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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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치적 대결에 대한 두려움과 도피주의적 의식구조이다.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잔인한 행동에 직면했을 때, 기독교인들은 그들에게 힘없이 실패했던 비인간적인 일본인들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을 느꼈던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정치권력을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침 받아왔다. 또 하나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이다. 1946년 친공적인 기독교동맹이 조직되어 정치적 행동에서 기독교인의 일치를 파괴하였다.127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 정치적 타협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신도 제국주의와 협력했던 사람들에게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 훨씬 더 용이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둘 다 일본 제국주의 하에서의 정치적 세속화의 연장이라는 점은 슬픈 사실이다. 오늘날 냉전이 끝나자, 한국교회는 한국을 다시 통일하고 북한을 재복음화시킬 방법을 찾기에 분주하다. 이 시점에서 아직도 북한에는 스스로를 신격화한 독재자의 망령이 반종교적 막시스트 공산주의를 견지하고 있으나, 북한의 정치적 성화라는 궁극적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 두려움이나 미움보다는 긍정적인 관계와 감정적인 화해가 요청되고 있다.
3.5 기독교정부
한국교회에게 1950년대(1948-1960)에 기독교인 대통령과 그의 “기독교적” 정부를 구현할 최초의 기회가 주어졌으나,128 “세속” 정부와 정당하게 관계하는데 실패하였다. 한국이 1945년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자 마자 노령의 신실한 크리스챤 애국자인 이승만이 33년간의 정치적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여 1948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대부분의 각료와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중직들에 대통령의 개인적 호감과 교회활동을 통하여 훈련된 기독교인들의 민주주의적 역량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피택되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미숙한 한국교회는 단순히 그것이 “기독교인” 대통령과 관리들에 의해 운영되기 때문에 “기독교” 정부라고 순진하게 생각하고 마음껏 정부를 축복하였으며, 또한 소수(5%이하)였던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특권을 향유하였다.129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국가나 정치권력의 영적 본성을 신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이 ‘기독교 장로’ 대통령의 정권에 대한 죄악적 욕망에 비판적이 되는데 실패하였다.”130 36년동안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약탈당했으며 또 다시 한국전쟁으로 비참하게 파괴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기독교인 대통령의 결정적 실패는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의 정적을 제거해 나가면서, 그는 오로지 그의 통치를 연장할 목적으로 힘과 기만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개헌--재선을 위해 1952년, 3선을 위해 1954년, 그리고 심지어 4선을 위해 1958년--을 시도하였다.131 그러나 한국교회와 기독교 정치인들은, 그 막대한 부정과 부패로 인해 1960년 학생혁명에 의해 비극적으로 하야 당하기까지, 스스로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세속화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132 그후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어느 정권에게나 충성하는 “친정부단체”로 자주 비난받아 왔다.
3.6 군사독재
한국교회는 1961년 군사 쿠데타이후 군사독재정권과 직면하게 되었는데, 일관된 후원과 영속적인 저항이라는 두 극단적 입장으로 양극화되었다. 사실 군사 쿠데타는 본래 한국교회의 양대 진영인 NCC그룹과 비NCC그룹에 의해 공히 환영되었다.133 그러나 군사 쿠데타 지도자들이 다시 군대로 복귀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들 자신의 군사정부를 수립하자, 이 두 그룹은 상반되는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다.134 그로부터 NCC그룹은 암살 당한 박정희와 불명예 퇴진을 당한 전두환의 군사정권이 끝날 때까지 경제 및 군사적 안정을 명분으로 저지른 심각한 불의와 군사정권의 연장을 계속적으로 항의하였다. 오늘날, 그들이 용기있게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을 주도했으며 1980년대말 민주주의 회복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는데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비NCC그룹은 자랑스럽게 군사정권을 축복하는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참여하고, 교회에서의 정부비판을 금지시키고, 심지어 군사정부가 가장 부도덕한 행위를 자행할 때에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서 수치도 모른 채 군사정부를 후원해 왔다.135 이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전술한대로, 이것은 1901년이래 한국교회의 정치적 전통이 되어왔다. 단순히 한국교회는 과거의 정치적 세속화를 극복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NCC그룹 또한 모든 반정부구룹과 무비판적으로 하나가 되었으며,136 폭력시위나 노동자 선동과 같은 일부 막시스트 방법들을 채택하고, 또한 널리 “민중신학(民衆神學)”이라고 알려진 정치적 저항을 위한 신학적 체계를 개발하기 위하여 세속화신학을 도입함으로서 정치적 세속화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기독교적인 투쟁방법과 해결책보다는 막시스트 혁명주의, 정치주의, 세속주의, 그리고 물질주의와 같은 현대의 이데올로기들과 하나가 되었으며, 그 결과 지금 한국교회의 양대진영에 의해 전반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만약에 보수적인 신학자들이 이 저항운동에 참여하여 그를 위한 신학적 기반을 개발하는데 협력했더라면, 두 그룹 다 이와 같은 정치적 세속화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치적 저항은 비기독교적 영향하에 있는 소수의 극도로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WCC의 매개를 통하여 도입된 해방신학과 그 막시스트적 방법론에 의해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학생혁명은 “한국교회에 크나큰 충격”이었으며,137 이듬해 다시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두 혁명이 정부를 전복하는데 성공했으므로, 기독교 저항구룹도 거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그들 또한 정치적 혁명에 의해 정부를 전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확신은 WCC를 통해 왔으며, 한국지부인 NCC는 WCC의 지원을 최대한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주도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있어서 WCC의 신학적 개발은 사회-정치적 참여에 집중되어 있어서, 1961년 뉴 델리총회에서 비교리적 사회헌장을 채택한 것을 기점으로, 1968년
  • 가격3,000
  • 페이지수37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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