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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라는 이방인 성읍에 머물렀다. 예루살렘에서 피신한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그보다 더 멀리 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누가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듯이 안디옥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뵈니게와 수리아까지 이르렀다.
주전 64년 수리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을 때, 안디옥은 행정의 중심지,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거주지였다. 주전 25년 동부 길리기아가 수리아에 병합된 후에도 안디옥은 계속 속주의 수도였다. 이때에 안디옥은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성읍이었는데 성읍 전체는 격자 모양으로 정비가 되어있었고 인구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많았다.
안디옥은 정치적으로 수도인 동시에 상업의중심지였다. 안디옥은 그리스-로마 세계와 동방세계가 접하는 접경지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헬레니즘적인 성읍들보다 더 국제적인 성읍이었다.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안디옥에 특히 많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그들 가운데 니골라는 예수를 믿는 자로 개종한 사람이었는데 예루살렘 교회 헬라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열거되고 있다. 그후 누가가 말해 주듯이 구브로와 구레네가 원래고향인 몇몇 사람들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에서 피신한 헬라파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안디옥에 이르렀다. 예루살렘에서 피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열렬히 전파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에는 많은 제의들과 신비 종교가 있어서 험난한 세상에서 악한 세력 또는 소외감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선포했다. 방문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할 때 청중들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그리스도에 관한 일은 특히 매혹적인 것이었으며 다른 제의들 속에 나오는 주나 구원자와는 다른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이 당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셨던 분, 사람으로서 굴욕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 이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모든 피조물 위에 높임을 받으시고 가장 높은 의미로서 “주(퀴리오스)”라는 호칭을 받으신 분으로 전했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안디옥에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맨처음 불렀다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직함이었고, 예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 귀에는 그리스도는 단지 예수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연상작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스’는 당시의 노예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크레스토스’와 발음이 정확히 같아서, 헬라인과 로마인들 가운데 혼동하는 일이 흔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인접지역으로 전파하는 일에 대해서 일반적이 감독이나 통제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절로 보내진 사람은 바나바였고, 그는 안디옥교회의 진보적인 활동이 있었지만, 그는 안디옥 교회애서 더 많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발견한다. 안디옥에 머물면서 헬라파 전도자들과 신자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결려와 지혜로운 지도를 행하였다. 헬라인 주민들 가운데 복음이 확산했고 안디옥 교회는 부흥했다. 바나바는 이 새로운 교회의 생활과 활동을 감독할 책임을 나누어 가질 동역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이방선교의 사명을 알고 있었고 길리기아에서의 바울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바울에게 동역할 것을 권했다.
제14장 환상을 보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
1. 이상한 체험
다소로 돌아간 때부터 안디옥으로 부름받은 때까지 자신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은 상당한 공백기간이 끝나갈 무렵, 바울은 자신의 나머지 생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이상한 체험을 했다.
바울은 이 체험의 일부를 고린도 후서 12:2-10에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바울은 그 체험이 이 서신을 쓰기 십사년 전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 체험은 보통 황홀경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바울은 신비체험을 하고 난 후에 괴롭고 치욕적인 만성적인 육체의 질병에 시달렸다. 그는 처음에 이 질병이 효과적인 사역을 하는데 장애가 될까봐 염려했지만 사실은 그의 자만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할 수 잇도록 함으로써 장애가 아니라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질병을 없애 달라고 세 번 기도했을 때, 이에 대한 응답은 그 질병을 제거해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딜만한 - 단지 그것을 지니고 살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된 - 충분한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이 육체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사역이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면, 그 사역에 작용한 초월적인 능력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이 명백했다.
2. 바울의 “신비주의”
신학세계에서 유레없는 중량감을 갖고 있는 바울과 그의 저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단언한다. 아돌프 다이스만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다는 견지에서 해석하는 바울의 경향성을 ‘바울의 수난 신비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이스만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추론적인 사고의 매개없이 내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모든 종교적 경향성”에 적용한다.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하면, 바울의 신비주의는 그 높은 지성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독특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 신비주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 가운데 제일의 수수께끼이다. 일단 그것을 파악하게 되면 나머지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신자들의 공동체 전체)은 개별지체들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살아 움직이며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능력을 공급받는다. 이 몸에 붙어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효력이 발생되며, 세례를 통해 인봉되고 성찬식을 통해 지탱된다. 세례는 신자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함께 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다.
3. 메사야의 고난에 첨예하며
바울이 보기에는 메시야
주전 64년 수리아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을 때, 안디옥은 행정의 중심지, 로마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거주지였다. 주전 25년 동부 길리기아가 수리아에 병합된 후에도 안디옥은 계속 속주의 수도였다. 이때에 안디옥은 로마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성읍이었는데 성읍 전체는 격자 모양으로 정비가 되어있었고 인구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많았다.
안디옥은 정치적으로 수도인 동시에 상업의중심지였다. 안디옥은 그리스-로마 세계와 동방세계가 접하는 접경지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헬레니즘적인 성읍들보다 더 국제적인 성읍이었다.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안디옥에 특히 많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그들 가운데 니골라는 예수를 믿는 자로 개종한 사람이었는데 예루살렘 교회 헬라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열거되고 있다. 그후 누가가 말해 주듯이 구브로와 구레네가 원래고향인 몇몇 사람들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에서 피신한 헬라파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안디옥에 이르렀다. 예루살렘에서 피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열렬히 전파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도시에는 많은 제의들과 신비 종교가 있어서 험난한 세상에서 악한 세력 또는 소외감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선포했다. 방문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할 때 청중들에게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그리스도에 관한 일은 특히 매혹적인 것이었으며 다른 제의들 속에 나오는 주나 구원자와는 다른 것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이 당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셨던 분, 사람으로서 굴욕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 이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모든 피조물 위에 높임을 받으시고 가장 높은 의미로서 “주(퀴리오스)”라는 호칭을 받으신 분으로 전했을 것이다.
이방인들이 안디옥에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맨처음 불렀다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직함이었고, 예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들 귀에는 그리스도는 단지 예수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에 불과했다.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연상작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토스’는 당시의 노예에게 흔한 이름이었던 ‘크레스토스’와 발음이 정확히 같아서, 헬라인과 로마인들 가운데 혼동하는 일이 흔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인접지역으로 전파하는 일에 대해서 일반적이 감독이나 통제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절로 보내진 사람은 바나바였고, 그는 안디옥교회의 진보적인 활동이 있었지만, 그는 안디옥 교회애서 더 많은 만족스러운 결과를 발견한다. 안디옥에 머물면서 헬라파 전도자들과 신자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결려와 지혜로운 지도를 행하였다. 헬라인 주민들 가운데 복음이 확산했고 안디옥 교회는 부흥했다. 바나바는 이 새로운 교회의 생활과 활동을 감독할 책임을 나누어 가질 동역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바울의 이방선교의 사명을 알고 있었고 길리기아에서의 바울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바울에게 동역할 것을 권했다.
제14장 환상을 보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
1. 이상한 체험
다소로 돌아간 때부터 안디옥으로 부름받은 때까지 자신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은 상당한 공백기간이 끝나갈 무렵, 바울은 자신의 나머지 생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이상한 체험을 했다.
바울은 이 체험의 일부를 고린도 후서 12:2-10에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바울은 그 체험이 이 서신을 쓰기 십사년 전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 체험은 보통 황홀경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바울은 신비체험을 하고 난 후에 괴롭고 치욕적인 만성적인 육체의 질병에 시달렸다. 그는 처음에 이 질병이 효과적인 사역을 하는데 장애가 될까봐 염려했지만 사실은 그의 자만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할 수 잇도록 함으로써 장애가 아니라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질병을 없애 달라고 세 번 기도했을 때, 이에 대한 응답은 그 질병을 제거해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딜만한 - 단지 그것을 지니고 살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된 - 충분한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이 육체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사역이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되었다면, 그 사역에 작용한 초월적인 능력은 바울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이 명백했다.
2. 바울의 “신비주의”
신학세계에서 유레없는 중량감을 갖고 있는 바울과 그의 저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단언한다. 아돌프 다이스만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다는 견지에서 해석하는 바울의 경향성을 ‘바울의 수난 신비주의’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이스만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추론적인 사고의 매개없이 내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모든 종교적 경향성”에 적용한다.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하면, 바울의 신비주의는 그 높은 지성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독특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에게는 하나님 신비주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신비주의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 가운데 제일의 수수께끼이다. 일단 그것을 파악하게 되면 나머지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신자들의 공동체 전체)은 개별지체들과 함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해 살아 움직이며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능력을 공급받는다. 이 몸에 붙어있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효력이 발생되며, 세례를 통해 인봉되고 성찬식을 통해 지탱된다. 세례는 신자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함께 사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생각했다.
3. 메사야의 고난에 첨예하며
바울이 보기에는 메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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