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을 전후한 한중일 삼국의 사회경제와 대응전략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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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항을 전후한 한중일 삼국의 사회경제와 대응전략의 비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조선의 개항기의 상황

전통적 세계의 고수

서구적 근대의 탐색

중국의 몰락과 아편전쟁

내란

양무운동

개항후 중국의 경제

일본의 메이지유신

도쿠가와 평화와 막부체제

대외 문제 발생과 쇄국 체제

메이지유신과 문명개화

한중일의 위기인식

만국공법

중국

일본

한국

한중일의 위기대응(국내)

헌정

동아시아 3국의 산업화 비교

근대로의 길

본문내용

다. 대구지역의 인구구성 변화를 보면 양반이 전체의 8.3% 평민이 51.1% 천민이 40.1%를 차지하였으나(17세기 후반) 19세기 후반들어서는 양반이 전체의인구의 65.6% 평민이 32.8% 천민이 0.5%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구성비는 신분질서에 근거한 비공식적 통제력이 더 이상 행사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는 외적 위기를 들을수 있다.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들은 지속적으로 조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러시아 등이 그러한 국가들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세력들은 조선보다는 중국과 일본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들에 의한 위기를 두 나라보다는 피하기가 쉬웠다. 일본은 그러나 조선에 대해 관심이 컸고 결국 조선은 1876년 외국에 문을 열게 되었다.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성공시켰고 일본은 계속해서 국교정상화를 요구했다. 명치유신 이전까지 양국의 관계는 형식적으로 불평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사신은 일본에 가면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일본의 사신은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인정을 받지 않았고 쯔시마의 사신만 접견을 허용했다고 한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그리고 일본을 변방으로 인식하던 동사이사의 전통적 세계관에 의해 정당화되던 이 관계는 명치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체제로 되돌아가면서 근본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열려고 하였고 1875년 운요오호를 항로측량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도 앞바다에 파견했고 이를 공격한 조선군에 대해 월등히 우세한 무력으로 초지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후 영종진을 점령했다. 그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의 문호개방을 유도했다.강화도 조약은 고등학교때 배워서 알다시피 불평등 조약이였다.삼항의 개항요구 조선 해안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허용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치외법권 인정등이 그러한 예이다.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여러나라들이 비슷한 내용으로 외교관계를 요구해왔고, 이미 국력이 쇠퇴해가던 조선으로서는 이들의 요구를 물리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892년 이후 조선정부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속으로 조선을 몰아넣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살아왔던 많은 조선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세계의 중심이 흔들리는 혼라이었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이전에는 자신들의 생활과는 무관했던 바깥세계의 일들이 직접적으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것이었다.
전통적 세계의 고수
19세기에 나타난 조선의 위기는 안과 밖으로부터 동시에 나타난 것이었다. 내적 위기가 상당히 오래 지속된 만성적인 것이었다면 바깥으로부터 오는 위협은 즉각적이며 가시적이었다. 따라서 조선사회가 안으로부터 무너져 가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일수 있었지만 바깥에서오는 압력은 좀더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다. 바깥에서 오는 압력은 그동안 지켜왔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시각이 필요했다. 하지만 위정척사론자로 불리는 당시의 일부 유학자들은 전통적인 조선의 정체성과 전통적인 세계관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다. 조선의 전통적 지식인들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었는데 중심에는 문화를 이룬 중국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야만이 있었다. 조선의 전통적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이항로 최익현 유인석 등의 유학자들중 하나인 유인석이 말하길 ‘중국은 세계의 주류이며 하늘과 땅의 중심이다. 중국이 바로 서면 세계가 인정되고 천지가 이루어진다. 중국이 넘어지면 세계가 어지러워지고 천지가 무너진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에 의하면 서양은 야만의 무리일뿐 아니라 사악한 무리였다. 이항로가 생각하길 도덕을 추구하는 중국과 조선은 양의 기운으로 구성되어있는 반면 도덕은 상실한 채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서양은 음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양의 기운을 가진 조선이 음의 기운을 가진 서구에 비해 한결 우월할수밖에 없으며 조선은 서구와의 접촉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 위정척사론자들은 서구와의 교역도 조선에게는 전혀 이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지녔다. 서구의 공산품은 얼핏 사람에게 편리한 것 같아 보이나 실상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켜 피폐하게 만들며 도덕과 예의를 타락시킬 것이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겼다. 교역을 함에 있어서 조선의 농산품은 1년을 생산해도 부족하고 서구의 공산품은 하루를 생산해도 남으므로 이것을 교환한다는 것은 조선에게 불리한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교역에서도 서구열강과 우리나라의 무역에서는 힘의 논리에 의해 불공적무역이였으므로 어느정도 서구와의 무역의 불공정성을 나타내주기도 했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조선의 위기는 서구의 도입을 통해 극복되는것이 아니라 서구의 배척을 통해서만 극복될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탐색
19세기 후반에 앞서 말했던 조선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려는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달리 서구가 조선이나 중국에 앞서 근대화를 이룬 것으로 판단하고 어떤 형태로는 이를 도입하려는 시도도 동시에 일어났다.
이러한 태도는 국정운영의 현실적 책임을 지고 있던 집권층을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이들은 조선을 근대적 세계로부터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이 곧 조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쇄국정책을 추진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체제가 확립되면서 표면화되었다. 고종은 1876년과 1880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서구의 문물에 대해 배우도록 했으며,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이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편하여 국정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조선의 집권층이 이러한 개방적 태도를 보인 이유는 개항을 통해 확인된 일본의 힘이 서구적 근대화에 기반하고 있음을 인식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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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8.06
  • 저작시기2011.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93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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