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48)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431~404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복 전쟁(기원전336~323년)
포에니 전쟁(기원전264~146년)
카이사르의 삼두 정치 시대 전쟁(기원전60~44년)
고구려 vs 수․당 전쟁 (598~645년)
십자군 전쟁(1095~1291년)
몽골의 정복 전쟁 (1206~1368년)
백년 전쟁(1337~1453년)
오스만 투르크와 동로마 제국전쟁 (1302~1461년)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9~448)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431~404년)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정복 전쟁(기원전336~323년)
포에니 전쟁(기원전264~146년)
카이사르의 삼두 정치 시대 전쟁(기원전60~44년)
고구려 vs 수․당 전쟁 (598~645년)
십자군 전쟁(1095~1291년)
몽골의 정복 전쟁 (1206~1368년)
백년 전쟁(1337~1453년)
오스만 투르크와 동로마 제국전쟁 (1302~1461년)
본문내용
의 대부분은 바보스럽다.\"고 공격했다. 또, 아리조나 리퍼블릭의 빌 멀러는 \"나는 스톤 감독을 필름메이커로서 존경하지만,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기 보다는 지치게 만든다.\"고 평했고, 버라이어티의 토드 맥카시는 \"이 지적이고 야심찬 영화는 결정적으로 드라마적인 감각과 감정 이입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으며, 뉴욕 포스트의 루 루메닉은 \"리차드 버튼이 똑같이 블론드 머리를 하고 나와 무엇인가 불편해 보였던 1956년작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지루하다.\"고 혹평을 가했으고, 뉴욕 데일리 뉴스의 잭 매튜스는 영화를 감상한 후, 어떻게 알렉산더가 25세의 나이로 알려진 세계 대부분을 정복했는지 알게 되었다면서 \"아마도 그는 모든 이를 지루하게 만들어서 항복을 받아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세 시간 길이 영화의 지루함에 가장 먼저 항복해버렸다.\"고 비아냥거렸다.
계속해서 영화와 연결해서 보니 너무나도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포에니 전쟁(기원전264~146년)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주요 원인은 당시 지중해에 패권을 잡은 카르타고와 새로이 떠오르는 로마의 이해 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다)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당시 두 나라는 병력 수십만을 잃으며, 로마는 결국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수도를 파괴하여 서부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일어난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나고, 동부 지중해에서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면서,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에서 패권국이 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섬 쟁탈전을 두고 일어난 전쟁인데 시칠리아 섬 안에 있던 메시나와 시라쿠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두 나라가 가각 로마와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은근히 시칠리아를 넘보고 있던 로마가 병력을 파견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로마가 승리하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탈리아 외에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하고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가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었으며 지중해 서부의 재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사이의 세 번째 전쟁은 카르타고의 멸망과 그 도시의 완전한 파괴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점차 부와 해운력을 키운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의 反로마세력의 부활에 힘입어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다.
로마가 마케도니아 전쟁에 돌입하고 새로 획득한 히스파니아의 안정에 힘쓰는 동안 카르타고는 군사력없는 단일 도시국가로 자신들의 내부문제에도 로마의 개입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누미디아에서 일어난 반란에 로마가 개입하였는데 로마는 親누미디아 정책으로 일관하여 카르타고의 반감을 샀다. 새로 집권한 카르타고의 군사세력은 많은 로마인에게 불안을 조성하고 급기야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해왔다. 카르타고는 이 요구를 묵살하여 세 번째 전쟁에 돌입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할만큼 거세게 저항했으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2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폐허로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삼두 정치 시대 전쟁(기원전60~44년)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승리하면서 지중해 서쪽을 장악을 하게 되고 그리스마저 정복하여 마침내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의 대외 평창의 출발점에 위대한 독재자 카이사르가 등장하게 됩니다. 서양 역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만큼 많은 유행어를 남긴 사람도 드뭅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남긴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일 겁니다.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며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다소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집을 비운 사이 자신들의 밭은 황폐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신흥 귀족이 농민들의 농지를 헐값에 사들여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만들었습니다.
농사 지을 토지는 그만두고 살 집마저 없어진 농민들은 대농장에 고용되어 일하거나 거지로 전락했습니다. 로마 사회를 받쳐 주던 자영 농민들이 몰락하고 라티푼디움으로 부를
계속해서 영화와 연결해서 보니 너무나도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포에니 전쟁(기원전264~146년)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주요 원인은 당시 지중해에 패권을 잡은 카르타고와 새로이 떠오르는 로마의 이해 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다)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당시 두 나라는 병력 수십만을 잃으며, 로마는 결국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수도를 파괴하여 서부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일어난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나고, 동부 지중해에서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면서,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에서 패권국이 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 섬 쟁탈전을 두고 일어난 전쟁인데 시칠리아 섬 안에 있던 메시나와 시라쿠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두 나라가 가각 로마와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은근히 시칠리아를 넘보고 있던 로마가 병력을 파견하면서 일어난 전쟁이다. 로마가 승리하였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해서 기원전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탈리아 외에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그리스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격돌했으나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하고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가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었으며 지중해 서부의 재해권과 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로마 공화정과 카르타고사이의 세 번째 전쟁은 카르타고의 멸망과 그 도시의 완전한 파괴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점차 부와 해운력을 키운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의 反로마세력의 부활에 힘입어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다.
로마가 마케도니아 전쟁에 돌입하고 새로 획득한 히스파니아의 안정에 힘쓰는 동안 카르타고는 군사력없는 단일 도시국가로 자신들의 내부문제에도 로마의 개입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누미디아에서 일어난 반란에 로마가 개입하였는데 로마는 親누미디아 정책으로 일관하여 카르타고의 반감을 샀다. 새로 집권한 카르타고의 군사세력은 많은 로마인에게 불안을 조성하고 급기야 기원전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해왔다. 카르타고는 이 요구를 묵살하여 세 번째 전쟁에 돌입했고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성전을 벌였다. 카르타고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활의 시위로 쓰게 할만큼 거세게 저항했으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2년에 걸친 공격으로 결국 카르타고 도시를 함락하고. 주민을 완전히 축출했으며 도시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려 폐허로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삼두 정치 시대 전쟁(기원전60~44년)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을 승리하면서 지중해 서쪽을 장악을 하게 되고 그리스마저 정복하여 마침내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의 대외 평창의 출발점에 위대한 독재자 카이사르가 등장하게 됩니다. 서양 역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만큼 많은 유행어를 남긴 사람도 드뭅니다. 그가 남긴 말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남긴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일 겁니다.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며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다소 황당한 일을 겪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집을 비운 사이 자신들의 밭은 황폐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신흥 귀족이 농민들의 농지를 헐값에 사들여 라티푼디움이라는 대농장을 만들었습니다.
농사 지을 토지는 그만두고 살 집마저 없어진 농민들은 대농장에 고용되어 일하거나 거지로 전락했습니다. 로마 사회를 받쳐 주던 자영 농민들이 몰락하고 라티푼디움으로 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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