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 1940년대 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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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현대문학] 1940년대 문학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시 분 야

Ⅰ-1 1940년대 시개관
Ⅰ-2 저항시인 윤동주,이육사
(국어국문학과 문미경)

Ⅱ. 소 설 분 야
Ⅱ-1 1940년대 소설개관
Ⅱ-2 1940년대 농민소설
Ⅱ-3 1940년대 월북소설가
Ⅲ. 비 평
Ⅲ-1 1940년대 비평
<참고자료 - 34개>

본문내용

참고문헌>
1. 문단의 상황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전후하여 최후의 발악적 양상을 드러낸다. 조선어 말살의 마수를 뻗쳐 『조선일보』『동아일보』 와 『문장』,『인문평론』을 강제폐간 시켰다. 이에 대신해서 친일 어용잡지가 다수 등장하였는데, 문예지로서는 『국민문학』, 『국민시가』, 기타 『신시대』『춘추』등의 종합지들의 창간이 그것이다. 한국어의 공적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된 까닭에 한국어를 매체로 한국문학이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항일의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표현도 허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군국주의를 지지하고 찬양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항일을 하다가 옥사하면서 발표될 수 없는 작품을 남긴 사람도 있고, 작품활동을 그만두고 침묵하면서 견딘 사람도 있고, 일제를 찬양하는 친일의 문인도 적지 않았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유이민시로 일제의 압제를 거부하고 만주, 간도등 광활한 대륙으로 가서 만선일보를 통해 발표하여 우리글과 우리말을 생생히 살려내어 민족문학의 뿌리를 지키려 하였다.
2. 친일시
1939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한 일제 어용 시들은 1941년에 이르면 전 문단에 확산된다. 1940년대의 일제 어용 시, 이를 일제의 공식적 명칭을 빌어 말하면 ‘국민시(國民詩)’이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전시체제의 확립과 국민의 전쟁 동원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지고 있던 ‘국민시’와 발 맞추어 나가던 친일문학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의 \'국민시\'는 한민족의 말살과 일본 황민화(皇民化)의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대표적 친일시인으로 김동환, 서정주, 모윤숙, 김종한, 노천명, 김용제, 여상현 등을 들 수 있다. 예로 김동환과 여상현을 들어본다.
우리의 붉은 피/四百餘州에 곧곧에 흘녀지는날/帝國에 榮光이 도사오리니/
-김동환의 시, 『조이인석군(弔李仁錫君)』(1942)
촤르르 꼬리를 떨면/佛祠, 印度의 華麗가 아른거린다./日曜日 散步를 나온 누우런 兵丁이 한명/이 조고마한 異彩를 한동안 노리고 있다./
-여상현의 시, 『국민문학』本 『공작』(1942. 3)
촤르르 꼬리를 펴면/佛祠, 印度의 華麗가 아른거린다/조심조심 모래밭 길에/女王처럼 아장거리는 異國의 가을/때때로 들려오는 獨立萬歲의 아우성소리/한발 접어들고 귀우려 듣는 청승/때마침 散步를 나온 駐屯美兵이 한명/이 죄그마한 異彩를 한동안 지키고 있다./
-여상현의 시, 『칠면조』本 『공작』(1947.9.20) 이동순, 『시정신을 찾아서』, 영남대출판부, 1998
3. 저항시
1940년대의 암울하고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도 암흑기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뚫고 나가려는 두 별을 만나게 된다. 윤병로, 『한국근현대문학사』, 명문당, 1991
바로 이육사와 윤동주가 그들이다. 물론 이들은 당시 문단에 적을 두고 세칭 문단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 작가이다. 그들의 시는 815이후에 비로소 유고집으로 발간되면서 (46년에 『육사시집』이, 그리고 48년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알려지기 시작한 시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는 그 당시 문단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자산으로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이육사는 실제로 자기 스스로 운동가적 삶을 살다가 1944년에 옥사한 투사로서 이러한 면모가 그의 시폭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중국 대륙을 왕래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끝내 일경에 체포되어 북경에서 옥사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의 시에서 민족해방의 염원을 한시에서 다져진 우국의 기풍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이른바 그의 시정신을 두고 선비정신으로 말하는데, 이는 그의 시가 독립운동가의 활동에서 직접 발현되는 이념이나 정치적 논변의 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그러한 성찰에서 나온 굽히지 않는 신념이 견실한 삶의 자세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윤동주는 옥사한 시인이긴 하지만, 보다 종교적이며 개인에 대한 진지한 실존적 성찰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윤동주가 이육사처럼 실제 운동가로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무명시인으로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기의 진실한 삶을 꿈꾸며 진지하게 자기 성찰의 길을 걸어왔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4. 유이민시
1940년대, 즉 일제말에서 해방 직후까지의 시문학사에서 사실상 유이민시는 다른 분야의 문학과는 달리 그 연구성과가 미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소 문학성이 뒤떨어진다고 할지라도 유이민시가 40년대의 시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옥정, 일제 강점기 민족 유이민 소설 연구, 『영남대대학원 석사논문A』, 영남대대학원, 1996
유이민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가 극으로 치닫던 상황에서 만주나 간도 등지에서 민족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할려고 노력했다. 『만주시인집』『재만조선시인집』등의 종합작품집이 있었으며, 『만주조선문예』,『만선일보』와 같은 신문에 작품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유이민시에서는 특히, 당시의 유이민들의 시대현실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어 그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대표적 시인은 백석, 이용악, 오장환을 들 수 있다.
백석의 생애는 다분히 방랑적인 것이었고, 그것을 토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41년 이후 만주의 신경, 안동 등지에서 생계를 위해 측량서기, 소작인, 국경세관원 등으로 일한 바 있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이러한 글자가 지나간다/-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일부
또한 윤영천에 의하면 “유이민의 침울하고 패배적인 생활사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동시대의 그 어느 시인보다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 했던 것이 이용악이다.“라고 했다. 일예로 이용악의 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에서 ‘우라지오’는 러시아 연해주의 남부도시로 블라디보스톡을 의미한다. 이은봉, 『한국현대시의 현실인식』, 국학자료원, 1993
그리고,『재만조선시인집』편자 김조규의 시『연길역 가는 길』첫 연을 보면
벌판우에는/갈잎도 없다 高梁도 없다 아무도 없다/鍾樓넘어로 한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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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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