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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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과 인조반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과 후금군 사이에서 유연하고 무리없이 행동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전쟁의 참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만약 일이 잘못되어 누르하치에게 보복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왕권강화와 관련하여 자신이 추진하고 있던 일련의 구상들이 전쟁 때문에 방해 받을 수도 있기에 명의 징병요구를 거부하려 하였다. 또한 그가 지닌 ‘반명감정’을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1619년 3월 심하전투에서 후금군에게 대패했고 강홍립 등은 항복하여 포로로 억류되었다. 광해군은 자신이 애초부터 출병을 회피하려 하였고 강홍립에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라고 지시하는 등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같은 행보도 역시 광해군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명은 조선에 재징병을 요구 했지만 광해군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신료들이 강홍립 가족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홍립은 억류된 중에도 밀서를 보내어 후금의 사정을 알리는 등 광해군에게 여전히 중요한 정보원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행동이 명을 기만하고 의심을 받을 수도 있어서 한편으로는 선천부사 김응하를 기리는 작업을 하였다. 김응하는 ‘심하전투’ 당시 후금군의 공격으로 진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분전하여 후금군조차 경의를 표현한 용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해군은 계속되는 명의 원조요청이나 재징병에 단호히 대처하였고 오히려 명=후금의 대립구도 속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부각시켜 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구하고, 궁극에는 명이 조선에 대해 더 이상 재징병을 운운하지 못하도록 대처했다.
광해군은 나름의 혜안과 탁월한 외교수단을 통해 후금과 평화를 유지하고 명의 재징병을 회피하는데 성공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라 했다. 이런 일련의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정치적ㆍ사회경제적으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켜 종래에는 반정의 싹을 조금씩 틔우고 있었다. 광해군의 예상대로 원병을 보냈던 것은 조선사회에 심각한 경제적 영향을 끼쳤고 나라가 몸살을 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료들과의 거듭되는 대립 등으로 힘들게 대명정책을 이끌었지만 그는 지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정권에 권력을 잡았던 대북과도 외교정책에서만은 균열을 일으켰고 주변에는 믿고 맡길만한 측근이 부족했다. 경호책임자나 다름없는 훈련대장을 6년 동안 11번이나 바꾼것은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결국 광해군은 소신 있는 대외정책을 밀고 나가면서도 그 대외정책이 몰고온 내정의 파란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권보위에 전전긍긍하였고 결국 인조반정을 맞게 되었다.
ⅴ광해군 재평가의 이유
광해군은 폐위 직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인목대비가 끝까지 그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폐위되었어도 군왕을 죽일 수는 없다”는 인조와 신료들의 결사적인 방어로 인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배된 중에 부인과 아들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그 자신은 내란이나 후금의 침략 등으로 유배지를 옮겨가며 19년을 더 살다가 비참한 생애를 마감했다. 아마도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광해군, 그는 결국 패배자였다. 왕위에 있으면서 아무리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왕위를 빼앗긴 책임은 분명 그 자신이 질수 밖에 없다. 광해군의 몰락은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왕권이 패배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명기. 「폭군인가 현군인가-광해군 다시보기」.『역사비평 44호』. 1998. 역사비평사.
달리 말하면 선조 즉위 이래 관행으로 이어져오던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붕당사이의 갈등을 조절하고 이끄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는 그간의 역사에서 왜곡되어 왔던 그런 ‘혼군’이나 ‘폐주’는 아니었다. 승리한 서인의 관점에 써진 당대의 역사서만 가지고 그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재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인조반정의 주체들이 내세운 명분들도 분명 문제가 있다. 광해군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먼저 폐모살제라는 인륜을 져버렸다는 행동에 대해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단행한 행동들은 무수히 있어왔다는 것이다. 조선만 놓고 보더라도 먼저 태종을 들 수 있다. 그는 두 번의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이복형제는 물론 동복형제까지 내쳤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그의 치세동안 완벽히 다져진 내정의 안정을 세종대의 눈부신 발전의 기틀로 말하곤 한다. 그리고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종래에는 조카를 죽인 세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행동에 반발하는 당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광해군처럼 극명하게 몰아세우지는 않았다. 결국 광해군은 패배자로 내몰렸기 때문에 공격받은 것이다. 오히려 그는 소심하여 단호하게 신료들에게 반대하지는 못했지만, 영창대군을 죽이는데 끝까지 반대하였고 죽일 생각이 없어서 서인으로 강등하여 유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목대비의 경우에도 그는 앞선 군주들처럼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듯이 단호하게 대처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는 등 민생을 등한시 했다는 점이다. 앞서 논증했듯이 그는 궁궐을 짓는데 열중한 것은 자기 개인의 사리사욕보다는 왕권의 강화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궁궐 영건사업에 일반 양민들뿐만 아니라 양반들에게도 포를 거두는 등의 정책을 펼쳤고 오히려 그는 대동법등을 실현하는 등 민생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오랑캐를 가까이 하고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논란 자체가 당시 반정 주체들의 국제상황에 대한 이해력 결여를 드러내는 행위이고 그들 자신들도 정권을 잡은 뒤 모순점을 드러내며 똑같은 정책을 펼쳐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왜란이라는 전시상황을 맞아 왕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이미 그의 비극적 최후는 예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왕위계승자로서 정통성 결여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세력들 때문에 그는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이후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사업을 쉬지 않고 벌여나갔다.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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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3.27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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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3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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