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는 말
2. 본론
1) 보나벤투라의 생애
2) 보나벤투라의 작품
3) 보나벤투라의 사상적 배경
- 성 어거스틴의 사상
- 성 프란시스의 영성
4)『하나님과 하나 되어』
3. 나가는 말
2. 본론
1) 보나벤투라의 생애
2) 보나벤투라의 작품
3) 보나벤투라의 사상적 배경
- 성 어거스틴의 사상
- 성 프란시스의 영성
4)『하나님과 하나 되어』
3. 나가는 말
본문내용
life. The Life of St. Francis, translation and introduction by Ewert Cousins: preface by Ignatius Brady, OFM,(New Yo가:Press. 1978),182-183
그러다가 1235년에 보나벤투라는 예시의 그레센찌오(Crescentio da Jesi)의 추천으로 파리로 유학하게 된다. 파리는 당시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자 학문의 중심지였고, 전세게의 유명한 젊은이들이 출세를 하고자 모여드는 곳이었다. 보나벤투라는 대학에서 문학부를 거쳐 6년동안 수사학, 문법, 논리학, 철학 등을 배워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년간 조교로서 문학부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또 연구 활동을 하면서 1246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6.
그러므로 보나벤투라가 당시 문학부에서 가장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사상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깊은 고민과 확신 끝에 문학부의 유혹을 뿌리치고 프란시스코회에 입회하게 된다.
당시 프란시스코회에는 할레스의 알렉산더라는 유명한 스승이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알렉산더를 아버지와 스승으로 모시고 신학수업, 회칙에 대한 강의 및 연구, 개인 수련활동 등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248년 성서학사(Baccelliere Bielico)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를 도우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에게 지정된 본문은 『루가복음주석』이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7.
이렇게 2년동안 성서공부를 마치고, 그는 다시 “명제학 학사 (Baccelliere Seentenziario)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13세기 모든 신학 연구의 고전이라고 취급되던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을 읽고 철저하게 준비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강독하며 해설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이것을 토대로 그의 신학 대표작인 『명제집 주석서』를 출판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 종합시험을 통과한 보나벤투라는 125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정식교수(Magister)이 되었으나 당시 대학 문제로 인해 1257년 그의 친구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7.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교수로서 『삼위일체 신비 토론집』, 『복음적 완덕 토론집』등을 집필 하였고, 학자이자 연구가로써 『신학요강』, 『모든 학문의 신학에로의 환원』등를 또한 설교가로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삼중적 증언』,『그리스도의 영광』,『크리스챤 생활의 결실』,『크리스챤 완덕의 위대성』등 각종 설교집을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스콜라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에 당시 프란체스코회(작은 형제회)에 두 개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소위 ‘신령파‘와 ’온건파‘로 구분되었는데 ‘신령파‘는 수도원의 세속화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요아킴(Joachim of Fiore)사상‘을 받아들여 열광주의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으며, ’온건파‘는 다수의 수정주의적 프란체스칸들로 영적인 의미의 청빈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수도회의 대립및 심각한 분열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Roviggi, Sofia,『성 보나벤투라』, 이재룡 역, (서울:카톨릭대학출판부, 2001), 11.
이러한 상황에서 보나벤투라는 프란체스코의 절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7대 총장에 지명되었다. 그러자 탁발수도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교황 알렉산드로 4세를 비롯하여 수도회 내의 모든 형제들은 이러한 결정을 환영했다.
하지만 보나벤투라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래서 1257년 보나벤투라는 총장에 취임하여 일차적으로 ’요아킴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여러 가지 난제들을 해결한 후에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프란체스코회의 창시자인 성 프린치스코가 성흔을 체험하고 은혜를 받았던 라베르나 산을 찾게 된다. 그때 보나벤투라는 라베르나 산에서 성 프린치스코가 체험했던 십자가의 신비를 똑같이 경험함으로 자신의 소명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영성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신비신힉”적인 양상을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때 저술한 유명한 The Journey of the Mind to God 을 통하여 보나벤투라는 그의 초창기 스콜라주의적인 모습으로부터 탈피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는 마음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총장으로 수도회를 돌보면서 『세가지 길』,『신비의 포도나무』,『아기 예수의 다섯 축제』,『완전한 삶』등을 저술하는데, 이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 신비신학”으로 프란치스칸의 영성과 신학을 통합하고 강조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또한 1260년 나르본 총회의 결정으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대전기, 소전기』를 집필하여 내부적 비젼을 새롭게 했고, 탁발수도회와 교구 사제들간의 불협화음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파리 대학에서 학술 강연회를 열어 수도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 복음적 기초를 재확인하였는데, 특히 이 기간에 보나벤투라 『십계명에 대한 해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부당성을 지적하였고,『성령의 일곱가지 은사』,『핵사메론:6일간의 창조』를 통해서 성서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전통과 신앙을 충실히 따를 것을 강조하면서 그의 영성은 점점 신비주의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완전히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8-29
그리고 이제 그의 명성은 로마 교황청에까지 미쳐 1272년 클레멘스 4세의 서거우 지연된 차기 교황에 보나벤투라가 추천한 그레고리 10세가 오름으로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 해 그레고리 10세는 보나벤투라를 알바노의 주교와 추기경에 임명하였는데, 이제까지 파리대학의 교수와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 성업을 수행하고 있었던 보나벤투라로서는 이를 수락한다는 것이 그의 건강상 대단히 어려운 알이었지만, 그는 제자이자 교황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그러다가 1235년에 보나벤투라는 예시의 그레센찌오(Crescentio da Jesi)의 추천으로 파리로 유학하게 된다. 파리는 당시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자 학문의 중심지였고, 전세게의 유명한 젊은이들이 출세를 하고자 모여드는 곳이었다. 보나벤투라는 대학에서 문학부를 거쳐 6년동안 수사학, 문법, 논리학, 철학 등을 배워 우수한 성적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년간 조교로서 문학부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또 연구 활동을 하면서 1246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6.
그러므로 보나벤투라가 당시 문학부에서 가장 맹위를 떨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사상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는 깊은 고민과 확신 끝에 문학부의 유혹을 뿌리치고 프란시스코회에 입회하게 된다.
당시 프란시스코회에는 할레스의 알렉산더라는 유명한 스승이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알렉산더를 아버지와 스승으로 모시고 신학수업, 회칙에 대한 강의 및 연구, 개인 수련활동 등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248년 성서학사(Baccelliere Bielico)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를 도우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그에게 지정된 본문은 『루가복음주석』이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7.
이렇게 2년동안 성서공부를 마치고, 그는 다시 “명제학 학사 (Baccelliere Seentenziario)
과정을 밟게 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13세기 모든 신학 연구의 고전이라고 취급되던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을 읽고 철저하게 준비해서 많은 학생들에게 강독하며 해설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이것을 토대로 그의 신학 대표작인 『명제집 주석서』를 출판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최종 종합시험을 통과한 보나벤투라는 125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정식교수(Magister)이 되었으나 당시 대학 문제로 인해 1257년 그의 친구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7.
이 기간 동안에 그는 교수로서 『삼위일체 신비 토론집』, 『복음적 완덕 토론집』등을 집필 하였고, 학자이자 연구가로써 『신학요강』, 『모든 학문의 신학에로의 환원』등를 또한 설교가로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삼중적 증언』,『그리스도의 영광』,『크리스챤 생활의 결실』,『크리스챤 완덕의 위대성』등 각종 설교집을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직 스콜라주의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던 중에 당시 프란체스코회(작은 형제회)에 두 개 분파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소위 ‘신령파‘와 ’온건파‘로 구분되었는데 ‘신령파‘는 수도원의 세속화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요아킴(Joachim of Fiore)사상‘을 받아들여 열광주의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으며, ’온건파‘는 다수의 수정주의적 프란체스칸들로 영적인 의미의 청빈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은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수도회의 대립및 심각한 분열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Roviggi, Sofia,『성 보나벤투라』, 이재룡 역, (서울:카톨릭대학출판부, 2001), 11.
이러한 상황에서 보나벤투라는 프란체스코의 절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7대 총장에 지명되었다. 그러자 탁발수도회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교황 알렉산드로 4세를 비롯하여 수도회 내의 모든 형제들은 이러한 결정을 환영했다.
하지만 보나벤투라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그래서 1257년 보나벤투라는 총장에 취임하여 일차적으로 ’요아킴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여러 가지 난제들을 해결한 후에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 프란체스코회의 창시자인 성 프린치스코가 성흔을 체험하고 은혜를 받았던 라베르나 산을 찾게 된다. 그때 보나벤투라는 라베르나 산에서 성 프린치스코가 체험했던 십자가의 신비를 똑같이 경험함으로 자신의 소명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의 영성은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신비신힉”적인 양상을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이때 저술한 유명한 The Journey of the Mind to God 을 통하여 보나벤투라는 그의 초창기 스콜라주의적인 모습으로부터 탈피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는 마음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총장으로 수도회를 돌보면서 『세가지 길』,『신비의 포도나무』,『아기 예수의 다섯 축제』,『완전한 삶』등을 저술하는데, 이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 신비신학”으로 프란치스칸의 영성과 신학을 통합하고 강조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또한 1260년 나르본 총회의 결정으로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대전기, 소전기』를 집필하여 내부적 비젼을 새롭게 했고, 탁발수도회와 교구 사제들간의 불협화음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파리 대학에서 학술 강연회를 열어 수도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 복음적 기초를 재확인하였는데, 특히 이 기간에 보나벤투라 『십계명에 대한 해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부당성을 지적하였고,『성령의 일곱가지 은사』,『핵사메론:6일간의 창조』를 통해서 성서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전통과 신앙을 충실히 따를 것을 강조하면서 그의 영성은 점점 신비주의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완전히 변모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홍재『보나벤투라의 그리도 중심적 신비신학』, 28-29
그리고 이제 그의 명성은 로마 교황청에까지 미쳐 1272년 클레멘스 4세의 서거우 지연된 차기 교황에 보나벤투라가 추천한 그레고리 10세가 오름으로 극에 달했다. 그리고 그 해 그레고리 10세는 보나벤투라를 알바노의 주교와 추기경에 임명하였는데, 이제까지 파리대학의 교수와 프란치스코회의 총장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 성업을 수행하고 있었던 보나벤투라로서는 이를 수락한다는 것이 그의 건강상 대단히 어려운 알이었지만, 그는 제자이자 교황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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