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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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광해군!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2

Ⅱ. 광해군때의 당쟁
1. 광해군 왕위 계승 과정

3

2. 임해군의 옥사

3

3. 인목대비의 폐비와 서궁 유폐

4

Ⅲ. 인조반정
1. 인조반정의 원인

5

1) 계축옥사

5

2) 인목대비 페모 사건

5

2. 인조반정 이후

6

Ⅳ. 광해군일기

6

Ⅴ. 광해군이 남긴 대외정책과 내정

1. 광해군의 외교정책

8

1) 광해군이 집권 했을 당시의 조선과 주변 정세

8

⑴ 조선의 상황

8

⑵ 명과 후금(청)의 상황

8

2) 광해군의 외교정책

9

⑴ 대명 외교

9

⑵ 대후금 외교

9

2. 대내 정책

10

1) 궁궐 복원 사업 및 신축 사업

10

2) 서적 편찬 및 보급 사업

10

3) 조세 제도 개혁

11

4) 수도 이전 사업

12

Ⅵ. 광해군에 대한 평가

13

참고문헌

15

본문내용

단지 현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바꾸어 내도록 한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제도가 백성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이 제도가 모두에게 얼마나 획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이 제도를 경기도 지역부터 시행하였다. 왜란 이후 전국토의 반 이상이 황폐해져 농민들의 삶은 극도로 어려웠기 때문에 ‘대동법’의 시행은 백성에게 압박으로 다가온 공납제도를 개혁하여 조세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의도였으나 이는 양반 지주층의 반발을 몰고 왔다. 빼앗긴 기득권을 되찾으려고 반발하는 권력층과 생존을 위해 절박하게 호소하는 농민들 사이에서 광해군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득권층의 반발을 잠재우고 민생을 회복시키기 위한 개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했을 것이다.
4) 수도 이전 사업
광해군이 시행했던 정책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정책은 수도 이전 사업이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 교하 일대에 신도읍지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다, 왜란 이후 민간에 널리 퍼졌던 풍수지리에 입각한 이씨 왕조 멸망설(정씨가 왕이 된다는)을 일축시키고 사회 전반을 쇄신하기 위해 추진하려 했으나, 전쟁 후 피폐함과 흉년으로 인해 백성의 불만과 인플레이션 유발을 걱정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광해군이 물러남에 따라 정조의 시도가 있기까지 수도 이전은 거론되지 못했다. 수도 이전은 안보를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긍정적 이유로 추진하려 했지만 당시 상황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Ⅵ. 광해군에 대한 평가
광해군! 결과의 시각으로만 보면 그는 분명 ‘패배자’였다. 왕위에 있으면서 아무리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왕위를 빼앗긴 일차적 책임을 분명 그 자신에게 지울 수밖에 없다. 광해군의 몰록은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왕권이 패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조 즉위 이래 관행으로 이어져오던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붕당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이끄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귀결이었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시 상황을 맞아 왕세자로 책봉되었을 때부터 그의 비극적인 최후가 준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왕위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이 결여 때문에, 또 그것을 물로 늘어지려는 세력들 때문에 그는 늘 전전긍긍했다. 스스로 ‘시혜자’ 로 자처하면서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했던 명나라 역시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그의 외교도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 는 강박관념은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빌미를 줄 수 있는 무리한 정책을 낳았다. 궁궐 건설을 비롯한 왕권강화를 위한 포석들은 내치를 헝클어뜨렸다. 더욱이 이이첨 등 대북파가 ‘토역 담당자’를 자임하고 그에게 ‘협조’ 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왕권강화에 편승하여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던 대북파는 잠재적인 정적들까지 씨를 말리려 했고 그 과정에서 ‘폐모살제’와 같은 무리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미 성리학이 국학으로 정착되어가고 그것을 행동의 준칙으로 굳게 신봉하는 사대부들이 주도하던 조선왕조에서 그와 대북파의 정책은 법가(法家)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치의 담당자’ 이자 ‘관료 예비군’ 이었던 사대부 일반의 정서를 무시하고, 그들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조도사로 상징되는 중앙 권력의 힘만으로 영건사업 등을 몰아붙인 것은 사대부들의 긍지를 훼손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권에 등을 돌렸고, 이귀를 비롯한 정변을 꿈꾸던 서인들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결국 광해군은 사대부들이 주도하던 17세기 조선에서 ‘사회통합’을 이루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패’는 내정의 기반이 없는 외교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하지만 일찍이 없었던 대전란을 겪은 뒤 왕위에 올랐던 그가 내정과 대외정책에서 남긴 치적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을 일선에서 직접 겪었고, 그것이 남긴 참상을 직접 보았으며, 또 분조를 이끌고 전란을 극복코자 노력했던 그는 국왕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왕위에 오른 뒤 전란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은 각별했다. 정파 사이의 대립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대동법을 시행했던 것, 「동의보감」을 반포했던 것, 전란 중 불탄 여러 출판물을 다시 찍어냈던 것, 사고를 다시 정비했던 것 등등 재위 중에 남긴 치적은 볼 만한 것이 많았다. 더욱이 대동법의 시행을 고난 받는 하층 민중에 대한 지배층의 양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왜란 중의 체험이 바탕이 된 그의 대외정책은 분명 탁월하고 일관성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주들 가운데 주변국의 동행과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을 들라면 단연 그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재조지은’에 보답할 것을 강요하면서 조선을 ‘이이제이’를 위한 희생물로 삼으려 했던 명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를 좌절시켰던 것, 막강한 후금의 실체를 인정하여 그들을 다독이면서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적 실력을 쌓았던 것 등은 분명 뛰어난 것이었다. “설사 전쟁이 일어나도 사자(使者)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 는 그의 지론은 주변국에 대한 끊임없는 정보탐색 노력과 맞물려 그가 펼친 대외정책의 기반이 되었다. 후금을 다독이고 명나라를 주물렀던 그의 외교 역량은 바로 주변국을 알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통해 길러졌다. 주변국의 동향에 늘 민감하게 주목하고, 평화의 시간 동안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것, 그것은 광해군이 지녔던 외교 역량의 핵심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임에 틀림없다.
<참고문헌>
◎ 광해군,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 한명기 / 역사비평사 / 2000
◎ 맹꽁이 서당 9 (조선시대 헌종-고종편) / 윤승운 / 웅진주니어 / 2005
◎ 물구나무서서 보는 한국 역사(상) : 반역의 한국사(궁예의 반란 ~ 갑오농민전쟁) / 김현 묵 / 녹진 / 1993
◎ 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선조조 ~ 현종조) / 이성무 / 동방미디어 / 2001
◎ 광해군(光海君) : 외교의 '빛'과 내정의 '그림자 / 한명기 / 수록잡지명 韓國史市民講座 / 발행처 一潮閣 / 2002
◎ KBS 역사스페셜 - 조선 최대의 음모,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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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4.05
  • 저작시기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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