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속요
① 속요란?
② 형성과정
③ 정석가
Ⅱ. 정석가 내용 연구
① 정석가 원문과 해석
② 작품개괄
③ 정석가 제목의 의미에의 의문
④ 의미 구조와 형식
⑤ 역설
⑥ 대중문학적 성격
⑦ 작품이 끼친 영향
Ⅲ 기타 사항
① 악곡상
② 문헌상
③ 노랫말의 양상
① 속요란?
② 형성과정
③ 정석가
Ⅱ. 정석가 내용 연구
① 정석가 원문과 해석
② 작품개괄
③ 정석가 제목의 의미에의 의문
④ 의미 구조와 형식
⑤ 역설
⑥ 대중문학적 성격
⑦ 작품이 끼친 영향
Ⅲ 기타 사항
① 악곡상
② 문헌상
③ 노랫말의 양상
본문내용
Ⅲ 기타 사항
☞ 일반적으로 고려조에 발생했다고 말하던 정석가의 발생시기를 재고하는 글이 있어 간략하게 이를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는 내용이나 형식보다는 악곡과 문헌에 기초해 논지를 진행시켰다.
① 악곡상
☞ 우선 악곡으로서 정석가를 살펴볼 때, 가장 주목되는 점은 서경별곡과의 유사성이다.
위의 악보에서 드러나듯이 A~D에 이르기까지 두 곡은 선율의 양상, 유사 선율단위의 배열순서에 있어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곡이 동종이형(同種異形)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는데, 두 곡 중의 어느 한 곡이 선행하여 향유되었고, 다른 하나는 선행했던 곡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새로운 가사’를 얹어 불렀음을 알려준다 하겠다.
한편 정석가의 악곡은 서경별곡에 비교해 볼 때, 여음이 없어 실질적 내용만으로 가사가 배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여음이 없는 사실로 미루어 정석가가 서경별곡에 후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가사를 얹을 때, 여음 부분에 적당한 가사를 얹는 것은 당시 문헌에 흔히 보이는 양상이기 때문이다.(예-서경별곡을 변개한 정동방곡, 청산별곡을 변개한 납씨가 등)
또한, 서경별곡을 변개한 곡으로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화태(和泰) 조선 세종 때의〈정대업지악〉열다섯 곡 가운데 열두째 곡. 한문 가사 4언 12구로 되어 있다. 세조 때에 ‘영관(永觀)’으로 이름을 고쳐 종묘 제례악에 썼다.
의 습용양상과 정석가의 선율적 일치 양상을 살펴보면, 정석가는 서경별곡의 평조와 화태의 계면조(界面調) 국악에서 쓰는 음계의 하나.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조로, 서양 음악의 단조(短調)와 비슷하다.
를 이어받은 후행곡의 성질을 가진 악곡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최소한 화태가 지어진 1445년 이후에 생겨난 노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정석가가 궁중악장으로 차용된 시기는 고려 문종 이후 어느 때가 아니라 ‘조선 세종 이후 어느 때’가 된다.
② 문헌상
☞ 문헌상으로 정석가의 소재 양상을 살펴보자면, 아래의 표와 같다.
문헌
고려사악지
(1451)
대악후보
(1460년대)
시용향악보
(16c?, 명종 이전)
금합자보
(1572)
악장가사
(16c?, 중조~명종)
악학편고
(18c)
소재
×
×
○
○
○
○
1488년 4월의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종묘악의 보태평정대업과 같은 것은 좋지만 그 나머지 속악의 서경별곡과 같은 것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가사이니 매우 불가하다. 악보는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곡조에 의하여 따로 가사를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것을 예조에 묻도록 하라...”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성종의 서경별곡의 개찬의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위의 사실을 살펴보자면 정석가는 성종(세조 때의 대악후보) 이후에 비로소 생겨났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할 수 있다.
③ 노랫말의 양상
☞ 노랫말의 양상을 살펴보자면 정석가가 ‘서경별곡에 바탕하여 성종의 명령을 받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노랫말의 특징에 의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정석가는 서경별곡에 있는 연을 가지고 있으며, 무의미한 여음구가 없으며, 성종의 명령의도에 부합하는 ‘건전한 가사’를 얹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보여지 듯, 직접 습용하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는 일치성을 보여준다. 서경별곡이 고려, 정석가는 세종 이후가 악보상으로 추론되는 발생시기이므로 시간의 간극을 고려한다면, 최소한의 어휘 변동은 있었을 것임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의 가사는 아래와 같이 어휘적으로, 통사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정석가의 노랫말에 무의미한 여음구가 없다는 사실도 이 노래가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가령 창작자가 불분명한 동동의 ‘아으 동동다리’, 서경별곡의 ‘위 두어령성 두어령성 다링디리’, 청산별곡의 ‘얄리얄리알라셩얄라리얄라’ 등의 기타 곡에서 보여지는 여음구가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석가가 악곡과 노랫말이 잘 조절된 노래라는 것은 이 노래의 개인 창작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고려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조에 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제기
1) 서경별곡과의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정황상 서경별곡이 정석가에 우선함
2) 서경별곡에 있는 연을 가지고 있으며, 무의미한 여음구가 없으며, 건전한 가사의 노래
3) 성종실록 성종 이후에 생겨났을 가능성
<발표문>
전통문화의 이해
고려속요 연구-정석가
교 과 명 :
성 명 :
제 출 일 :
☞ 일반적으로 고려조에 발생했다고 말하던 정석가의 발생시기를 재고하는 글이 있어 간략하게 이를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는 내용이나 형식보다는 악곡과 문헌에 기초해 논지를 진행시켰다.
① 악곡상
☞ 우선 악곡으로서 정석가를 살펴볼 때, 가장 주목되는 점은 서경별곡과의 유사성이다.
위의 악보에서 드러나듯이 A~D에 이르기까지 두 곡은 선율의 양상, 유사 선율단위의 배열순서에 있어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사실은 두 곡이 동종이형(同種異形)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는데, 두 곡 중의 어느 한 곡이 선행하여 향유되었고, 다른 하나는 선행했던 곡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새로운 가사’를 얹어 불렀음을 알려준다 하겠다.
한편 정석가의 악곡은 서경별곡에 비교해 볼 때, 여음이 없어 실질적 내용만으로 가사가 배열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여음이 없는 사실로 미루어 정석가가 서경별곡에 후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새로운 가사를 얹을 때, 여음 부분에 적당한 가사를 얹는 것은 당시 문헌에 흔히 보이는 양상이기 때문이다.(예-서경별곡을 변개한 정동방곡, 청산별곡을 변개한 납씨가 등)
또한, 서경별곡을 변개한 곡으로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화태(和泰) 조선 세종 때의〈정대업지악〉열다섯 곡 가운데 열두째 곡. 한문 가사 4언 12구로 되어 있다. 세조 때에 ‘영관(永觀)’으로 이름을 고쳐 종묘 제례악에 썼다.
의 습용양상과 정석가의 선율적 일치 양상을 살펴보면, 정석가는 서경별곡의 평조와 화태의 계면조(界面調) 국악에서 쓰는 음계의 하나. 슬프고 애타는 느낌을 주는 음조로, 서양 음악의 단조(短調)와 비슷하다.
를 이어받은 후행곡의 성질을 가진 악곡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는 최소한 화태가 지어진 1445년 이후에 생겨난 노래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결국 정석가가 궁중악장으로 차용된 시기는 고려 문종 이후 어느 때가 아니라 ‘조선 세종 이후 어느 때’가 된다.
② 문헌상
☞ 문헌상으로 정석가의 소재 양상을 살펴보자면, 아래의 표와 같다.
문헌
고려사악지
(1451)
대악후보
(1460년대)
시용향악보
(16c?, 명종 이전)
금합자보
(1572)
악장가사
(16c?, 중조~명종)
악학편고
(18c)
소재
×
×
○
○
○
○
1488년 4월의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종묘악의 보태평정대업과 같은 것은 좋지만 그 나머지 속악의 서경별곡과 같은 것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가사이니 매우 불가하다. 악보는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곡조에 의하여 따로 가사를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것을 예조에 묻도록 하라...”라는 기사가 있는데, 이는 성종의 서경별곡의 개찬의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위의 사실을 살펴보자면 정석가는 성종(세조 때의 대악후보) 이후에 비로소 생겨났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할 수 있다.
③ 노랫말의 양상
☞ 노랫말의 양상을 살펴보자면 정석가가 ‘서경별곡에 바탕하여 성종의 명령을 받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노랫말의 특징에 의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정석가는 서경별곡에 있는 연을 가지고 있으며, 무의미한 여음구가 없으며, 성종의 명령의도에 부합하는 ‘건전한 가사’를 얹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보여지 듯, 직접 습용하지 않고서는 발생할 수 없는 일치성을 보여준다. 서경별곡이 고려, 정석가는 세종 이후가 악보상으로 추론되는 발생시기이므로 시간의 간극을 고려한다면, 최소한의 어휘 변동은 있었을 것임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의 가사는 아래와 같이 어휘적으로, 통사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정석가의 노랫말에 무의미한 여음구가 없다는 사실도 이 노래가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었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가령 창작자가 불분명한 동동의 ‘아으 동동다리’, 서경별곡의 ‘위 두어령성 두어령성 다링디리’, 청산별곡의 ‘얄리얄리알라셩얄라리얄라’ 등의 기타 곡에서 보여지는 여음구가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정석가가 악곡과 노랫말이 잘 조절된 노래라는 것은 이 노래의 개인 창작 가능성을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고려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조에 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제기
1) 서경별곡과의 유사성을 갖고 있으며, 정황상 서경별곡이 정석가에 우선함
2) 서경별곡에 있는 연을 가지고 있으며, 무의미한 여음구가 없으며, 건전한 가사의 노래
3) 성종실록 성종 이후에 생겨났을 가능성
<발표문>
전통문화의 이해
고려속요 연구-정석가
교 과 명 :
성 명 :
제 출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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