을 잘 배와(워) 가지고 와서, 병이 나도 좋은 약을 써가지고 잘 낫게 허(하)고, 농사도 잘 짓게 허(하)고, 좋은 법을 배와(워) 가지고 올 테니 당최(당초) 너그(너희)들 나 죽었다고 말허(하)지 말고 발상허(하)지 말아라.” 그런가 하면, 전남 고흥군 점암면 남열리에서 채집된 구비 전승에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진묵대사는 도통헌(한) 분이여(야). 우리 나라를 서양처럼 개화를 시키려고 포부를 가졌거든. 그래서 천상에 있는 하늘 나라, 천상의 생활 양식 그대로 본떠다가, 이 지상에 낙원을 건설 하려고 꿈을
둘째, 구비 전승에서는 진묵대사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을 도와주는 자비의 화신으로 파악되어 있다. 가난한 누님의 살림을 보태주기 위하여 하늘 나라의 三星을 누님 집으로 불러들인 일하며, 누이의 귀가 길을 밝히기 위하여 밤이 새도록 해를 하늘에 붙들어 놓은 일이 그러한 예이다.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가난한 누님이란, 보기에 따라서는 바로 힘 없고 재산 없는 민중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축약시켜 놓은 것이다. 따라서 누님을 돕는 진묵대사는 민중을 도탄에서 구제할 제세의생의 영웅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누님이 곧 민중의 상징이라는 해석에 대하여는 물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남 고흥군 점암면 남열리에서 채록된 다음과 같은 설화는 필자의 논지를 한층 강화시켜 주고 있다. 그 이야기를 요약해 보자면 대강 다음과 같다.
진묵대사는 돌 일곱 개를 주워다가 도암사에서 매일 같이 염불하였다. 그러자 하늘의 북두칠성이 빛을 잃었다. 임금이 천문을 관측하는 일관(日官)에게 그 원인을 물었더니, 크게 積善을 해야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모든 죄수를 석방시켰다. 결국 진묵대사는 도술로써 옥에 갇힌 많은 죄수를 석방시킨 셈이 된다. 이 이야기에서 구제의 대상이 되어 있는 죄수란,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자그마한 죄를 범한 불쌍한 사람들, 또는 권력의 횡포에 희생이 되고 만 민중 자신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 것이다. 바로 그러하였기 때문에, 구비 전승에서는 풀려난 죄수들이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진묵대사에 대한 비판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진묵대사의 자비심에 대한 민중의 인식은 마침내 그를 부처의 화신으로까지 여기게 만들었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전하고 있는 구비 전승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진묵대사는 일찍이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출가하여 북하면의 운문암에 왔다고 한다. 어린 그에게는 차를 끓여서 神衆들에게 공양하라는 소임이 배당되었다. 그러자 신중들이 주지 스님의 꿈에 나타나서 차를 바치는 소임을 바꾸어 달라고 당부하였다. 그 이유인 즉, 어린 진묵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신중들로서는 부처님의 공양을 받기가 너무도 죄송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셋째, 구비 전승에서는 진묵대사가 불법의 중흥을 한 몸으로 담당할 큰 인물인 동시에, 한국의 근대화를 이룩할 영웅으로 인식된 사실이 발견된다. 불법을 상징하는 진묵대사가 유학자를 대변하는 김봉국과 첨예한 대립 관계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각지에 퍼져 있는데, 이는 진묵대사를 護法과 불교 重唱의 주체로 파악한 민중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다. 진묵대사가 도술을 이용하여 수백리 떨어진 곳에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의 화재를 단숨에 진압하였다는 이야기는 그의 호법적 성격을 말한다. 그에 비하여, 진묵대사가 몸뚱이를 절간에 두고 영혼만 서역으로 날라가서 불경을 구해 왔다는 이야기는 불교의 부흥을 기대하던 민중의 염원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역으로 날아갔던 진묵대사의 영혼은 불경을 가져오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불법 중흥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학자인 김봉국이 진묵대사가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 신체를 화장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법의 중흥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유교와의 대립에서 실패하였던 불교의 참패라고 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민중의 날카로운 인식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민중은 진묵대사를 무력한 패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영혼만 남은 진묵대사가 도술을 부림으로써 김봉국의 마을은 사실상 폐촌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각지의 전승에서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요컨대, 민중은 불법을 중흥시킬 진묵대사가 살아서 다시 이 땅에 오기를 수백 년 동안이나 염원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금강산 연기도량설과 미륵 신앙의 전통위에서 불법을 중흥시키고자 한 대종사가 진묵대사의 화신임을 선언하였을 때, 그것이 민중들 사이에 과연 어떠한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을지는 이미 자명한 것이다.
유교를 국시로 걸었던 조선 오백년의 왕조가 일본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침몰하게 되었을 때, 망한 것은 왕실을 포함한 유교적 지배계급만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서양의 근대 문명을 받아들여서 이웃 나라를 무력으로 합병시키는 데에 성공한 일본 식민주의에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은, 힘 없고 배움도 없는 이 땅의 민중이었다. 따라서 일제 침략의 마수에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선뜻 항복해 버린 유교적 지배계급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분노는 실로 컸다. 사정이 그러하였기에, 민중은 유교와의 싸움에서 지고 만 그들의 영웅 진묵대사를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필자의 추측을 밑받침하는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사는 한 노인은 진묵대사의 서역 여행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진묵대사가 여행을 떠나면서 제자에게 말하기를) 서천 서역국에 가서, 지금으로 말하면 서양이든 개비여(모양이야). 거기 가서 기계화를, 기계를 잘 배워 가지고 와서 동양에다 발전시키다 보면, 우리 나라가 훨씬 발전이 쉽게 될 것이다. 그 기술을 배우러 갈란다. 기술을 잘 배와(워) 가지고 와서, 병이 나도 좋은 약을 써가지고 잘 낫게 허(하)고, 농사도 잘 짓게 허(하)고, 좋은 법을 배와(워) 가지고 올 테니 당최(당초) 너그(너희)들 나 죽었다고 말허(하)지 말고 발상허(하)지 말아라.” 그런가 하면, 전남 고흥군 점암면 남열리에서 채집된 구비 전승에도 같은 취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진묵대사는 도통헌(한) 분이여(야). 우리 나라를 서양처럼 개화를 시키려고 포부를 가졌거든. 그래서 천상에 있는 하늘 나라, 천상의 생활 양식 그대로 본떠다가, 이 지상에 낙원을 건설 하려고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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