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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산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생애, 작품연구, 고산 윤선도의 문학세계, 어부사시사의 원문,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특징, 어부사시사 감상평,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 평가, 어부사시사 교육적 가치, 교육방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고산 윤선도의 생애

Ⅲ. 고산 윤선도의 작품연구

Ⅳ. 고산 윤선도의 문학세계

Ⅴ.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원문

Ⅵ.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특징

Ⅶ.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감상평

Ⅷ.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평가

Ⅸ.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교육적 가치
1. 언어교육으로서의 가치
2. 문화교육으로서의 가치
3. 생태교육으로서의 가치

Ⅹ.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교육방안

참고문헌

본문내용

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병진소(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견회요 (遣懷謠)〉5수와〈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Ⅲ. 고산 윤선도의 작품연구
윤선도의 학술적 업적으로는 <고산유곡> 6권 6책이 전한다. 이 책은 1971년 6월 정조의 어명으로 당시 전라감사 여유린에게 출간하여 바치도록 했다. 그 뒤 고산 본댁에서 소장된 구판본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여 <고산집> 15부를 재간하도록 하였다. 이 밖에 고산 자신이 친필로 쓴 가첩이 고산 종가에 전하는데 그 표제가 하나는 <산중신곡>이고, 다른 하나는 <금쇄동집고>라고 한다. 그런데 가첩 <산중신곡>은 그 표지까지 합쳐서 10수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만흥>, <조야요>, <하후요>, <일모요>, <야심요>, <기세탄>, <오우가>, <고금영> 등이다. 가첩 <금쇄동집고>는 표지까지 12수로 되어있으며 거기 실린 내용은 단가로 <증반금>, <추야초>, <춘요음> 등 3수만 있고 기타는 한시이다. 또 가첩은 전문이 순국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문집은 한다로 고쳐진 데가 많았다. 고산유곡 제6권 하별집의 가사 75수는 장가인 가사가 아니고 단가인 시조를 말하는데 고산이 시인으로서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시조였다고 알려져 왔다. 먼저 <산중신곡>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여기에는 <만흥> 6수, <조야요> 1수, <하후요> 2수, <일모요> 1수, <야심요> 1수, <기세탄> 1수, <오우가> 6수 등 18수가 된다. 이어서 <산중속신곡> 2수가 나오는데 <추야조> 1수 <춘요음> 1수가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고금영> 1수, <증반금> 1수, <초연곡> 2수, <파연곡> 2수가 된다. 그리고 <어부사사사>가 춘하추동 각 10수씩 40수로 되어 있고 <만흥>이 제 6수로 대치된 <어부사 여음>이 나온다. 그 다음에 <몽천> 3수, <귀천요> 5수의 순서로 되어 있다. 따라서 고산의 국문시가는 모두 75수가 된다고 하겠다.
Ⅳ. 고산 윤선도의 문학세계
윤선도는 다섯 개의 자연물을 ‘벗’으로 삼았는데 벗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를 가까이 유지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맹자의 사상적 영향 아래 이루어진 윤선도 자신의 상우관을 오우가의 자연에서 어떤 덕목을 발견하려는 작업의 타당성을 더욱 튼튼히 입증해 준다. 여기서 말하는 덕목은 인간적인 것이요, 인간이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동물에게는 성격과 행위가 있는데 반해 무생물과 식물에게는 성격만 있고 행위가 없다는 윤리의 한계성이 나타나 있고 동물이 등장하지 않고 무생물, 식물만 등장한 것은 윤선도가 추구한 윤리가 외적 윤리가 아니라 내적 윤리였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그가 왜 내적 윤리를 추구했는지는 정치적 패배는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주었고 이는 행동의 윤리보다는 개인의 인격완성이라는 내적 윤리에 더 관심을 가지게 한 것이다.
윤선도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탐구자의 관점이고 그의 작품 속에서 나오는 자연의 이중성을 해명하는데도 이 관점이 필요하다. 탐구자 관점에서 본 동일한 자연은 윤선도의 작품 속에서 항상 일정하게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다 탐구적 관점에서 부정적 의미로 파악되던 자연도 일단 관점이 달라져 유람자 관점에서 보면 그것이 미적대상이 되고 관조의 세계로 이끌어 몰아의 경지로 이끌어 흥을 일으켜 주는 것이다.
윤선도는 이렇게 관점의 변경이란 것을 투철하게 인식한 것 같다. 또 윤선도의 어부사 여음은 이현보의 경우보다 정치적 관심이 더욱 두드러져 있고 강산에 누운 것은 임금의 은혜하고 보는 것은 선비의 전형적 사고방식이다. 이현보의 작품은 유람자 관점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생각되지만 윤선도는 자연 속에 노닐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타의에 의한 것이다. 정치에 관한 그의 집념은 끈질긴 것이었고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그러한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선도는 자연으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감추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정적들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을 꾸짖고 저주한다. 자연 또는 자연 속의 생활을 매개로 해서 이러한 심정을 잘 토로한다. 그리고 애끓는 연군의 정도 나타내며 자신의 모습을 ‘소나무’와 ‘바위’등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자신의 이상적 모습을 ‘달’로 나타내기도 했다. 우리는 여기서 입장에 따라 사물의 명칭이 달라지듯이, 입장에 따라 사물의 보는 내용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자연관의 이론이다.
윤선도는 자연을 문화의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복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Ⅴ. 고산 윤선도 어부사시사의 원문
[春詞]
압에 안 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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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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