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 한말 의병연구의 동향과 새로운 모색
Ⅱ . 본론
1.의병
1) 보편적 개념
2) 역사적 개념
2.의병전쟁이라 하는 이유
3.의병전쟁의 특징
1) 이념상
2) 조직상
3) 활동상
4) 사상적 배경
(1)전통사적
(2)위정척사운동
(3)동학농민운동
4.의병전쟁의 단계별 전개
1) 전기 - 을미의병
(1)배경
(2)의병 항전의 활동
(3)아관파천과 의병의 해산
(4)한계와 의의
2) 중기 - 을사의병
(1)배경
①러일전쟁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
②을사늑약과 의병의 재봉기
(2)의병부대의 전황
(3)결과
(4)특징
(5)의의
3) 후기 - 정미의병
(1)배경
①군대해산과 정미조약
②시위대와 진위대의 해산과 항쟁
③해산군인의 의병화
④농민의 의병화
⑤일본군의 반격과 그들의 만행
(2)의병전황과 지역별 주요부대의 활약
①중부지역
②영남지역
③호남지역
④서북지역
(3)특징
4) 전환기 - 남한대토벌작전 전후
(1)배경: 남한대토벌작전
(2)결과: 의병의 국내잠적과 해외이동
(3)의의
Ⅲ . 결론 : 의병전쟁의 의의
1.의병전쟁의 의의
2.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1)각 사건을 바라보는 상호의 시각적 차이
(1)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점
(2) 의병전쟁의 한계점
Ⅳ.맺음말
Ⅱ . 본론
1.의병
1) 보편적 개념
2) 역사적 개념
2.의병전쟁이라 하는 이유
3.의병전쟁의 특징
1) 이념상
2) 조직상
3) 활동상
4) 사상적 배경
(1)전통사적
(2)위정척사운동
(3)동학농민운동
4.의병전쟁의 단계별 전개
1) 전기 - 을미의병
(1)배경
(2)의병 항전의 활동
(3)아관파천과 의병의 해산
(4)한계와 의의
2) 중기 - 을사의병
(1)배경
①러일전쟁과 일제의 식민지 지배
②을사늑약과 의병의 재봉기
(2)의병부대의 전황
(3)결과
(4)특징
(5)의의
3) 후기 - 정미의병
(1)배경
①군대해산과 정미조약
②시위대와 진위대의 해산과 항쟁
③해산군인의 의병화
④농민의 의병화
⑤일본군의 반격과 그들의 만행
(2)의병전황과 지역별 주요부대의 활약
①중부지역
②영남지역
③호남지역
④서북지역
(3)특징
4) 전환기 - 남한대토벌작전 전후
(1)배경: 남한대토벌작전
(2)결과: 의병의 국내잠적과 해외이동
(3)의의
Ⅲ . 결론 : 의병전쟁의 의의
1.의병전쟁의 의의
2.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1)각 사건을 바라보는 상호의 시각적 차이
(1)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점
(2) 의병전쟁의 한계점
Ⅳ.맺음말
본문내용
의 증파와 그 조직적 배치에도 이유가 있겠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의병활동의 내용이 일본군을 상대한 전쟁성격으로 일변한 데에 있다. 을미의병은 말할 것 없고, 을사의병도 정부에 대한 시위적 성격이 있어 친일고관을 물리치라는 등의 건의 또는 요구를 내걸고 있었으나 정미의병부로부터 국왕에 대한 호소도 상소도 거의 없이 오로지 일본군과 대적하는 의병으로 봉기하였으니 전투태세에 유리한 편대를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산채를 쌓기도 했는데 이때에 대부대로 대적한다는 것은 일본군의 기습을 자초하는 일 밖에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규모 분산배치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호남지역
호남지방에서는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다. 즉 영남의 정환직 부대나 신돌석 부대 또는 속리산의 김운로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을사의병이 그대로 정미의병으로 계속되면서 항전의 변천을 보이고 있는데 호남에서 을사의병은 그것으로 종결되고, 정미의병이 새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 호남창의회맹소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와 유림의병
정미의병에서 유림적 성격이 짙었던 진영은 중부지방에서 이인영과 허위 부대였고, 영남에서는 정환직의 산남의진이었는데, 호남에서는 기삼연을 중심으로 1907년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유림의 연합의병과도 같이 처음 기병할 때 서로 연락을 취하고, 봉기 후에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유림적 성격은 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 저들이 국법을 변경하는 것도 그 손아귀에 있고 임금을 폐위하는 것도 그 마음대로 자행하는 것이니 적신이 칼날을 들이대고 대가를 제멋대로 옮겼으며, 숙위의 군사가 협박하여 임금의 자리를 선위시켰다. 공경대부로부터 사농공상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5백년 종사를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삼천리 강산은 옛날과 같건마는 판도는 바뀌었다. 이른바 공경대부라는 자들은 왜놈의 심복 아님이 없고 삭발하고 변복한 자는 모두 왜놈의 도당이니 하늘이 비록 벼락을 때려 죽이지는 아니하나 어찌 사람의 주륙을 모면하겠는가 우들은 부조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 문명국에 태어났으니 차라리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어찌 적국을 섬길 수가 있으랴. 믿고 사는 것은 오직 태황제뿐인 것이다.\"
위의 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종은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 임금은 어디 있느냐.\'고 외치고 있다. 정미의병의 유림적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퇴위에 대한 충격과 군대해산에 따른 민중적 봉기에 의해서 전개된 것인데 유림의 봉기를 자극한 것은 고종의 태위였던 것이다.
기삼연 부대는 기병 직후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의세를 떨쳤고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군을 격퇴하였고,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군기를 보충하여 그곳 사창을 점령하여 양곡을 차압해서 군량으로 충당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된 뒤에 주력부대는 김태원, 조정인에 의해서 지휘되었다. 기삼연의 체포를 전후하여 창의회맹소가 해체된 뒤에는 유생 김용구, 김준, 이석용, 전수용은 각기 독립부대를 이끌고 항전하기도 했다.
김태원과 조정인의 지휘하에 광주 일원 곳곳에서 일본을 유격하여 전과를 올린다. 특히 평창에서 요시다를 총살하고 일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린다. 1908년 김태원이 전사하고, 조정인이 맡아 나주, 함평, 광주일대에서 활약했으나 곧 체포되어 교수 당한다. 그 후 오성술, 유병기, 조경환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항전했다.
한편 호남창의회맹소의 통령이었던 김용구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기삼연 부대와 연합하고 있었는데 기삼연이 체포된 후에는 고창, 장성, 영광, 무장 등지의 해안과 산악을 누비며 의세를 떨쳤는데 1908년 김용구가 잠적한 후에는 박도경이 그 뒤를 맡아 활약했다.
또 이들과는 별도로 진안에서 의병을 모아 참전한 이석용은 1907년 9월 13일에 진압읍을 점령했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군을 격퇴한 후 1908년 4월 전라도 동북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정미의병장으로 보기 드물게 당시 임금이 어린 것을 고려하여 정부 각료에 <상정부서>를 울린 이석용인데 그는 \'이석용은 패군의 장수이다. 2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거의 죽다 살아났으며 나라를 욕되게 함이 너무 심하여 대의에 스스로 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영웅들을 모아 또다시 나라를 건질 것을 도모하고 있다...\"라고 하며 굽힐 줄 모르는 의병의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8년 여름 호남 유림의 의병이 점차 열세에 몰리자 전수용이 그해 8월 21일 정원비과 함께 다시 기병하여 당시 전라도일대에서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던 평민을 주체로 한 호남 후기 의병과 더불어, 특히 나주, 영광일대에서 1909년 3월까지 항전하였다. 또 호남유생출신으로 함평의 심남일이 1907년 12월 5일에 기병하여 1909년 5월 해산할 때 까지 강진, 장흥, 영암, 능주, 해남일대에서 호남 후기의병과 함께 항전을 폈는데 이와 같이 호남유림의 경우 을사의병과의 연속성이 없어 유림적 결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1908년과 1909년까지 항전함으로써 다른 지방에서 보지 못한 지구성을 보이고 있다.
* 안계홍 담살이 부대
안계홍은 보성출신으로 머슴, 즉 담살이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평민의병장이다. 의병을 일으킨 후 대부호의 집을 습격하여 군수물자를 보완하고 1908년 2월에는 보성 동쪽 파청에서 미도와 히라이가 인솔하는 일본군을 맞아 크게 이겼다. 이 지방에서는 파청대첩이라 하여 해방 후 대첩비를 세웠는데 이것은 안계홍 부대가 민중적 호응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후 전남 남부일대에서 활약하는 중 누봉산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지만 8월 24일 진산에서 또 대첩을 거두는 전과를 올리며 의세를 떨쳤다. 안계홍 부대는 8월 말에 원봉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야습하여 일본군과 그에 따른 일본인 5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렇기 때문에 안계홍 부대는 일본군도 겁내기 충분했다.
그 후 순천 병치에서 크게 패하여 의병들이 분산하게
호남지역
호남지방에서는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이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다. 즉 영남의 정환직 부대나 신돌석 부대 또는 속리산의 김운로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을사의병이 그대로 정미의병으로 계속되면서 항전의 변천을 보이고 있는데 호남에서 을사의병은 그것으로 종결되고, 정미의병이 새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 호남창의회맹소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와 유림의병
정미의병에서 유림적 성격이 짙었던 진영은 중부지방에서 이인영과 허위 부대였고, 영남에서는 정환직의 산남의진이었는데, 호남에서는 기삼연을 중심으로 1907년9월에 결성된 호남창의회맹소였다.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유림의 연합의병과도 같이 처음 기병할 때 서로 연락을 취하고, 봉기 후에는 별도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삼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폈다. 호남창의회맹소의 유림적 성격은 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아 ! 저들이 국법을 변경하는 것도 그 손아귀에 있고 임금을 폐위하는 것도 그 마음대로 자행하는 것이니 적신이 칼날을 들이대고 대가를 제멋대로 옮겼으며, 숙위의 군사가 협박하여 임금의 자리를 선위시켰다. 공경대부로부터 사농공상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5백년 종사를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삼천리 강산은 옛날과 같건마는 판도는 바뀌었다. 이른바 공경대부라는 자들은 왜놈의 심복 아님이 없고 삭발하고 변복한 자는 모두 왜놈의 도당이니 하늘이 비록 벼락을 때려 죽이지는 아니하나 어찌 사람의 주륙을 모면하겠는가 우들은 부조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 문명국에 태어났으니 차라리 바다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어찌 적국을 섬길 수가 있으랴. 믿고 사는 것은 오직 태황제뿐인 것이다.\"
위의 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순종은 임금으로 여기지 않고 \'우리 임금은 어디 있느냐.\'고 외치고 있다. 정미의병의 유림적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퇴위에 대한 충격과 군대해산에 따른 민중적 봉기에 의해서 전개된 것인데 유림의 봉기를 자극한 것은 고종의 태위였던 것이다.
기삼연 부대는 기병 직후 무장, 법성포, 고창, 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의세를 떨쳤고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군을 격퇴하였고,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군기를 보충하여 그곳 사창을 점령하여 양곡을 차압해서 군량으로 충당했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이 체포된 뒤에 주력부대는 김태원, 조정인에 의해서 지휘되었다. 기삼연의 체포를 전후하여 창의회맹소가 해체된 뒤에는 유생 김용구, 김준, 이석용, 전수용은 각기 독립부대를 이끌고 항전하기도 했다.
김태원과 조정인의 지휘하에 광주 일원 곳곳에서 일본을 유격하여 전과를 올린다. 특히 평창에서 요시다를 총살하고 일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린다. 1908년 김태원이 전사하고, 조정인이 맡아 나주, 함평, 광주일대에서 활약했으나 곧 체포되어 교수 당한다. 그 후 오성술, 유병기, 조경환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항전했다.
한편 호남창의회맹소의 통령이었던 김용구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기삼연 부대와 연합하고 있었는데 기삼연이 체포된 후에는 고창, 장성, 영광, 무장 등지의 해안과 산악을 누비며 의세를 떨쳤는데 1908년 김용구가 잠적한 후에는 박도경이 그 뒤를 맡아 활약했다.
또 이들과는 별도로 진안에서 의병을 모아 참전한 이석용은 1907년 9월 13일에 진압읍을 점령했고, 11월 17일에는 장수를 공략하여 일군을 격퇴한 후 1908년 4월 전라도 동북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정미의병장으로 보기 드물게 당시 임금이 어린 것을 고려하여 정부 각료에 <상정부서>를 울린 이석용인데 그는 \'이석용은 패군의 장수이다. 2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거의 죽다 살아났으며 나라를 욕되게 함이 너무 심하여 대의에 스스로 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영웅들을 모아 또다시 나라를 건질 것을 도모하고 있다...\"라고 하며 굽힐 줄 모르는 의병의지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8년 여름 호남 유림의 의병이 점차 열세에 몰리자 전수용이 그해 8월 21일 정원비과 함께 다시 기병하여 당시 전라도일대에서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던 평민을 주체로 한 호남 후기 의병과 더불어, 특히 나주, 영광일대에서 1909년 3월까지 항전하였다. 또 호남유생출신으로 함평의 심남일이 1907년 12월 5일에 기병하여 1909년 5월 해산할 때 까지 강진, 장흥, 영암, 능주, 해남일대에서 호남 후기의병과 함께 항전을 폈는데 이와 같이 호남유림의 경우 을사의병과의 연속성이 없어 유림적 결점을 보이기는 하지만 1908년과 1909년까지 항전함으로써 다른 지방에서 보지 못한 지구성을 보이고 있다.
* 안계홍 담살이 부대
안계홍은 보성출신으로 머슴, 즉 담살이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킨 평민의병장이다. 의병을 일으킨 후 대부호의 집을 습격하여 군수물자를 보완하고 1908년 2월에는 보성 동쪽 파청에서 미도와 히라이가 인솔하는 일본군을 맞아 크게 이겼다. 이 지방에서는 파청대첩이라 하여 해방 후 대첩비를 세웠는데 이것은 안계홍 부대가 민중적 호응을 받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후 전남 남부일대에서 활약하는 중 누봉산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지만 8월 24일 진산에서 또 대첩을 거두는 전과를 올리며 의세를 떨쳤다. 안계홍 부대는 8월 말에 원봉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야습하여 일본군과 그에 따른 일본인 5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렇기 때문에 안계홍 부대는 일본군도 겁내기 충분했다.
그 후 순천 병치에서 크게 패하여 의병들이 분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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