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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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청준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언어와 현실의 갈등
2. 이청준의 생애
1) 부끄러운 고향, 미운 고향
2) 적응할 수 없었던 도회지 생활
3) 다시 고향으로. 그 곳은 따뜻한 곳
3. 이청준의 작품세계
1) 도시를 이야기한 그의 작품
2) 고향을 이야기한 그의 작품
3) '당신들의 천국’에 나타난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맞았으리라><오래전부터 계획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남겨두고 싶은 유일한 소지물이었음이 틀림없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는 반면에, 예문2)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든가 <아무래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만 같다>는 추측이 들어 있다. 이러한 추측을 통해서 이청준의 화자는 독자의 호기심을, 아니 독자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자기 자신이 앞으로 그 소설 속에서 해야 할 일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소설의 서두에서 독자와 함께 한 화자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리고 사실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를 띠는지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찾아가기 위해서 화자는 언제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을 하면서도 그걸 지금 당장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처럼 몇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하려면 그 추측의 전제 조건에 해당하는 정보들을 화자가 제공할 수 밖에 없고, 그런 점에서 화자가 독자보다 다소간 많은 정보를 갖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된다. 이와같은 현상이 <병신과 머저리>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그의 칼끝이 열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낸 사건과 깊이 관계가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수술의 실패가 꼭 형의 실수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해자쪽이 그렇게 생각했고, 근 십 년 동안 구경만 해오면서도 그쪽에 전혀 무지하지만은 않은 나의 생각이 그랬다.
<병신과 머저리>
여기에서도 이미 두 가지 중요한 정보가 화자에 의해 제공되고 있지만 그 두 정보 사이의 관계는 추측으로 나타나 있을 따름이다. 즉 형이 소설을 쓴다는 정보와, 의사인 그 형이 수술한 그녀가 달포 전에 죽었다는 정보는 화자가 독자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두 사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1)과 2)에서 이미 <무슨 이유>라는 이름으로 제시된 것과 마찬가지로 화자가 만들어낸, 다시 말해서 그 관계에 관하여 독자로 하여금 상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화자가 그 관계에 관한 추측을 하지 않았더라면 독자로서도 그 관계가 어떠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화자가 거론한 이상 독자는 그 화자가 일으켜 놓은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독자의 관점은 이제 화자가 이끄는 대로 화자와 <함께>움직이게 된다. 이것을 화법에서 <동반의 관점>이라고 명명한다면, 이청준 소설은 바로 그 동반의 관점으로 소설적 긴장의 출발점을 삼는다. 이청준의 소설들에게 그 작중인물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의 근본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의 소설속에서 소설을 다루는 작품을 검토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작품에서 이 작가의 소설에 관한 의견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소설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직업인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직업인들이 모두 자기 분야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지 못하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불화 속에 빠져 있다. 그 가운데서 소설가를 직업으로 택하고 있는 주인공의 소설들이 여러 편 있지만 모두 실패한 소설가를 다루고 있다. 가령 <조율사>에서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나>와 좌절을 겪는 평론가 <지훈>이 그렇고 <소문의 벽>에서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소설가 박준의 경우도 마찬가지며, <병신과 머저리>의 형이 소설을 불태우는 것도 소설가로서 스스로의 패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주인공에게 있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문의 벽>에서 주인공은 <작가는 누가 뭐래도 진술을 끊임 없이 계속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족속>이라 하고 있고 <지배와 해방>의 주인공은 <작가는 언제나 그가 도달한 세계에서 또 다른 다음번의 이념의 문을 향해 끝없이 고된 진실에의 순례를 떠나야 하는 숙명적인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발언을 통해서 이청준에게 있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말하는 행위이며 하나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서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예문에서 <누가 뭐래도>라는 조건절은 작가 자신의 글쓰는 행위가 작가의 외부적 조건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개인적 윤리적 결단으로 이루어짐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와 해방>에서 <독자와 사회에 대한 한 작가의 책임이란 그러니까 결국 그의 개인적 삶의 욕망과 독자들의 삶을 위한 어떤 일반적 가치 질서의 실현이라는, 복수가 기여가 되어야 한다는 그 지극히도 이율배반적인 관계 속에서 힘들게 마련되어야 할 운명의 것>이라고 한다.
이청준의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그것이 공포에 의해서건 부끄러움에 의해서건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시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가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이야기며 동시에 그곳은 비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의 부조리성은 어린 시절만의 추억이지 않다는데서 주인공의 보다 큰 비극이 있는 것이다. 즉 뺑소니 사고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배열달은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역사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양진욱이라는 인물과 부딪친다. 그는 금식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을 속이면서 우상이 되었던 일파 선생의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신문에 알리려고 한다. 반면에 양진욱은 일파선생의 금식에 속임수가 있지만 그것이 수행하게 된 역사적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자신의 본래의 직업마저 던져 버리고 <일파 사상 연구회>를 맡고 나선다. 그러나 결과는 일파 선생의 허위 금식에 관한 폭로 기사가 신문에 나간 것이 아니라 그 기사를 배영달 기자의 뺑소니 사고에 의한 사망 기사가 나난 것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주인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이 몇 사람의 독점 물로 바뀌는 모순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모순을 드러내고자 기사를 쓴 순간에 우연인지 아닌지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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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13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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