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편 서설(序說)
제2편 고대문학(古代文學)
제3편 중세문학(中世文學)
제4편 근세(近世)문학
제5편 현대문학(現代文學)
제2편 고대문학(古代文學)
제3편 중세문학(中世文學)
제4편 근세(近世)문학
제5편 현대문학(現代文學)
본문내용
다.
- 이로 인하여 중국의 지식인들 머리속에 도입된 서양의 합리주의적인 철학 사상은 결국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사상과 예교주의를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게 만들었다.
제2장 - 신문학의 설립(1918~1920)
- 중국의 문학혁명에 불을 붙인 것은 호적(胡適)이다. 그는 1917년 1월 <신청년>잡지에 백호문학운동(白話文學運動)을 주장하였다.
- 이런한 호적의 주장은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그 내용을 보면 문학의 내용에 관한것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표현에 관한 의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은 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 본격적인 문학 혁명은 <문학개량추의>에 호응하는 편집자 진독수(陣獨秀)가 쓴 <문화혁명론>에서 구체화 한다.
1. 형식적으로 깍고 다듬은 아첨하는 귀족문학을 타도하고, 쉽고도 서정적인 국민 문학을 건설한다.
2. 진부하고 과장적인 고전 문학을 타도하고, 신선하고도 거실한 사실 문학을 건설한다.
3. 뜻이 애매하고 까다로운 산림 문학을 타도하고, 명료하고 통속적인 사회 문학을 건설한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으로 문학혁명의 가능성을 입증해 준 것은 노신의<광인일기>이다. 그는 새로운 백화체의 문장을 사용하여 중국의 봉건사회를 고발하였다.
- 이렇게 진전된 문학혁명을 완전히 고전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문학으로 확정 지어준 계기가 된 것은 1919년 5월4일에 일어난<5 4운동>이다. <5 4운동>이란 이처럼 정치 투쟁에서 시작되었으나, 광범한 반봉건투쟁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반봉건적인 문화투쟁의 성격도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5 4운동>이 이처럼 문화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앞서부터 문학혁명을 통해서 문화투쟁을 위한 길이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3장 - 문학사단(社團)의 활동(1921~1927)
- 1921년 1월, 북경에서 주작인 정진탁 모순등 12명이 모여 발기한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이 상해 상무인서관에서 오래 전부터 발행해오던 잡지<소설월보>를 인수 받아 순수한 문학 종합지로 개편하였다. 그러면서 어느덧 그들대로의 방향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인생을 위한 예술”의 표방이다.
- 1921년 여름엔 낭만주의적인 창조사(倉造社)가 곽말약 욱달부 서방오 등 젊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들은 모두 문학혁명 이루에 뛰쳐나온 젊은이들이어서 문학연구회가 이전시대의 그림자를 이끌고 발걸음이 느렸던 데 비하여, 창조사는 성난 듯이 젊은이들답게 멋대로 날뛰었다.
- 그 밖에 노신(魯迅)을 중심으로 한 어사사(語絲社)가 생겨났다. 이들은 자유주의와 취미주의를 내세워 각자의 경향이 달랐으나 “새우운 것을 생산하며, 새운 것에 해가 되는 옛 것을 극력 배척한다”는 공통 목표가 있었고 주로 잡문을 썼다.
- 그 외 노신이 편집한 창작을 모은것과 러시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서양 작가의 작품 번역을 모은 미명사 와 노신이 지도하는 망원사(莽原社),1921년에 성립된 민중희극사 등이있다.
제1절 시
- 호적에 뒤이어 노신 이대교 진독수등이 새로운 시들을 발표했지만, 시의 형식만 바뀌었을 뿐 의식은 옛 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1922년에 장시 <훼멸>을 발표한 주자청은 중국 현대시의 수준을 기교나 내용면에서 한 층 비약시킨 시인이다.
- 창조사 계통의 시인으로는 곽말약이 1921년 <여신>,1923년 <성공>이란 시집을 내고 있는데, 그의 시의 불만과 반항적인 표현은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제2절 소설
- 먼저 노신은 1918년부터 1922년 사이의 작품집으로 <눌함>, 1923년부터 1925년 사이의 작품집으로 <방황>을 내고 있다. 이중 <눌함>의 것들보다 다른 소설이 기교나 문장은 원숙했지만, 큰 감명을 얻지 못했다. 중국 사회를 비평하고 풍자하던 정열이 초기에 비해 식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 문학연구회 계통으로 섭소균과 사빙신이 노신에 이어 소설을 썼다. 특히 섭소균은 중국 사회 각계 소시민들의 생활을 탐색하고 있으며, 건정하고 새로운 동화의 세계를 개척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빙심은 여류다운 깨끗한 필치로 사회의 어두운 면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추구에 성공하고 있어 많은 아낌을 받았다.
- 또 이시기엔 자기 고향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쓴 향토 문학 작가들이 여럿 있었고, 창조사 계통의 작가인 <침륜>을 발표한 욱달부등이 있다. 그는 주로 젊은이의 퇴폐적인 사랑과 고민속에 반항의 기질을 담고 있어 내용이 불건전하고 병태적이다. 그러나 짓밟히고 억눌린 젊은이들의 경향을 통해 인간의 한 모습을 잡아보려 했던 점은 높이 평가한다.
제3절 희곡
- 중국 희곡 발전에 작품으로 가장 공헌을 한 이는 창조사의 전한(田漢)일 것이다. 그는 <커피숍의 하룻밤>, <향수>덩을 발표 하였고, 그의 희곡에는 반봉건 반제국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시의가 서린 아름다운 문구로 엮어지고 있다.
- 이들 밖에도 섭소균의 <예술적 생활>, <간친회>등 을 썼고, 호야빈 정백기등이 있다.
제4절 산문
- 산문이 무엇보다도 문학혁명의 조류속에 문화적인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편리한 무기가 된다고 생각을 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노신이다.
- 노신에겐 <신청년> 시대의 산문집으로 <열풍>과<분>이 있으며, 진독수와 전현동도 <신청년>에서 예리한 산문으로 봉건주의를 공격했다.
제4장 - 좌련(左聯)시대(1928~1936)
주요인물
- 임어당(林語堂)은 1932년에는<논어>를 내면서 “유머”를 산문 정신으로 내걸었고, 1933년에는 <인간세>란 반월간을 내면서 한적을 내용으로 하는 소품문(小品文)을 주장하였다.
- 한편 좌련 계열에서는 임어당을 현실도피라 공격하였지만 임어당은 좌련의 계급 의식을 공격하면서 계속<우주(宇宙)>, <서풍(西風)> 등을 내며 자기의 입장을 지켰다.
- 모순(茅盾)이 처음으로 창작에 손을 대어 <환멸>, <동요>, <추구>라는 <식> 삼부작을 내놓았다. 1932년에는 장편 <자야>와 단편집 <춘잠>, <포말>등을 내어 일약 노신을 이어 중국 신문학을 대표할 소설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 이로 인하여 중국의 지식인들 머리속에 도입된 서양의 합리주의적인 철학 사상은 결국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사상과 예교주의를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게 만들었다.
제2장 - 신문학의 설립(1918~1920)
- 중국의 문학혁명에 불을 붙인 것은 호적(胡適)이다. 그는 1917년 1월 <신청년>잡지에 백호문학운동(白話文學運動)을 주장하였다.
- 이런한 호적의 주장은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그 내용을 보면 문학의 내용에 관한것도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표현에 관한 의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은 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 본격적인 문학 혁명은 <문학개량추의>에 호응하는 편집자 진독수(陣獨秀)가 쓴 <문화혁명론>에서 구체화 한다.
1. 형식적으로 깍고 다듬은 아첨하는 귀족문학을 타도하고, 쉽고도 서정적인 국민 문학을 건설한다.
2. 진부하고 과장적인 고전 문학을 타도하고, 신선하고도 거실한 사실 문학을 건설한다.
3. 뜻이 애매하고 까다로운 산림 문학을 타도하고, 명료하고 통속적인 사회 문학을 건설한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으로 문학혁명의 가능성을 입증해 준 것은 노신의<광인일기>이다. 그는 새로운 백화체의 문장을 사용하여 중국의 봉건사회를 고발하였다.
- 이렇게 진전된 문학혁명을 완전히 고전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신문학으로 확정 지어준 계기가 된 것은 1919년 5월4일에 일어난<5 4운동>이다. <5 4운동>이란 이처럼 정치 투쟁에서 시작되었으나, 광범한 반봉건투쟁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반봉건적인 문화투쟁의 성격도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5 4운동>이 이처럼 문화운동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앞서부터 문학혁명을 통해서 문화투쟁을 위한 길이 닦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제3장 - 문학사단(社團)의 활동(1921~1927)
- 1921년 1월, 북경에서 주작인 정진탁 모순등 12명이 모여 발기한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이 상해 상무인서관에서 오래 전부터 발행해오던 잡지<소설월보>를 인수 받아 순수한 문학 종합지로 개편하였다. 그러면서 어느덧 그들대로의 방향이 뚜렷해졌다. 그것은 “인생을 위한 예술”의 표방이다.
- 1921년 여름엔 낭만주의적인 창조사(倉造社)가 곽말약 욱달부 서방오 등 젊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들은 모두 문학혁명 이루에 뛰쳐나온 젊은이들이어서 문학연구회가 이전시대의 그림자를 이끌고 발걸음이 느렸던 데 비하여, 창조사는 성난 듯이 젊은이들답게 멋대로 날뛰었다.
- 그 밖에 노신(魯迅)을 중심으로 한 어사사(語絲社)가 생겨났다. 이들은 자유주의와 취미주의를 내세워 각자의 경향이 달랐으나 “새우운 것을 생산하며, 새운 것에 해가 되는 옛 것을 극력 배척한다”는 공통 목표가 있었고 주로 잡문을 썼다.
- 그 외 노신이 편집한 창작을 모은것과 러시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서양 작가의 작품 번역을 모은 미명사 와 노신이 지도하는 망원사(莽原社),1921년에 성립된 민중희극사 등이있다.
제1절 시
- 호적에 뒤이어 노신 이대교 진독수등이 새로운 시들을 발표했지만, 시의 형식만 바뀌었을 뿐 의식은 옛 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1922년에 장시 <훼멸>을 발표한 주자청은 중국 현대시의 수준을 기교나 내용면에서 한 층 비약시킨 시인이다.
- 창조사 계통의 시인으로는 곽말약이 1921년 <여신>,1923년 <성공>이란 시집을 내고 있는데, 그의 시의 불만과 반항적인 표현은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제2절 소설
- 먼저 노신은 1918년부터 1922년 사이의 작품집으로 <눌함>, 1923년부터 1925년 사이의 작품집으로 <방황>을 내고 있다. 이중 <눌함>의 것들보다 다른 소설이 기교나 문장은 원숙했지만, 큰 감명을 얻지 못했다. 중국 사회를 비평하고 풍자하던 정열이 초기에 비해 식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 문학연구회 계통으로 섭소균과 사빙신이 노신에 이어 소설을 썼다. 특히 섭소균은 중국 사회 각계 소시민들의 생활을 탐색하고 있으며, 건정하고 새로운 동화의 세계를 개척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사빙심은 여류다운 깨끗한 필치로 사회의 어두운 면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추구에 성공하고 있어 많은 아낌을 받았다.
- 또 이시기엔 자기 고향을 주제로 한 소설을 쓴 향토 문학 작가들이 여럿 있었고, 창조사 계통의 작가인 <침륜>을 발표한 욱달부등이 있다. 그는 주로 젊은이의 퇴폐적인 사랑과 고민속에 반항의 기질을 담고 있어 내용이 불건전하고 병태적이다. 그러나 짓밟히고 억눌린 젊은이들의 경향을 통해 인간의 한 모습을 잡아보려 했던 점은 높이 평가한다.
제3절 희곡
- 중국 희곡 발전에 작품으로 가장 공헌을 한 이는 창조사의 전한(田漢)일 것이다. 그는 <커피숍의 하룻밤>, <향수>덩을 발표 하였고, 그의 희곡에는 반봉건 반제국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시의가 서린 아름다운 문구로 엮어지고 있다.
- 이들 밖에도 섭소균의 <예술적 생활>, <간친회>등 을 썼고, 호야빈 정백기등이 있다.
제4절 산문
- 산문이 무엇보다도 문학혁명의 조류속에 문화적인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편리한 무기가 된다고 생각을 했고,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노신이다.
- 노신에겐 <신청년> 시대의 산문집으로 <열풍>과<분>이 있으며, 진독수와 전현동도 <신청년>에서 예리한 산문으로 봉건주의를 공격했다.
제4장 - 좌련(左聯)시대(1928~1936)
주요인물
- 임어당(林語堂)은 1932년에는<논어>를 내면서 “유머”를 산문 정신으로 내걸었고, 1933년에는 <인간세>란 반월간을 내면서 한적을 내용으로 하는 소품문(小品文)을 주장하였다.
- 한편 좌련 계열에서는 임어당을 현실도피라 공격하였지만 임어당은 좌련의 계급 의식을 공격하면서 계속<우주(宇宙)>, <서풍(西風)> 등을 내며 자기의 입장을 지켰다.
- 모순(茅盾)이 처음으로 창작에 손을 대어 <환멸>, <동요>, <추구>라는 <식> 삼부작을 내놓았다. 1932년에는 장편 <자야>와 단편집 <춘잠>, <포말>등을 내어 일약 노신을 이어 중국 신문학을 대표할 소설가로 군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